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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 이거 실화냐? 병자호란 서사시

지니쌤 동진이 2017. 10. 2. 07:35

 

곧 개봉(내일 2017년 10월3일)

“병자호란” 이거 실화냐?

병자호란을 시간 순서대로 “이거 실화냐?”라는 테마로 엮어 보았습니다.

이거 실화냐? 서사시 

[병자호란]

 

“이거 실화냐?”시리즈...

 

[프롤로그: 병자호란 전]

 

1)첫번째:

1636년 4월 11일

홍타이지가 청의 칸 홍타이지가 황제자리에 앉았다.

 

“이거 실화냐?”

 

홍타이지는 몽골부족을 모두 접수했고 명장수들도 귀화했다.

이들은 모두 삼궤구고두례(3번 무릎꿇고 9번 머리를 조아리는 례)를 행했다.

 

당시 청에 사신으로 가 있던 첨지 나덕헌과 이확은 절을 하지 않았고 죽도록 맞았다.

조선에 대해 불평과 화를 낸 청의 서신을 받아 오다가 폐기했다.

 

2)두번째:

청의 서신을 받아 오다가 중간에 폐기한 나덕헌과 이확은 귀양을 갔다. 응?

 

“이거 실화냐?”

 

홍타이지에게 절을 하지 않아 죽도록 맞아 거의 죽다 살난 사람들이었다.

이정도면 충신 인데, 서신을 받자 마자 폐기 하지 않고 받았기 때문에 귀양을 건것이었다.

 

[병자호란]

이후 어쩌고 저쩌고 많은 일들이 있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다.

 

3)세번째:

1636년(병자년) 12월 9일.

청군은 순안(평양 북서쪽)을 지나 안주(평안안도)를 향해 오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황주(황해도) 정방산성 도원수 김자점이 한 말:

“이거 실화냐?”

 

김자점은 청나라가 겨울에 쳐들어 오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의주 건너편 용골산 봉화대에서 12월 6일부터 봉화가 올라갔다. 그러나 사신을 맞이하러 나오는 것이다. 라고 말 하며, 무시했다.

9일 군관 심용이 청군이 오고 있다고 보고 했는데, 거짓 보고라며 목을 베려 할 때 또 다른 이가 같은 보고를 하자 급하게 장계를 올렸다.

 

4)네번째;

9일 보낸 “청군이 안주로 오고 있습니다”라는 장계는 13일 도착했다.

인조가 말 했다.:

이거 실화냐?

 

인조는 청이 깊숙이 들어올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문제는 안주를 향해 오고 있다고 보고 했는데 14일 청군은 홍제동까지 와 있었다.

 

5)다섯 번째

1637년(정축년)1월 18일

주화파 이조판서 최명길이 항복 문서를 작성했다.

이 문서를 본 척화파 김상헌이 말 했다.

“이거 실화냐?”

 

예조판서 김상헌은 이대로 가면 적은 반드시 군신관계를 요구할 것이다.며 찢어버렸다. 그리고 통곡을 하였다.

최명길은 이 문서들을 주어서 다시 붙였다고 전해진다.

 

6)여섯 번째;

1월 19일

최명길 등이 항복 문서를 가지고 나갔는데, 답서를 받지 못하고 나갔다.

참판 한여직이 답서를 받지 못한 이유를 안다 했다.

국서에 “신(臣)”자를 쓰지 않아서 그런 것이니 꼭 써야 한다고 했다. 김상헌이 없을 때 쓰자고 했다.

 

다음날(20일) 최명길은 답서를 받아 왔는데, “척화신들을 잡아 오고 국왕이 나와야 한다.”고 했다.

대신들이 말 했다.

“이고 실화냐?”

 

청의 용골대 등은 황제가 심양에 있으면 국서로 해도 되지만 황제가 여기까지 왔으니 국왕이 나와야 한다고 했다.

 

7)일곱번째

1월 21일

이조참판 정온은 국서에 “신(臣)”자가 들어갔단 말을 듣고 말 했다.

“이거 실화냐?”

 

“정온은 군신의 관계가 정해졌면 앞으로 그 명령만 따라야 할것입니다. 옛날부터 지금까지 망하지 않고 보존되는 나라가 있었습니까? 무릎을 꿇는것 보다 죽는것이 낫습니다. 나라를 팔아 넘긴 죄를 바로 잡으소서.”

라고 말 했다.

 

8)여덟 번째:

1월 20일 청은 척화신과 국왕이 나와야 화친한다고 했다. 인조는 “척화한 신하들과 함께 죽을지언정 어찌 묶어 보내리오”라고 했었다.

22일 세자는 자신이 나가겠다고 하자 비변사에서 나가지 못하게 했다. 그들은 “홍익한”울 척화의 우두머리로 지목했고, 최명길은 이를 거들었다.

김류, 최명길 등은 논의끝에 자수하게 해서 끌고 나가게 했다.

23일 윤집과 오달제가 자수했다.

23일부터 연일 계속된 공격이 있었다. 사발만한 포가 비처럼 쏟아 졌다고 한다.

23일과 26일 행궁 밖이 소란스러웠다. 승지 이행원이 무슨 일인가 알아보니 “일부 군인들이 척화신들을 내보내라고 시위를 하고 있습니다.”라고 말 했다.

“이거 실화냐?”

군인들의 시위에 겁을 먹었다. 반정을 통해 왕이된 인조는 어떤 생각이었을까?

 

9)아홉 번째;

그런데, 이 시위는 군 지휘부가 사주한거라고 한다.

“이거 실화냐?”

군인들은 척화신들에게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전쟁 후 무관들이 문관들을 질책했던 일이 있었다. 대의명분으로 척화만 말 했을 뿐 다른 대책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탁상공론. 자신의 부하들이 추위에 죽는 것도 보았기에....

 

10)열 번째

26일 청사신이 왔다. 그리고 강화도가 함락 되었다는 소식을 전했다.

 

“이거 실화냐?”

 

봉림대군의 친필 서신을 가지고 왔기 때문에 믿을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11)열 한 번째;

천혜요새 강화도가 무너지다니....

어떻게 된 것일까?

강화도 함락의 “이거 실화냐?”를 알아보자.

 

1636년 12월 14일 봉림대군을 비롯해 왕실 가족과 고위관직들은 강화도로 피난길을 떠났다.

그런데 배가 없어 왕실 가족들이 추위에 떨며 배를 기다렸다고 하는데.....

“이거 실화냐?”

 

이때 강화도 검찰사로 영의정 김류의 아들 김경징이 임명되었다. 우의정 이홍주가 천거 하였다.

 

그러나 김경징은 자격이 없는 사람이었다.

강화도로 들어갈 때 피난민들을 배에 태우기보다 자기 재물을 옮기기에 바뻤다.

그리고 제일 좋은 배를 자기가 탔고, 수운판관 어한명은 봉림대군을 위해서 견고한 배를 남겨 두었는데 김경징이 빼앗아 자기랑 친한 사람들을 태웠다.

왕실 가족들은 추위에 떨며 배를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인조반정 1등공신 영의정 김류의 아들이었던 간이 배 밖으로 나왔었다.

 

12)열 두 번째

김경징은 강화도를 방어할 생각이 없었다. 날마다 술 잔치를 벌렸다.

그런데 청은 배80척, 배 하나에 50-60척에 나눠타고 강화도로 들어가고 있었다. 강화도 맞은 편에는 1만 6천명의 병력이 대기하고 있었다.

 

김경징은 김적으로부터 청이 강화도로 오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김경징은 거짓 보고라며 그를 죽이려 했다.

청이 수군을 가지고 있다는 거, 그리고 한강이 얼어 있는데 배를 이동시킬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또 다른 보고가 들어 왔고, 그는 말 했다.

 

“이거 실화냐?”

 

청은 어떻게 수군을 가지게 된걸까? 종묘호란때는 후금이었을 때 수군이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달랐다. 명나라에서 귀화한 수군 장수 공유덕이 있었다.

홍타이지는 1월 18일까지 강화도 공격을 유보하면서 21일까지 공격준비를 마치라 했다.

 

청은 조선의 고장난 배를 수리했고, 민가를 뜯어 배를 만들었다. 그리고 동차(작은 수레)를 통해서 바를 옮겼다.

그리고 22일 강화도를 공격했다.

 

김경징은 우왕좌왕했다.

 

13)열 세 번째

천혜요새 강화도는 하루만에 점령당했다.

 

“이거 실화냐?”

 

청은 갑곶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갑곶은 작은 배로도 들어올 수 있는 곳이었다. 그곳은 충청수사 강진흥이 방어를 하고 있었는데 배7척과 200여명의 병력 밖에 없었다.

어이없게도 김경징은 주력부대를 완전 반대쪽인 광성진에 주둔시켰다. 광성진을 지킨 장신은 조수때문에 가기 힘들다고 하면서 머뭇거리며 천천히 갔다. 갑곶에 도착한 그는 청 배 한척을 들이받아 침몰시켰지만 적들이 다가오자 도망을 갔다.

 

청군은 쉽게 상륙 했으며 하루만에 점령당했다.

그리고 모두 포로로 붙잡혔다.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된 그런 전투였다.

 

14)열 네 번째

다시 남한산성으로 돌어가보자.

1월 26일 강화도 함락소식을 접한 인조는 항복 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1월 30일 인조는 청의를 입고 서문을 통해 삼전도로 향했다. 삼전도에서 청의 홍타이지에게 “삼배구고두례”라는 굴욕적인 항복을 한다.

 

“이거 실화냐?”

 

1월 27일 김상헌 등은 항복절차를 논의? 하기위해 청 진영으로 들어갔다.

청은 마치 배려를 하듯이 말 했다.

“가장 으뜸되는 항복인 ‘함벽여츤’이 있다. 아것은 손을 뒤로 묶고 관을 매고 구슬을 입에 물고 나오는 것이다. 이것은 잔인하니 두번째 것으로 하자.” 관을 매고 가는 것은 목숨을 맡기는 것이었다.

청이 말한 두번째 방법이 세번 절하고 아홉번 머리를 조아리는 ‘삼배고구두례’였다.

인조는 죄인이기에 용포를 입을 수 없었고, 죄인이기에 남문으로 나갈 수 없었다. 인조는 흰말을 타고 청의를 입고 서문을 통해 삼전도로 갔다.

그리고 어느 시점에서 내려 걸어서 홍타이지 앞으로 가서 삼배구고두례라는 굴욕적인 항복을 하였다.

 

에필로그: 병자호란 후

 

15)열 다섯 번째

항복후 2월 2일 홍타이지는 심양으로 돌아갔고 인조는 배웅을 했다.

수 많은 피로인(납치된 민간인)들이 끌려갔다.

인조가 남한산성에 숨어 있는 동안 수 많은 민간인들이 학대를 당했다. 특히 여성과 아이들의 피해는 그 무엇보다 바참했다.

피로인들은 약50만이라고 전해지는데 부풀려진 것이다. 라는 말도 있다. 좌우간 피로인들 도망가면 다시 청으로 보내야 한다는 원칙이 있었다.

 

그러나 가족들이 돈을 주고 대려올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 그런개 그 몸값이 1000냥 이상 되기도 했다.

 

“이거 실화냐?”

 

너무 비싸다. 처음에는 은3-5냥 비싸도 10냥이 넘지 않았다. 그런데 고위관직이었던 이성구가 아들을 1500냥이나 주고 속환하면서 몸값이 뛰어 서민들은 고통을 받았다.

특히 속환돠었다 해도 여성들은 환냥녀라 해서 고통을 받았다.

사대부 집안 사람들은 인조에게 이혼소송을 걸었다. 그러나 인조는 이를 기각했다.

 

16)열 여섯 번째

척화파 오윤과 오달제는 1월 29일 산성밖으로 끌려나갔다. 청은 이들은 모두 죽임을 당했다.


"이거 실화냐?"

인솔해준 최명길은 예를 갖추면 살수도 있으니 예를 갖추라 팁을 주었다. 그리고 청이 철수 하던 길에 평양서윤 홍인한은 체포되었다.

이 세사람은 모두 끝까지 굴복하지 않았으며, 끝내 죽임을 당했다.

인조는 이들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남한산성에 현절사를 세웠다.

17)열 일곱 번째

청으로 끌려간 뒤 28년만인 현종3년에 (조선에는 왕이 두번이나 바뀌었다.) 안추원은 탈출에 성공했다.

청으로 돌려 보내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그를 고향에서 살게 해주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그를 위해 경제적지원은 하나도 없었다. 결국 그는 다시 청으로 돌아가는 길에 체포되었다.

 

그리고 청에간지 35년만에 안단이 탈출했다. (숙종1년, 왕이 세번 바뀌었다.) 그는 압록강을 건너다 의주부윤에게 붙잡혔다. 노인이 되어 있던 그는 눈물을 흘리며 다시 청으로 끌려갔다.

 

“이거 실화냐?”

 

병자호란!

병자호란을 공부하다보면 시작부터 끝까지 그리고 그 이후까지 너무 황당한 일이 많아서 그때 그때 말 하게 된다.

 

“이거 실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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