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수업/초등학교 5학년 2학기 사회

[초등학교5학년 2학기 사회] 1.우리역사의 시작과 발전_4)삼국 통일과 발해의 건국_세번째

지니쌤 동진이 2017. 8. 15. 00:37

1단원 4. 삼국 통일과 발해의 건국 요점정리 및 해설_세번째(60-63쪽)


1.우리역사의 시작과 발전

  1) 선사시대의 생활 모습

  2) 최초의 국가 고조선

  3) 고구려, 백제, 신라의 건국과 발전

  4) 삼국 통일과 발해의 건국


4. 삼국 통일과 발해의 건국



신라
1. 문무왕-통일을 이룬 왕.
      -고구려와 백제를 통합하는 정책을 펼침.

        (고구려와 백제 유민을 통합하려함)
2. 신문왕-왕권강화
      -여러 제도를 새롭게 정비함(통일신라의 기틀을 다짐)

 해설:

김춘추(무열왕)

백제를 멸망 시켰습니다. 신라는 태어날 때 부터 신분이 확실하게 정해져 있었습니다. 골품제기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시나요? 신라의 왕족은 "성골"이었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왕족이 경우 "성골"이었습니다. 성골 아래 "진골"이 있었는데, 이는 아버지와 어머니 둘 중 한 분이 성골일 경우에 "진골"이라는 신분을 가졌습니다.

김춘추는 진골 신분이었지만 왕이 되었습니다. 당시 성골 중 왕이 될 수 있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진골" 신분으로 왕이된 첫번째 사람입니다.


문무왕
무열왕(김춘추)의 아들 문무왕때 나당 연합군이 "고구려"를 멸망하였습니다.
문무왕은 멸망한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들을 노예로 삼으며 괴롭히기 보다는 이들을 통합하려고 하였습니다. 이들에게도 기회를 주었으며, 관직에 나가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문무왕의 무덤은 바다에 있습니다. 이를 수중릉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왜 바다세 무덤을 만들었을까요? 문무왕이 동해바다에서 용이 되어 신라를 지키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신문왕
신문왕은 무열왕의 아들이었습니다. 신문왕은 나라를 새롭게 정비하였습니다. 아버지를 그리워 하며 감은사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만파식적 이라는 피리를 만들었습니다. 만파식적을 불면 적의 군사가 물러가고 질명이 낫는 등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는 전설의 피리입니다.



<만파석 이야기에 담긴 신라인의 바람>(60쪽)
신문왕은 대왕릉이 잘 보이는 해변에 감은사를 짓고 수시로 이곳에 와서 아버지를 그리워하였다. 하루는 동해의 용이 신문왕에게 나타나 모든 파도를 잠재운다는 뜻의 만파식적이라는 피리를 주었다. 그러면서 용은 “이 피리를 불면 적의 군사는 물러가고, 모든 질병이 나으며, 가뭄에는 비가 오고, 비가 올 때는 하늘이 개며, 바람이 불고 파도가 심할 때는 바람이 가라앉고 파도가 잔잔해질 것이다”라고 하였다.

▲경주 감은사지 삼층석탑(초등학교 5학년 2학기 사회 60쪽)
경주 문무대왕릉


발해: 신라와 당은 발해를 견제하면서 발해의 성장을 막으려고 하였습니다.
- 발해는 당을 공격함.
  주변 영토을 넓힘.
  일본과는 좋은 사이를 유지.
- 후에 발해는 당의 제도와 문물을 받아들이기 시작함.
  당과 활발히 교류 함.
- 발해는 상경(닝안)으로 도읍을 옮김.
  고구려의 옛땅과 말갈의 여러 부족이 살고 있는 북동쪽으로 영토를 넓힘.
  당은 발해를 “바다 동쪽에 있는 번성한 나라”라는 뜻의 “해동성국”이라고 부름.


해설

발해는 고구려 유민이 건국한 나라입니다.
처음에는 당과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왜 좋지 않았을까요? 신라와 당이 연합하여 고구려를 멸망시켰다고 했지요? 발해는 고구려 유민들이 건국했고요.그래서 발해는 당을 좋아하지 않았고 당을 공격했습니다. 그리고 처음에는 신라와도 관계가 좋지 않았습니다.
발해는 일본과는 좋은 사이를 유지하면서 지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당과 사이가 좋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전쟁을 하면서 영토를 확장했지만, 후에는 당의 제도와 문물을 받아들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후에는 신라와도 사이가 좋아져서 교류를 하면서 지냈습니다.

발해는 상경(닝안)으로 수도를 옮겼으며, 옜 고구려 땅과 말갈의 여러 부족이 살고 있는 북동쪽으로 영토를 넓혔습니다.
당은 나라를 크게 발전시킨 발해를 "해동성국"이라고 불렀습니다. 해동성국이란 "동쪽바다에서 번성한 나라"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신라와 발해의 전성기(초등학교 5학년 2학기 사회 61쪽)


통일 이후 신라와 발해는 여러 나라와 활발히 교류하였다.
1. 신라
-신라는 당과 관계가 좋아지자 당으로부터 비단과 서적 등을 수입함.
-신라와 당은 사신, 유학생과 승려 등이 자주 왕래하여 서로의 문화에 영향을 줌.
-신라는 바다를 통라여 당과 일본뿐 아니라 서역과도 활발하게 교류함.


2. 발해
-교역로가 발달하여 신라 당 거란 일본 뿐만 아니라 중앙아시아와도 교류
-신라와는 갈등이 있었으나 점차 협력 관계를 이어감.
-당과는 사신이 자주 오감.
-발해인이 당으로 유학 가기도 함.
-일본에는 특산물을 수출하거나 사신을 보냄.(사회과부도 90-91참고)


해설

신라와 당은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켰지만 전쟁 이후에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전쟁 후 당이 신라의 전체를 지배하려고 했습니다. 결국 신라과 당은 전쟁을 하였고 신라땅에 있는 당 군사들을 몰아냈습니다. 신라는 당과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사이가 좋아졌으며, 비단과 서적들을 수입했습니다.
신라와 당은 서로 사신들이 오고 갔으며, 유학생과 승려들이 오고 가면서 서로의 문화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신라는 바닷길을 통해서 여러 나라들과 무역을 했는데, 당 뿐만 아니라, 일본, 그리고 서역과도 교류를 하였습니다.


발해 역시 교역로가 발달하면서 여러 나라들과 교류를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당과 신라와 사이가 좋지않았지만 점차 사이가 좋아지면서 교류를 하면서 지냈습니다.
그리고 일본, 거란 뿐만 아니라 당을 넘어 중앙아시아와도 교류를 하면서 지냈습니다.

특히 발해와 당은 사신들이 자주 오고 갔습니다. 발해 사람들이 당으로 유학을 가서 당의 문화를 배워서 오기도 했습니다.

일본에도 특산물을 수출하였으며 사신을 보냈습니다.


신라와 발해는 육로와 해로를 통해 어떤 교류 활동을 하였을까요?(62쪽)


발해 유적지에서 발견된 중앙아시아 은화(초등학교 5학년 2학기 사회 62쪽)
발해가 일본에 보낸 외교 문서(복제품)
경주 원성왕릉 석상_곱슬머리, 우뚝한 곳날, 머리에 두른 것 등에서 서역인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작은 이야기 역사: 해상왕 장보고는 어떤 사람일까?(63쪽)


장보고는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고 무역활동으로 이름을 떨친 인물이다. 당에서 군인으로 활약할 때 신라인이 당의 해적에게 잡혀와 노비로 팔리는 것을 본 그는 신라로 돌아와 왕의 허락을 얻어 1만명의 군사로 청해진을 설치하였다.
장보고는 해적을 무찔러 신라인의 해상 무역로를 보호하였다. 그리고 당 신라 일본을 연결하는 국제 무역을 주도하여 많은 재산과 명성을 쌓았다.


장보고(초등학교 5학년 2학기 사회 63쪽)
장보고 무역선
청해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