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니의 역사여행/소중한 우리유산

[경기도 이천] 서희 테마파크

지니쌤 동진이 2019. 4. 25. 13:10

서희 테마파크


장소: 경기도 이천시 부발읍 마암리 산 16-5




경기도 이천에 위치한 서희 테마파크 입니다. 서희는 고려시대 문관으로서 거란의 80만 대군이 쳐들어 왔을 때, 적장 소손녕과 외교로서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나라를 지키신 분입니다.

서희는 문관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우리가 장군이라는 호칭을 쓰기도 하지만 서희는 무관이 아니라 문관입니다. 고려시대에는 문관을 천대 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심지어 문관은 과거도 없었고, 전쟁에서 공을 세우면 관직에 올라가곤 했습니다.


서희는 이천서씨 서신일의 손자이고, 그의 아버지는 서필입니다. 잠시 서필은 우리들에게 많이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 역시 고려의 재상으로서 왕에게 직언을 하는 등 청렴한 삶을 살았습니다. 서필은 고려왕 광종이 금 술잔을 하사하자, "신이 금술잔을 사용하면 임금께서는 어떤 술잔을 사용하시겠습니까?" 하며 거절하였습니다. 또 어느날 왕의 말이 죽었는데, 그 관리를 죽이려 했습니다. 당시 말을 관리하는 사람은 사람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했고, 말보다보 대접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때 서필은 "옛날 공자는 마굿간에 불이나자, 말보다 사람의 안위를 먼저 물어 보았습니다."라고 말을 하면서 말 관리인의 목숨을 구해 주었습니다.

서필의 아들 서희 역시 임금에게 옳은 말을 할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하급 관리인 정우현이 바른말로 상소를 올리자 성종이 노해서 정우현에게 벌을 주려고 하였습니다. 이때 서희가 나서 임금에게 "신하가 바른말을 하는 데는 벼슬의 높낮이가 따로 없는 법이니 정우형에게는 벌을 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을 주어야 합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서필의 아버지는 서신일로서 이천서씨의 시조입니다. 그는 신라에서 아간의 벼슬을 하였는데, 나라가 기울었는데도 관리들이 세력 다툼을 하며 부패하자  모든 것을 버리고 효양산(서희 테마파크 뒤에 있는 산) 기슭에서 살았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농사를 짓고. 후학을 양성하며 살았습니다. 어느날 사슴이 사냥꾼의 화살을 맞고 집에 들어온 사슴을 구해 주었는데, 그날 밤 꿈에 신인이 나타나 "그 사슴은 나의 아들이었는데 덕분에살았다 하며, 아들을 낳게 될 것이고, 그 아들들이 높은 벼슬을 하게 될것이다."라고 말을 했다고 합니다. 이에 서신일은 나이 80세때 아들을 낳았는데 그 사람이 바로 서필이었습니다.


이제 서희 테마파크로 들어가 봅시다. 서희 테마파크에서 서희의 일대기 뿐만 아니라 고려 초기의 역사 역시 함께 공부할 수 있을 겁니다. 



  장위공 서희 역사 산책로


입구에 있는 산책로 코스 입니다. 안내판의 숫자와 공원에 있는 조형물의 숫자가 일치하지 않기도 합니다. 이 부분이 조금 안타깝지만, 그래도 나름 서희의 일생뿐만 아니라 고려 초기의 역사 역시 함께 공부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천에 가신다면 서희 테마 파크를 강추 합니다.


서신일의 손자 서희의 출생


1. 이천 효양산을 찾아 오는 서신일


서신일은 이천서씨의 시조이며 서희의 할아버지입니다. 서신일은 신라 조정에서 아간 벼슬을 하였으나, 세상이 어지러운 것을 보고 벼슬에서 물러난 후 이천 효양산으로 들어와 살면서 서당을 열고 후학들을 가르쳤습니다.


2. 사냥꾼에게 쫓기는 아기 사슴


하루는 아기 사슴이 사냥꾼이 쏜 화살을 등에 맞고 쫓기게 되었습니다. 아기 사슴은 사냥꾼의 추격을 받아 목숨이 위태로웠습니다.


3. 아기 사슴을 구해주는 서신일


서신일은 밭에 나가 일을 하다가 사냥꾼에게 쫓기는 아기 사슴을 풀더미 속에 숨겨 목숨을 구해 주었습니다.


4. 서신일의 꿈 속에 나타난 산신령


그날 밤 서신일의 꿈에 산신령이 나타나 "아기 사슴은 나의 아들인데 그대 덕분에 목숨을 건졌으니 큰 인물이 될 아들을 낳을 것이다."라고 약속하였습니다.


5. 사슴의 보은으로 아들을 얻다.(조형물 번호는 5번. 입구 안내판 번호는 6번.)


그후 서신일은 나이 80세에 아들 서필을 낳았습니다. (서필의 아들이 서희 입니다.)


(제가 이천서씨인데 저희 족보책에는 81세라고 나옵니다.)


6. 이천의 유래_서신일의 조카 서목의 도움을 받은 왕건 (6번 조형물은 조금 떨어져 있습니다. 서희 역사관으로 올가가는 계단 옆에 있습니다.)


서목은 서신일의 동생인 서신통의 아들입니다.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와의 마지막결전을 앞두고 전쟁터로 나가는 길에 이천을지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때마침 홍수가 나 흙탕물이 가득한 복하천을 건너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이때 서목이 고려의 군사들을 안전하게 인도하여 군사들이 무사히 복하천을 건널 수 있었습니다. 이를 고맙게 여긴 태조 왕건은 주역에 있는 (큰 내를 건너 이로움을 얻는다.)의 글귀를 따서 이곳에 '이천'이라는 고을 이름을 내렸습니다.


7. 태조왕건을 만나는 서목과 서필(조형물 번호는 7번이나, 입구 안내판은 5번입니다)


서목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백제를 격파하고 마침내 후삼국을 통일한 태조 왕건은 이천 서씨의 공을 잊지 않았습니다. 서필은 태조의 부름을 받고 벼슬길에 나가 임금에게 바른 말을 하였습니다.


8. 왕이 내린 금 그릇을 사양하는 서필.(조형물은 8번이나, 입구 안내판은 7번 입니다.)


어느날 광종이 신하들에게 금 술잔을 선물하였는데, 서필은 신이 금술잔을 사용하면 임금은 어떤 술잔을 사용하겠습니까? 라고 말을 하면서 받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광종은 청렴하고 강직한 서필을 더욱 신임하게 되었고 마침내 치고의 관직인 내의령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세상을 떠난뒤에는 정민공'이라는 시호응 받고 광종의 묘정에 함께 모셔지는 영예를 누렸습니다.


9. 겨례의 위대한 스승 서희의 탄생.(조형물은 9번이나 앞에 안내판은 8번 입니다.)


태조25년(서기 942년) 장치 거란의 침입으로 위기에 처한 고려의 운명을 구하고 겨레의 위대한 스승이 될 서희가 내의령 서필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의 서희~과거 급제까지


10. 부친의 가르침 속에 글공부에 열중하는 서희.(조형물은 10번이나 앞에 안내판은 9번 입니다.)


서희는 어린 시절부터 부친을 닮아서 성품이 곧고 바르며 지혜로웠습니다. 어려서부터 책읽기를 즐겨하고, 늘 부친의 가르침을 좇아 글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11. 어린시절의 서희(조형물은 11번이나 앞에 안내판은 10번 입니다.)


어린시절 서희는 장차 나라의 큰 인물이 되기 위해 글공부에 힘을 쏟으면서 무술 연습도 열심히 하는 등 심신의 단련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12. 과거시험을 준비하는 서희.(조형물은 12번이나 앞에 안내판은 11번 입니다.)


광종은 중국에서 귀화한 쌍기의 도움을 받아 여러가지 개혁 정책을 펴 나갔습니다. 젊고 유능한 인재들을 뽑기 위해 마련한 과거시험도 그중 하나였는데 서희는 자신의 큰 뜻을 펴기 위해 과거 시험에 읭시할 준비를 하였습니다.


13. 서희의 과거 급제.(조형물은 13번이나 앞에 안내판은 12번 입니다.)


광종 11년(서기960년)에 열린 과거 시험에서 서희는 18세의 어린 나이로 갑과에 당당히 장원급제하여 광평원외랑이라는 벼슬로 관직을 시작하였습니다. 벼슬을 하면서 과거시험의 감독관이었던 싸이의 지도를 받는 등 존경받는 관리가 디고자 노력하였습니다.



14. 금의환향하는 서희.(조형물은 14번이나 앞에 안내판은 13번 입니다.)


과거시험에서 장원 급제한 서희는 고향 사람들의 뜨거운 환대를 받으며 고향인 이천에 왔습니다. 그리고 효양산에 있는 할아버지 서신일의 무덤을 찾아가서 참배하였습니다.

링크는 서신일의 묘 입니다-->(http://blog.daum.net/nasaro1/213)


 서희! 국제 정세에 눈을 뜨다.


15. 벽란도에서 외국 상인들을 만남.(조형물은 15번이나 앞에 안내판은 14번 입니다.)


예성강 하구에 있는 벽란도는 당시 외국의 배들이 드나드는 국제 항구였습니다. 젊은서희는 벽란도에 찾아오는 다른 나라 사람들을 보면서 차츰 고려를 둘러싼 국제 정세에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16. 북방의 정세를 살피다.(조형물은 16번이나 앞에 안내판은 15번 입니다.)


북방으로 진출해 고구려의 옛땅을 되찾고자 하는 것은 고려의 숙원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서희는 임금을 수행하며 북방지역을 순행하였는데 순행할 때마다 날로 강성해지는 거란의 움직임을 보며 고려의 앞날을 걱정하였습니다.


17. 광종, 경종에 이어 성종을 보살피다.(조형물은 17번이나 앞에 안내판은 16번 입니다.)


광종과 경종에 이어 성종이 고려의 6대 왕이 되었는데, 그는 최승로가 제시한 '시무 28조'라는 새로운 정책을 받아들여 개혁정책을 펼칩니다. 부친을 닮아서 청렴하고 강직한 관리가 된 서희는 최승로와 더불어 성종의 개혁정책을 앞장서서 보좌하였습니다.



18. 송나라에 사신으로 간 서희.(조형물은 18번이나 앞에 안내판은 17번 입니다.)


광종23년(서기972년) 서희는 여러 해 동안 국교가 끊겼던 송나라에 사신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서희의 단정한 용모와 조리있는 말솜씨, 그리고 예의바른 태도에 깊은 인상을 받은 송나라 태조는 서희에게 검교병부상서라는 영예로운 벼슬을 내렸씁니다. 서희의 뛰어난 외교술은 이때부터 싹튼 것입니다.


19. 임금에게 바른 말로 간하다.(조형물은 19번이나 앞에 안내판은 18번 입니다.)


하급 관리인 정우현이 바른말로 상소를 올리자 성종이 노해서 정우현에게 벌을 주려고 하였습니다. 이때 서희가 나서 임금에게 "신하가 바른말을 하는 데는 벼슬의 높낮이가 따로 없는 법이니 정우형에게는 벌을 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을 주어야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크게 깨달은 성종은 정우현에게 벼슬을 조고 서희에게 귀한 선물을 내렸습니다.


20. 진정으로 백성과 나라를 사랑한 서희.(조형물은 20번이나 앞에 안내판은 19번 입니다.)


진정한 애국심, 뛰어난 판단력과 용기로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나라를 구하고 압록강까지 국경을 넓힌 서희는 태보내사령이라는 높은 벼슬에 올라 백성들의 칭송을 받았습니다. 서희의 후손들도 크게 번창하여 서희와 이천 서씨의 이름을 널리 세상에 알리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실외에서 힘들었지요? 이제 실내 입니다.


서희 역사관 입니다.


저는 월요일날 와서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운영안내

오전 9시~오후 6시(매주 월요일, 법정공휴일 익일, 설, 추석 당일 휴관)


입장하지 못해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다음 코스로 갔습니다. 오르막길을 올라가니 오른쪽으로 추모관 입구가 보이네요....오늘은 월요일이라 운영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하며 문을 밀어 봤는데 열리네요. 솔직히 쉬는날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우리 할아버지셔서(지니쌤은 서희의 후손입니다.) 묵념이라도 하기 위해 들어가 보았습니다. 


추모관 입구,


안쪽에 들어가 보니, 역사관에서 추모관으로 통하는 엘르베이터가 있었습니다. 역사관을 들어갔다면 그 통로로 추모관으로 가실 수 있을겁니다.


추모관



거란을 물리친 서희~ 고려의 큰 별이 지기까지



21. 긴박한 국제 정세 속에 고뇌하는 서희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인 고려는 일찍부터 고구려의 옛 영화를 되찾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서경을 발판으로 북진 정책을 펼쳤습니다. 그러나 고구려의 옛 땅에서 일어난 거란이 강력한 군사력을 지닌 동아시아의 대국이 되면서 고려와 거란 두 나라는 서로 맞부딪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긴박한 국제 정세를 눈앞에 둔 서희의 고민도 깊어졌습니다.


22. 고려 조정에 감도는 구름


발해를 멸망시키고 연운 16주 마저 손에 넣은 거란은 중구 대륙의 패권을 둘러싼 송과의 결전을 앞두고 이 결전에 가장 큰 위협 세력인 고려를 먼저 굴복시키려 하였습니다. 거란은 발해의 유민들이 세운 정안국을 멸망시키고 압록강 일대에 성을 쌓는 등 고려와의 전쟁 준비에 들어갔습니다. 고려와 거란 사이에는 검은 구름이 감돌기 시작하였습니다.


23. 거란 80만 대군의 고려 침입


고려 성종12년(서기 993년) 8월 거란의 대군이 압복강을 건너 고려를 공격해 왔습니다. 먼저 봉산군을 점령하며 기세를 떨친 거란은 고려로 사신을 보내 항복하기를 강요하였습니다.


24. 분열된 고려 조정의 신하들


거란 대군의 침입 앞에 잔뜩 겁을 집어 먹은 고려 조정의 신하들은 적의 대군을 감당할 수 없으니 항복하고 후일을 도모하자는 항복론과, 거란의 요구대로 서경 이북의 땅을 떼어 일단 항복하고 후일을 도모하자는 할지론을 주장하는 두파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이에 성종은 할지론을 따르기로 하고 창고의 곡식들이 적에게 들어가지 못하도록 모두 대동강에 던져버리라는 영을 내렸습니다.


25. 구국을 위한 서희의 결단


이때 서희가 나서서 말 했습니다.
"식량이 충분해야 싸움에서 이길 수 있습니다. 하물며 식량은 백성의 생명과 마찬가지이므로 함부로 버려서는 안됩니다. 또 적에게 땅을 떼어 준다는 것은 자손만대의 수치이므로 적과 한번 싸워 본 후에 항복을 의논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서희는 나라를 구하기 위해 이제 자신이 나서야 할 때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신이 적진으로 가서 적장을 만나겠습니다."


26. 적장 소손녕과 역사적인 담판을 하다.


호랑이 굴과도 같은 적진 속으로 홀로 간 서희는 마침내 소손녕과 마주 앉았습니다.
소손녕은 "고구려의 옛 땅은 거란의 영토인데 고려가 서경 이북 고구려 땅을 차지하고 있으므로 이를 내어 놓아야 한다."라고 주장하였고,
이에 서희는 "우리 고려야말로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이기 때문에 이름까지 고려라고 하였다. 만약 땅을 논한다면 너희 나라 동경까지도 우리 고려의 땅이라고 해야 마땅하다." 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서희의 단호한 주장에 소손녕은 말문이 막혔습니다.


27. 개선하는 서희(조형물은 27번 이지만 앞 안내판은 28번 입니다.)


소손녕은 서희의 당당하고 논리정연한 언변에 탐복하여 회담을 끝내고 성대한 잔치를 열어 축하 하였으며, 낙타 10필, 말 100필, 양 1000마리, 비단 500필을 선물로 주었습니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적군을 물리쳐 나라를 구한 서희가 개선하자 성종을 비롯한 온 나라의 백성들이 뛸 듯 기뻐하며 반겼습니다.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28. 압록강까지 국경을 넓히다.(조형물은 28번 이지만 앞 안내판은 27번 입니다.)


서희는 쉴 틈도 없이 군사들을 이끌고 고려의 건국 이래 숙원이던 북방 개척에 나섰습니다. 청천강 이북의 땅을 차지하고 있던 여진족을 몰아내고 청천강에서 압록강에 이르는 280리 땅을 개척하여 여덟군데 성과 보루를 쌓았습니다. 이때부터 비로소 고려의 영토가 압록강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29. 개국사에서 요양하는 서희


쉴틈도 없이 군사들을 독려하며 북방 개척에 힘을 쏟던 서희가 그만 무리를 한 탓인지 병석에 눕고 말았습니다. 개경 근처에 있는 개국사에서 병을 치료하였는데 성종이 직접 서희를 찾아와 문병하였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성종은서희에게 어의를 내렸으며 개국사에는 곡식 1000석을시주하여 병이 속히 낫기를 빌었습니다.



30. 고려의 큰 별이 지다.


고려 목종 1년(서기 998년) 7월, 태보내사령 서희가 57세의 나이로 별세하였씁니다. 시호는 장위공이며 성종 묘정에 배향되었습니다.
나라를 사랑하는 지극한 마음, 현실을 바로 볼 줄 아는 지혜, 역사에 대한 소양과 식견,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로 거란의 대군을 몰리쳐서 나라를 구하고 압록강까지 국경을 넓힌 서희, 그는 우리 가슴속에 영원토록 빌날 겨레의 등불입니다.


 장위공 서희 연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