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니의 역사여행/소중한 우리유산

[세계유산 조선왕릉] 홍릉_고종황제와 명성황후

지니쌤 동진이 2019. 12. 7. 12:14

-홍릉-

고종태황제.명성황후 합장릉

   

 

홍릉은 조선26대 왕이자 대한제국의 1대 황제인 고종황제와 명성황후의 합장능이다. 명성황후가 을미사변으로 돌아가신 후 그 능을 동구능에 합장하려 하였지만 국내외의 복잡한 사정으로 제대로 조성하지 못하였다. 1897년 10월 대한제국의 황후로 높이고 같은 해 11월 능의 이름을 홍릉으로 새로 정하여 서울시 청량리에 모시게 되었다.

명성황후의 청량리 홍릉은 조성 직후부터 석물에 문제가 발생하였고, 1900년부터 풍수상의 문제로 능을 옮기자는 의견이 분분하였다. 이에 고종은 경기도 남양주 금곡 지역을 새 능역으로 정하여 황제국의 위성에 걸맞는 능제를 마련하고자 하였다. 이후 1901년에는 침전이 완성되었고 1904년까지 주요 석물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금곡 홍릉은 고종황제 생전에 완성하지 못하다가 1919년 고종황제의 승하 후 명성황후와 합장하면서 현재 황제릉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홍릉연혁

-1919년 명성황후의 홍릉을 현재의 자리로 옮기며 합장으로 조성

-위치: 경기 남양주시 홍유릉로 352-1
-능의 형식: 합장릉

-홍릉제향일: 고종태황제_1월 21일(양력)

                   명성황후_10월 8일(양력)




고종태황제

고종태황제(1852~1919, 재위1863~1907)는 조선의 26대 왕으로 즉위하였으며(1863년),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하시며 황제로 즉위하였습니다. 급변하는 세계 속에서 어린 나이에 왕이 된 고종을 대신해 신정익황후가 수렴청정을 하였고,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운현궁에서 국정을 운영하였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쇄국정책으로 문을 닫았고, 아버지로부터 벗어나 친정을 시작한 고종은 세계의 흐름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1976년 일본과 강화도조약(불평등조약, 최초근대조약)을 맺었고, 1882년에는 미국과 조미통상조약(서구와과 맺은 최초조약), 청나라와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 등을 맺으며 개항을 하였습니다.

 

청일전쟁(1894년) 이후 일제의 내정간섭이 심해졌고, 일제는 명성황후(1895년)를 시해하였습니다. 명성황후가 시해된 이후 고종은 아관파천을 단행하였습니다. 그리고 1년 후 대한제국을 선포하며 황제로 즉위하였으며(1897년) 연호를 광무라 하였습니다.

 

황제로 즉위하며 자주적인 국가로서 근대적인 국가를 이루기 위해 광무개혁(1899년)을 진행하였지만 밀려들어오는 제국주의의 힘에 당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1905년 덕수궁 중명전에서 을사늑약을 체결하며 외교권을 박탈당했고,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네덜란드 만국 평화회의에 특사(이상설, 이준, 이위종)를 파견하였습니다. 하지만 대한제국은 외교권이 없었기 때문에 참석할 수 없었고, 네덜란드 거리에서 캠페인 하며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렸습니다. 하지만 일제는 이를 빌리로 삼아 강제로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습니다.

 

그 후 덕수궁 함녕전에서 거하다 1919년 1월 21일 서거하였습니다. 고종황제의 갑작스런 죽음은 독살설로 퍼졌습니다. 1919년 3월 1일 고종황제의 인산일(장례일)에 3.1만세혁명이 일어났습니다.

참고: 덕수궁 중명전_을사늑약 체결현장, 헤이그특사파견

http://blog.daum.net/nasaro1/220  


명성황후

명성황후(1851~1895)는 민치록의 딸로 왕비가 되었습니다(고종3년). 흥선대원군이 국정운영에 손을 떼고 고종이 친정을 했을 때, 고종의 국정을 도왔습니다. 흥선대원군이 고종 즉위 후 세도가들을 밀어내고 개혁을 실행했는데, 다시 민씨의 세도가들이 권력의 중심부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첫째아들이 항문이 없이 태어나 며칠 살지 못하게 죽게 되었는데 흥선대원군이 준 약을 먹었기 때문이라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의학적인 지식이 없었기 때문에 생긴 오해였습니다. 그리고 명성황후의 오빠인 민승호 집에 배달된 폭탄으로 일가족이 모두 사망하는 사건이 있었는데 이 일도 흥선대원군이 벌린 것이라 생각을 한 것입니다. 결국 시아버지와 등지게 되었습니다. 이후 순종을 낳았지만 순종은 약하게 태어났습니다.

개항을 하는데 있어서 친청을 지지하였고,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패배한 것을 보고, 친러로 방향을 바꾸어 일제를 견제하려 했지만 1895년 일제에 의해 시해를 당했습니다. 대한제국 선포후 명성황후로 추대되었습니다.


참고: 경복궁 건청궁&명성황후 시해장소

http://blog.daum.net/nasaro1/17


홍릉 안으로...


연지와 금천교

능 입구에 조성한 연못이며, 연못을 지나면 금천교가 있습니다. 금천교는 속세를 구분 하는 다리입니다.


홍살문과 침전


홍살문은 신성한 지역임을 알려주는 밝은 기둥의 문 입니다. 홍살문 안쪽에 보이는 전각은 침전입니다. 현재 석물들 공사중입니다(2019년 12월).

보통 왕릉을 가면 홍살문을 지나 정자각이 있습니다. 하지만 고통태황제와 순종효황제의 릉은 침전이 있습니다. 그리고 왕릉에는 홍살문을 지나 정자각까지 가는 길에 좌우에 수라간과 수복간(능에서 부정한 일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지키는 곳)이 있을뿐 석물은 없습니다. 그러나 고종황제와 순종황제의 릉에는 홍살문을 지나 침전까지 가는 길에 석물이 있습니다.

이렇게 다른 이유는 고종과 순종의 릉은 황제릉의 격식에 맞추어 조성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자각이 아닌 침전이, 그리고 침전까지 가는 길에 석물들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침전 기준으로 안쪽에서 부터, 문석인, 무석인, 기린석, 코끼리석, 사자석, 해치석, 낙타석, 마석)


릉 외부에서는 봉분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홍살문 뒤로 침전(왕릉은 정자각)을 비롯해서 높이 조성되면서 외부에서는 잘 보이지 않게 조성한 것입니다. 시선에 들어오지 않으도록 신성하게 조성한 것입니다. 그러나 봉분쪽에서는 앞이 훤히 보이도록 설계가 되었습니다. 제향공간과 봉분쪽을 나누면서 계층적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향로

공사중이라 제대로 찍지 못했습니다. 서울 종묘를 비롯해서 왕릉을 가면 홍살문을 지나 향로가 있습니다. 궁궐을 가면 중앙에 왕도가 있고, 그 길은 왕만 걸을수 있지만, 릉에는 신로라 하며 가운데 높은 길은 향과 축문이 지나가는 길입니다. 그 길은 왕도 걸을 수 없으며 , 왕은 판위에서 인사를 드리고 왼쪽 낮은 길을 통해서 침전까지 걸어 갑니다.(축문: 제사 때에 읽어 신명(神明)께 고하는 글)


수복방

릉에서 부정한 일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관리하며 머무르는 곳


수라간

제례때 필요한 제수 음식을 준비하는 곳


재실

재실

능참봉이 상주하며 제기를 보관하거나 제례준비를 하는 전각


지당


홍릉 조성시 배수를 위해 침전 앞에 지당을 조성하고 강후 시에 빗물이 지당에 집수되러 연지로 배출되는 것으로 추정.



침전

제례를 올리는 주요 건물


침전 내부


비각

능 주인의 행적을 기록한 비석


홍릉 비각 내부


홍릉 비각 비문

대한 고종태황제릉 명성태황후부좌


홍릉봉분과 제정


침전과 비각 사이에 제정이 보입니다. 제정은 제례에 사용하는 우물입니다. 뒤로 봉분이 보이며 봉분 하나에 고종황제와 명성황후를 모셨습니다.

곡장이라 하며 봉분 주변을 둘러싼 담장이 있습니다. 망주석이라고 하는 촛불 모양?의 석물은 능역을 표시하는 돌기둥이며,봉분 앞에 있는 혼유석이 보입니다. 무덤 앞에 가면 흔히 제수상을 차리는 곳이 있는데, 제수상은 침전(왕을은 정자각)에 차려지고, 혼유석은 무덤 주인의 혼령이 노니는 곳입니다.

사진 속에는 잘 보이지 않지만 장명등이라는 석등이 있습니다. 석등은 어두운 사후게계를 밝혀 준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산신석

침전뒤에 산신석이 있습니다. 산신석은 릉을 지키는 산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입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조선왕릉


조선왕릉은 세계문화 및 자연 유산의 보호에 관한 협약에 따라 인류의 문화유산으로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인정 받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세계유산 조선 왕릉은 조선시대 왕과 왕비의 능(40기)으로 우리의 전통무화를 담은 독특한 건축양식과 아름다운 자연이 어우러진 신성한 동간이며 지금까지도 이 곳에서 제례가 이어져 오는 살아있는 문화유산입니다.

등재일 2009년 6월 30일



홍유릉 입구

입구로 들어가 오른쪽으로 유릉(순종황제, 순명황후, 순정황후)이며, 왼쪽으로 홍릉(고종황제, 명성황후)입니다.

 

홍릉 유릉 역사문화관


역사 문화관에서 홍릉과 유릉의 설명도 잘 되어져 있습니다.



 조선왕릉의 공간 구성



진입공간

진입공간은 재실에서부터~금천교(禁川橋)까지이다. (금천교: 건너가는 것을 금하는 다리) 금천교 건너편은 신성한 영역임을 상징하는 것이다. 진입공간에는 연지등이 조성된다.


제향공간

제향공안은 금천교~정자각까지이다.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가 만나는 곳이며, 정자각이 중심 전각이다. 홍살문, 판위, 향로, 어로, 수라간, 수복청, 비각, 정자각이 있다. 정자각에서 제례후 소전대에서 축문을 태우는데 후기에는 예감으로 바뀌었다. 정자각뒤 동쪽에는 산신석이 있는데 이곳에서는 산신령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고종황제(홍릉)와 순종황제(유릉)의 능에는 어로가 향로 좌우에 있으며, 어로와 향로쪽에 석수가 놓여져 있다. 이는 황제국의 양식에 따른 것으로 왕릉의 석수는 능침공간에 있으면서 왕릉을 지키는 역할을 한다면, 황제의 릉의 석수는 제향공간에 두면서 황제국의 권위와 과시용도로 놓인 것이다.


능침공간

능침공간은 정자각에서 봉분까지로 이곳은 다시 상계, 중계, 하계, 세곳으로 나누어진다.

상계는 초계라고도 하며 봉분이 있는 곳이다. 봉분에서부터 망주석이 있는 곳으로,봉분, 곡장, 병풍석, 난간석, 석호, 석양, 혼유석, 망주석이 있다.

중계는 문인석과 장명등이 있다. 문인석을 한단계 높인 것은 문치를 내세운 조선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하계는 무인석과 석마가 있다. 무인석이 한단계 내려와 있으나 영조(영릉)부터는 중계 하계의 구분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