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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유산 조선왕릉] 유릉_순종효황제, 순명효황후, 순정효황후

지니쌤 동진이 2019. 12. 7. 14:11

-유릉-

순종효황제,  순명효황후, 순정효황후


유릉은 대한제국2대 황제이신 순종과 순명효황후, 순정효황후를 모신 능으로 유일하게 세분을 하나의 봉분에 모시고 있다.

순종황제는 1910년 대한제국이 일제에 강제로 병합되면서 황제의 자리에게 물러났고 1926년 창덕궁에서 승하하였다.

순종의 첫 번째 황후인 순명효황후는 1904년 돌아가셨으며, 서울 광진구 지역에 유강원으로 조성되었다가 19907년 순종황제 즉위후 경기도 남양주에 유릉으로 새롭게 조성하였다.

순정효황후는 1906년 황태자비로 책봉되었으며, 일제강점기와 전쟁 등의 겪다가 1966년 창덕궁 낙선제에서 돌아가셨고 유릉에 합장되었다.


순종효황제

순종효황제(1874~1910, 재위1907~1910)는 고종태황제와 명성황후의 아들로 1907년 황제에 즉위하였습니다. 당시 고종황제가 강제로 물러나고, 즉위를 한 것이기 때문에 즉위식에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즉, 주인공이 빠진 즉위식이 된 것이었습니다. 순종은 연호를 융희라 하였습니다. 하지만 순종의 즉위는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1910년 창덕궁 흥복전에서 마지막 어전회의가 있었으며 강제로 일제와 병합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경술국치). 일제는 대한제국을 다시 조선으로 바꾸었으며, 황제를 왕으로 강등하였습니다. 1926년 4월 25일 심장마비로 서거하였으며, 6월 10일 순종황제의 인산일에 6.10 만세운동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순명효황후

순명황후(1894~1904)는 민태호의 딸로 세자빈이 되었습니다(1882년, 고종19년). 그러나 세자빈일 때 세상을 떠났으며, 순종이 황제가 된 후 순명황후로 추대 되었습니다.

 

순정효황후

순정황후(1894~1966)는 윤영택의 딸로 1907년(광무10년) 황태자비가 되었으며, 화후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경술국치 때 창덕궁 흥복전 병풍뒤에서 옥쇄를 치마속에 감추며 한일병합을 막으려 하였지만 옥쇄를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노년에는 창덕궁 석복헌에서 지내다 1966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참고: 창덕궁 대조전 흥복헌_마지막 어전회의가 있던 곳

http://blog.daum.net/nasaro1/230


참고: 창덕궁 낙선재 석복헌_경빈의 처소였으며, 순정효황후가 지낸곳.

http://blog.daum.net/nasaro1/232


유릉연혁

-1926년 순명황후의 유릉을 현재의 자리로 옮기며 순종황제와 합장릉으로 조성.

-1966년 순정황후 합장

-위치: 경기 남양주시 홍유릉로 352-1
-능의 형식: 합장릉

-유릉 제향일: 4월 25일(양력)


유릉

유릉은 대한제국2대 황제이신 순종과 순명효황후, 순정효황후를 모신 능으로 유일하게 세분을 하나의 봉분에 모시고 있습니다.


어정

유릉에는 두개의 어정이 남아 있습니다. 어정은 제례때 사용하는 우물입니다. 이 어정은 금천교를 지나기 전 어정이며, 금천교를 지나 또 하나의 어정이 있습니다. 사진 속 왼쪽 나무 사이로 작은 담이 보이는데 그곳이 또 다른 어정입니다.


어정


유릉 재실

이 전각은 순종황제, 숭명황후민씨, 순정황후윤씨의 제향을 준비하는 곳입니다.
재실은 왕릉을 지키고 관리하던 능참봉이 거주하며 제향을 준비하는 곳입니다.
능참봉의 집무실인 재실, 향과 축문을 보관하던 안향청, 제기를 보관하는 제기고가 있습니다.


상설도 해설

1. 재실: 제사를 준비하고 황릉을 관리하던 영과 참봉등이 쓰던 전각.(대문을 들어가면 정면으로 있습니다.)
2. 제기고: 제기를 보관하는 전각.(대문을 들어가면 왼쪽으로 있습니다.)
3. 행량: 대문, 하인방, 마구간, 창고, 집사방 등이 있던 건물(대분쪽에 붙여 있습니다.)


재실


홍살문

홍살문은 신성한 지역임을 알려주는 밝은 기둥의 문 입니다. 홍살문 안쪽에 보이는 전각은 침전입니다.

보통 왕릉을 가면 홍살문을 지나 정자각이 있습니다. 하지만 고통태황제와 순종효황제의 릉은 침전이 있습니다. 그리고 왕릉에는 홍살문을 지나 정자각까지 가는 길에 좌우에 수라간과 수복간(능에서 부정한 일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지키는 곳)이 있을뿐 석물은 없습니다. 그러나 고종황제와 순종황제의 릉에는 홍살문을 지나 침전까지 가는 길에 석물이 있습니다.

이렇게 다른 이유는 고종과 순종의 릉은 황제릉의 격식에 맞추어 조성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자각이 아닌 침전이, 그리고 침전까지 가는 길에 석물들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침전 기준으로 안쪽에서 부터, 문석인, 무석인, 기린석, 코끼리석, 사자석, 해치석, 낙타석, 마석)


판위

왕은 판위에서 인사를 드리고 왼쪽 낮은 길을 통해서 침전까지 걸어 갑니다.


수복방

릉에서 부정한 일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관리하며 머무르는 곳


침전과 향로

침전은 제례를 올리는 주요 건물입니다.

향로는 향과 축문이 지나가는 길로 서울 종묘를 비롯해서 왕릉을 가면 홍살문을 지나 신도가 있습니다.

궁궐을 가면 중앙에 왕도가 있고, 양옆으로 문무관이 걸을수 있는 길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 릉에서 가운데 높은 길은 향과 축문이 지나가는 길입니다. 왕은 그 옆의 낮은 곳으로 걸어가며 길을 따라 침전 오른쪽 계단으로 올라갑니다. 


유릉 침전 내부


비각

능 주인의 행적을 기록한 비석


유릉 비각 내부


유릉 비각 비문

대한순종효황제유릉 순명효황후부좌 순명효황후부우


산신석

침전뒤에 산신석이 있습니다. 산신석은 릉을 지키는 산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입니다.


봉분과 석물 그리고 망료위

봉분이 보입니다. 봉분뒤로 담장은 곡장이라 합니다. 봉분 주변을 둘러싼 담장이 있습니다. 망주석이라고 하는 촛불 모양?의 석물은 능역을 표시하는 돌기둥이며,봉분 앞에 있는 혼유석이 보입니다. 무덤 앞에 가면 흔히 제수상을 차리는 곳이 있는데, 제수상은 침전(왕을은 정자각)에 차려지고, 혼유석은 무덤 주인의 혼령이 노니는 곳입니다.

사진 속에는 잘 보이지 않지만 장명등이라는 석등이 있습니다. 석등은 어두운 사후게계를 밝혀 준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침전 옆으로 작은 굴뚝과 같은 것이 보이는데 굴뚝이 아니라 망료위 이며 축문을 태우는 곳입니다.(축문: 제사 때에 읽어 신명(神明)께 고하는 글)


유릉 배치도


유네스코 세계유산 조선왕릉


조선왕릉은 세계문화 및 자연 유산의 보호에 관한 협약에 따라 인류의 문화유산으로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인정 받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세계유산 조선 왕릉은 조선시대 왕과 왕비의 능(40기)으로 우리의 전통무화를 담은 독특한 건축양식과 아름다운 자연이 어우러진 신성한 동간이며 지금까지도 이 곳에서 제례가 이어져 오는 살아있는 문화유산입니다.

(등재일 2009년 6월 30일)


홍유릉 입구

입구로 들어가 오른쪽으로 유릉(순종황제, 순명황후, 순정황후)이며, 왼쪽으로 홍릉(고종황제, 명성황후)입니다.


홍릉 유릉 역사문화관

역사 문화관에서 홍릉과 유릉의 설명도 잘 되어져 있습니다.



 조선왕릉의 공간 구성



진입공간

진입공간은 재실에서부터~금천교(禁川橋)까지이다. (금천교: 건너가는 것을 금하는 다리) 금천교 건너편은 신성한 영역임을 상징하는 것이다. 진입공간에는 연지등이 조성된다.


제향공간

제향공안은 금천교~정자각까지이다.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가 만나는 곳이며, 정자각이 중심 전각이다. 홍살문, 판위, 향로, 어로, 수라간, 수복청, 비각, 정자각이 있다. 정자각에서 제례후 소전대에서 축문을 태우는데 후기에는 예감으로 바뀌었다. 정자각뒤 동쪽에는 산신석이 있는데 이곳에서는 산신령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고종황제(홍릉)와 순종황제(유릉)의 능에는 어로가 향로 좌우에 있으며, 어로와 향로쪽에 석수가 놓여져 있다. 이는 황제국의 양식에 따른 것으로 왕릉의 석수는 능침공간에 있으면서 왕릉을 지키는 역할을 한다면, 황제의 릉의 석수는 제향공간에 두면서 황제국의 권위와 과시용도로 놓인 것이다.


능침공간

능침공간은 정자각에서 봉분까지로 이곳은 다시 상계, 중계, 하계, 세곳으로 나누어진다.

상계는 초계라고도 하며 봉분이 있는 곳이다. 봉분에서부터 망주석이 있는 곳으로,봉분, 곡장, 병풍석, 난간석, 석호, 석양, 혼유석, 망주석이 있다.

중계는 문인석과 장명등이 있다. 문인석을 한단계 높인 것은 문치를 내세운 조선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하계는 무인석과 석마가 있다. 무인석이 한단계 내려와 있으나 영조(영릉)부터는 중계 하계의 구분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