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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황실] 영원, 회인원, 덕혜옹주, 의친왕묘

지니쌤 동진이 2019. 12. 7. 16:42

영원, 회인원, 덕혜옹주묘, 의친왕묘


조선의 26대 왕이자 대한제국의 1대 황제였던 고종태황제의 홍릉 비각옆으로 문이 하나 있습니다. 그 문을 나가면 조용한 시골동네의 산책로가 있습니다. 그 길을 따라 올라가면 영원, 화인원, 덕혜옹주묘, 의친왕묘가 있습니다.


- 위치: 경기 남양주시 홍유릉로 352-1


陵(능)은 왕과 왕비의 무덤이며, 園(원)은 왕세자,왕세자빈, 왕의 사친의 무덤입니다. 그리고 그외의 왕족은 墓(묘) 라고 부릅니다.


영원英園(영친왕_의민황태자와 영친왕비_황태자비)


산책로를 따라 올라가면 첫번째로 영원英園(의민황태자와 황태자비)이 보입니다. 영친왕 의민황태자(1979~1970)는 고종태황제(1852~1919)와 순헌황귀비엄씨(1854~1911)의 아들입니다. 1900년 영친왕으로 책봉되었고 1907년 황태자로 책봉되었으나 일제에 의해서 강제로 유학길에 떠났으며, 1920년 일본 왕족 나시모토 노미아 마사코(이방자 여자)와 정략혼인을 하였습니다. 슬하에 두 아들 이진과 이구를 낫았으나 이진은 1922년 덕수궁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순종승하후 일제강점기였기 때문에 황제가 되지 못했으며 명목상 이왕이 되었고, 일본 육군사관학교의 교수부장. 육군 중장으로 근무하였습니다. 1945년 해방을 맞이해 귀국을 원했으나 무산되었고, 1963년 대한민국 국적을 회복해 귀국하게되었습니다. 그러나 병세가 악화되어 병상생황을 하다 1970년 5월 1일 창덕궁 낙선재에서 73세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황태자비 이방자 여사는 1963년 영친왕과 함께 대한민국 국적을 회복했습니다. 귀국 후 사회봉사 사업에 힘써 신체 장애자 재활협회 부회장을 역임하면서 사회복지법인 명휘원을 설립하였습니다.

열악했던 장애인의 복지와 자립을 위한 삶을 살다가 1989년 4월 30일 세상을 떠나 영원에 합장되었습니다.


영원은 조선왕릉의 형식으로 조성되었지만 수라간과 수복방은 없으며, 봉분은 병풍석없이 난간석만 설치되어 있습니다.



재실

재향을 준비하고 왕릉을 관리하면 영과 참봉이 사용을 하던 공간입니다.



홍살문과 정자각

홍살문은 신성한 지역임을 알려주는 밝은 기둥의 문 입니다. 홍살문 안쪽에 보이는 전각은 정자각 입니다. 위에서 보면 고무래정(丁)자 모양으로 생겼다 하며 붙여진 이름입니다. 정자각에서는 제례가 열리는 곳입니다.



신도와 판위

가운데 길은 향로이며, 축문과 향이 지나는 길입니다. 제례를 지내는 사람은 오른쪽 낮은 길을 이용합니다. 왕 역시 신도를 통해서 들어갈 수 없습니다. 판위는 오른쪽에 있는 돌판입니다. 왕이 제례전 인사를 하는 자리입니다. 


정자각 내부


비각

능 주인의 행적을 기록한 비석


영원비문
대한 의민황태자영원 의민황태자비부좌


정자각 뒤로 봉분이 있는데 옆으로 올라가는 길이 있습니다.

봉분앞 석물

중앙의 석등은 어두운 사후게계를 밝혀 준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봉분 앞 석물


봉분에는 병풍석은 없으며 난간석만 설치되어 있습니다.

봉분앞의 돌로된 상은 제례상이 아니라 혼유석입니다. 제례상은 정자각에 차례지며 혼유석은 묘의 주인이 노니는 곳입니다. 사진 속 석인 등쪽으로 보이는 촛불 모양?의 석물은 능역 망주석이라 하며 원(園)역을 표시하는 돌기둥입니다.


영원 옆으로 화인원이 있습니다. 화인원은 의민황태자와 의민황태자비의 아들 이구의 원(園)입니다. 광복후 귀국이 무산되어 일본에 거주하다 1953년 미국으로 유학을 갔으며, 귀국후 창덕궁 낙선재에서 거주하다 2005년 7월 16일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구 황세손의 원()


영원으로 덕혜옹주묘와 의친왕묘로 가는 길에 조선왕조 왕릉의 소개가 되어 있는 게시물이 있습니다. 그 게시물 끝에는 덕혜옹주와 의친왕에 대한 안내문도 볼 수 있을 겁니다. 그 안내문에 나오는 덕혜옹주의 일대기를 간략하게 적어 보겠습니다.


덕혜옹주


유년시절

덕혜옹주는(1912~1989)는 고종황제와 귀인 양씨의 딸로 덕수궁에서 태어났습니다. 덕혜옹주를 낳은 귀인양씨는 복녕이라는 당호를 얻었으며 종1품 귀인의 봉해저, 이후 복녕당 귀인 양싸로 불려졌습니다. 고종황제는 9남 5녀가 있었으나 대부분 어린시절 먼저 세상을 떠났으며 3남 1녀만이 어른으로 성장했습니다. 덕혜옹주는 고종황제가 한갑에 낳았고, 생존해 있는 유일한 딸로서 지극한 사랑을 받았습니다. 고종은 태어난지 2개월된 옹주를 자신의 처소인 함녕전으로 옮기게 했는데, 아무리 왕이라 해도 왕과 자녀가 같은 처소에 지낼 수 없었는데 이는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덕혜옹주가 5살이 되던 해 덕수궁 준명당에 유치원을 설립해 주었습니다.
일제의 조선총독부는 황실자손수를 늘리지 않으려 했기 때문에 6살이 되어서야 고종의 자녀임을 인정받았고, 10살이 될 때 까지 이름 없이 "복녕당 아기" "집회전 아기씨"등으로 불리다 학교애 들어갈 나이가 되자 1921년 5월 4일 덕혜라는 호를 받았습니다.
덕혜옹주는 1919년 고종황제가 승하하자 귀인양씨와 함께 창덕궁으로 처소를 옮겼습니다.


덕혜옹주 백일사진


 덕혜옹주 돌기념 사진


  

덕혜옹주 유치원 입학


영친왕 일시귀국 기념 대한제국 황실가족 사진


덕혜옹주 송별회


덕혜옹주의 강제 유학

일제강점기 대한제국의 황손들은 정책적으로 일본 유학이 추진되었습니다. 덕혜옹주는 일출심상소학교 5학년때인 1925년 일본으로 갔습니다. 3월 27일 덕혜옹주는 이왕직 장관 한창소, 이왕비전하부촉탁 스미나가 하데코, 그리고 나인 2명과 함께 일본으로 떠났습니다. 일본 도착후에는 영친왕 부부처소에 머물렀습니다. 1925년 4월 학습원 여자중등과에 힙학하였습니다. 그 학교는 황족이나 귀족 자녀들을 위해서 지어진 학교였습니다. 일본으로 떠난지 1년만인 1926년 순종황제가 승하하였으며 이때문에 덕혜옹주는 밤낮으로 눈물을 흘리며 침식도 잊을 때가 많았다고 합니다. 설상가상으로 1929년 5월 30일에는 어머니 양귀인 마저 돌아가셨습니다.
덕혜옹주는 일제가 규정한 왕공가궤범에 따라 상복도 입지 못하고 장례를 치러야 했으며, 이후 도쿄로 돌아간 덕혜옹주는 신경쇠약 등세를 보이기 시작했고 병ㅊ세는 날로 나빠져 조발성 치매 진단을 받기에 이르렀습니다.


덕혜옹주 경성에서 일본으로 유학길




덕혜옹주의 결혼과 생활

한일강제 병합후 대한제국의 황실을 왕공족으로서 일본의 황실에 포함시킨 일제는 영친왕에 이어 덕혜옹주 역시 일본인과의 혼인을 추진했습니다. 덕혜옹주의 배우자는 쓰시마도주의 후예인 백작 소 다케유키(1908~1985)가 선택되었습니다. 1931년 5월 8일 결혼식을 하였고, 부부는 도쿄에서 결혼생활을 하였습니다. 정략결혼이었으나 초반에는 순탄한 생활을 하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지만 결혼 이듬에 딸 마사에가 태어난 후부터 덕혜옹주의 정신질환이 악화되면서 결혼생활은 위기를 마재 되었습니다. 게다가 1945년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 후 왕공족 제도의 폐지로 소 다케유키는 백작 지위를 잃고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다케유키는 덕혜옹주를 정신병원에 입원시켰으며 1955년 일방적으로 이혼을 선언하였고, 이듬해 딸 마사에는 자살을 암시하는 편지를 남기고 실종되었습니다.


결혼식



딸 마사에


조선으로 돌아온 덕혜옹주

덕혜옹주를 찾아 환국을 추진한 사람은 언론인 김을한(1906~1922)으로 서울신문 도쿄 특파원으로 지내고 있을 때였습니다. 당시 영친왕 부부와도 가깝게 지내다 덕햬옹주 소식을 알게되어 환국을 추진했습니다. 그러나 정치적인 이유로 대한제국 황손들의 귀국을 반대한 이승만에게 거절당했습니다. 이후에도 김을한의 노력은 계속되었고 박정희시절 환국이 승인되어 1962년 1월 26일 51세의 나이로 조국을 떠난지 38년만에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정신질환이 더욱 악화되었으며 조국으로 돌아온 거 조차 깨닫지 못하는 모습이었습니다. 덕혜옹주는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부속병원에 입원하며 요양하였으며, 1967년 퇴원하여 창덕궁 낙선재에서 영친왕비 이방자 여사 등과 함께 지냈습니다. 그후 1989년 4월 21일 78세의 나이로 수강제에서 영면하였습니다.


참고: 창덕궁 수강재

http://blog.daum.net/nasaro1/232


덕혜옹주 묘

덕혜옹주 묘와 의친왕 묘는 동절기 관람 중지입니다. 덕혜옹주 묘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사진으로 남길 수 있었지만 의친왕 묘는 사진으로도 남기지 못했습니다.


동절기 관람 중지


의친왕묘, 의친왕비


의친왕(1877~1955)은 고종과 귀인장씨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1892년 의화군으로 1909년 의친왕으로 봉해졌으며 1893년 의친왕비(김사준의 딸)와 결혼하였습니다. 의친왕 비는 자녀가 없습니다. 수관당 정씨와 수인당 김씨 등 여러 후실이 있으며 이들로 부터 12남 9녀를 두었습니다. 


1905년 미국 유학을마치고 귀국하여 대한제국 육국부장 대한적십자사 총재등을 역임하였으며 1919년 대동단의 전협, 최익환 등과 상해 임시정부로의 탈출을 모의해으나 만주 안동에서 발각되어 강제로  송환되었습니다. 의친왕은 끝까지 도일을 거부하였으며 조국 광복을 위해 비밀리에 독립운동에 지원을 하였습니다.


광복 후 안국동 사동궁에서 1955년 8월 16일 79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초장지는 화양리이며 서삼릉에 옮겨져 가묘 형태로 있다가 1996년 덕혜옹주묘 근처로 이장되면서 의친왕비와 합장으로 안장되었습니다.


의친왕비(1878~1964)는 종로구 궁정도 칠궁에서 87세에 세상을 떠났으며 홍유릉 후궁묘역에 안장되었다가 1996년 의친왕과 합장되었습니다.



제향일

영원: 5월 10일

회인원: 7월 16일

덕혜옹주: 4월 2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