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수업/초등학교 6학년 1학기 사회

[초등학교6학년 1학기 사회] 1. 조선사회의 움직임_1)전란의 극복_첫번째

지니쌤 동진이 2017. 3. 28. 00:22

[초등학교 6학년 1학기 사회]

1. 조선사회의 새로운 움직임

   1) 전란의 극복

   2)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인 조선

   3) 서민 문화의 발달

   4) 조선 시대 여성의 삶

   5) 조선을 뒤덮은 농민의 함성






1592년 임진왜란

1608년 경기도에서 처음 대동법을 실시함

1636년 병자호란

1696년 안용복, 울등도와 독도에서 일본인을 쫓아냄

1776년 규장각 설치

1796년 수원 화성 완공

1811년 홍경래의 난

1860년 동학 창시

1861년 대동여지도 간행

1862년 임술농민봉기


조선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나타난 문제점을 해결하려고 여러가지 노력을 하였다. 조정은 대동법을 시행하여 백성의 세금 부담을 줄이고자 하였으며, 백성은 새로운 농작물과 농사 기술을 이용하여 생산량을 늘리기에 힘썼다. 그리고 조선은 새로운 문물과 서학을 받아들였다. 이러한 변화는 조선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교과서 8쪽>


<학습내용>

1.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조선에 미친 영향을 알아 봅시다.

2. 새로운 문물의 수용에 따른 변화를 알아봅시다.

3. 조선 후기에 발달한 서민 문화를 알아 봅시다.

4. 조선 시대 여성의 삶을 알아 봅시다.

5. 농민 봉기의 배경과 과정을 알아봅시다.

                                                                         <교과서 9쪽>


<지니쌤의 교과서 해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조선은 임진왜란(1592년, 정유재란, 1597년)과 병자호란(1636년, 정묘호란 1622년>이라는 두 번의 전쟁을 하였습니다. 먼저 이 두 전쟁에 해서 잠시 살려 봅시다.


임진왜란

임진왜란은 선조(14대)때 7년동안 있었던 전쟁입니다. 1592년 4월 13일 일본군은 20만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 왔습니다. 4월 14일 부산진 첨사 정발진은 고니시 유키나의 공격을 막다가 전사하였습니다. 그리고 15일에는 동래부사 송상현이 동래성을 사수하다가 전사하는등 일본의 공격을 막지 못했습니다.


             <이시눌_임진전란도_부산진과 다대포전투를 그리고 있다.>

    <부산진 순절도: 사회과부도 98쪽 4월 13일과 14일 이틀동안 부산진에서 벌어진 전투>


선조는 일본이 공격을 해 오자 의주까지 도망을 갔지만 이순신, 평양의 유성룡, 행주산성의 권율, 의병장 곽재우 등이 일본을 막아냈습니다. 논개가 적장을 껴안고 투신을 하기도 하면서 일본을 막아냈습니다.


<의병과 관군의 활약 사회과부도98쪽>


우리들에게 잘 알려진 이순신 장군은 노량해전에서 전사하였으며 전쟁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죽으면서 전쟁은 끝이 났습니다.


임진왜란 해전도<사회과부도98쪽>


전쟁때 모든 궁궐은 불에 타고 그 피해는 엄청났습니다. 7년이라는 전쟁으로 백성들의 삶은 더욱더 어려워졌습니다.

의주까지 도망을 갔던 선조는 월산대군의 집(현, 덕수궁)에서 지냈습니다. 월산대군의 집은 정동행궁(행궁: 행궁이란 임금이 임시로 거처하는 곳)으로 불려졌습니다.

선조에 이어 광해군이 왕이 되었습니다. 불에탄 창덕궁과 창경궁을 재건하였으며 경희궁을 창건하였습니다. 그리고 창덕궁을 거쳐를 옮겼습니다.


광해군은 어려워진 백성들을 위해서 대동법을 실시하였습니다. 그리고 강대국으로 성장하고 있는 후금과 교류를 해야한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광해군은 명나라와 후금 가운데서 외교를 잘 해서 전쟁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광해군의 측근들은 이복동생인 영창대군을 강화로 유배를 보낸 후 죽였으며, 영창대군의 어머니인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재남을 역모로 누명을 씌어 죽이고, 인목대비를 정릉 행궁에 유폐시켰습니다.

<덕수궁 석어당>


조정은 후금이 아닌 명나라와 교류를 해야한다고 주장을 하며 광해군을 비판했습니다. 당시 조정의 신료들은 대동법을 실시하는 등 청나라와 손을 잡자고 하는 광해군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영창대군을 죽이고 과 인목대비를 유폐시켰다는 이유를 들어 인조를 앞세워 광해군을 폐위 시켰습니다.(인조반정: 1624년 4월 11일)


정묘호란

왕이된 인조는 후금을 멀리하고 명나라와 친하게 지내고자했습니다. 이것이 "친명배금"정책입니다.그러자 후금은 조선을 공격하였는데 그것이 정묘호란(1627년)입니다. 조선은 후금과 형제관계를 맺으며 전쟁을 마무리 했습니다. 얼마후 후금은 청나라로 이름을 바꾸고 군신(왕과 신하) 관계를 요구 했습니다. 조선은 거부하였으며, 청나라는 조선을 다시 공격하였습니다(병자호란 1636년).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사회과부도99쪽>

정묘호란때 인조는 강화도로 도망을 가다려했지만 그 길목을 청나라가 군사들이 이미 막고 있었기 때문에 길을 돌려 남한 산성으로 피했습니다.
그러나 청나라의 공격을 막지 못하고 항복선언을 하고 삼전도에서 "삼배구고두레(세번 절하고 아홉번 고개를 조아리는것)"를 행하는 치욕을 당했습니다.


<삼전도비>


청 태종 홍타이지에게 용서를 구했으며, 소현세자와 봉림대군(효종)과 더불어 3정승6판서의 자녀 20여명은 인질로 끌려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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