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수업/초등학교 6학년 1학기 사회

[초등학교6학년 1학기 사회] 1. 조선사회의 움직임_2)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인 조선_첫번째

지니쌤 동진이 2017. 4. 3. 23:38


[초등학교 6학년 1학기 사회]


1. 조선사회의 새로운 움직임

   1) 전란의 극복

   2)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인 조선

   3) 서민 문화의 발달

   4) 조선 시대 여성의 삶

   5) 조선을 뒤덮은 농민의 함성


학습내용: 새로운 문물의 수용에 따른 변화를 알아봅시다.


조선에서는 전란을 극복하고 새로운 사회로 발돋움하기 위한 움직임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주변 나라들과 다시 활발하게 교류하기 시작한 조선은 청에 매년 연행사를 보냈고 교류를 요청한 일본에는 통신사를 보내어 그들의 문화에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교류를 통하여 조선은 어떻게 변화하였을까?(16쪽)


연행사 <교과서 16쪽>: 조선 후기 청의 수도인 연경에 보낸 사신


실학의 등장과 배경과 수원 화성의 가치를 알아 봅시다.(17쪽)

실학자들은 정치, 경제, 문화, 종교 등 사회의 모든 부분의 제도를 개선하여 전란을 극복하고자 하였습니다. 전쟁으로 인해 백성들의 삶을 해결해주는데 힘을 썼습니다. 실학자들은 서구의 과학등 발달된 문물을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백성들을 가르치려고 하였습니다.


실학자들의 주장


실학들은 농업 중심의 개혁론, 상공업중심의 개혁론, 국학연구자들로 나눌 수 있습니다.

농업중심의 개혁의 선구자는 유형원이었는데, 그는 농촌에서 살면서 [반계수록]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는 신분에 따라서 땅을 골구로 나누어 주어야 한다는 "균전론"을 주장하였습니다.

정약용 역시 농업중심의 개혁에 앞장섰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여전론"을 주장하였다. 여전론은 공동으로 농사를 짓고 일을 한 만큼 나누어 갖는것을 말 한다. 그는 여전론을 주장하다가 토지를 골구로 나누어 주자는 정전제를 주장하기도 했다. 그리고 [목민심서]라는 책을 통해서 관리는 백성을 위해서 바른 정치를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상공업 중심의 개핵론자들을 대게 북학파라고 부릅니다. 그 이유는 청의 그 누구보다도 청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유수원은 [우서]를 썼는데 이 책에서 청나라와 우리나라의 문물을 비교하면서 개혁하고자 했습니다. 박지원은 [열하일기]에서 상공업을 발달시켜야 한다고 했습니다. 박제가는 [북학의]라는 책을 썼는데 청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할 것을 주장했습니다.(교과서 25쪽 참고)

열하일기: 청에간 박지원은 새로운 문물을 보고 "열하일기"에 정리하여 조선에 소개하였다. 그는 이 책에서 수레, 선박의 이용과 화폐 사용의 필요성을 주장하였다.

북학의: 사신으로 청을 방문한 박제가는 새로운 문물을 구경하고 청의 학자들과 교류하였다. 박제가는 청에서 조선이 받아들여야 할 내용을 모아 "북학의"를 엮었다. 그는 이 책에서 수레, 벽돌, 수차 등을 도입하고 다른 나라와 적극적으로 무역을 하여 조선을 부강한 나라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것을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대표적으로 이익은 중국중심의 역사관을 비판하면서 우리 민족에 대한 인식을 높여야 한다고 했습니다. 유희는 [언문지]를 통해서 잘못된 한자음을 올바르게 표현하려고 했으며 한글의 우수성을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정약용의 형 정약전은 유배지에서 흑산도 주변의 우리 생물을 연구하여 [자산어보]를 썼습니다.

김정호는 [대동여지도]라는 지도를 그렸는데, 이 지도는 10리(약4km)마다 눈금을 표시하였으며, 산맥, 차헌, 포구, 도로망을 자세하게 그려넣었습니다. 유득공은 [발해고]라는 역사책을 썼는데 이 책에서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 나라임을 밝혔습니다. (교과서21쪽 참고)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22권의 책을 펼쳐 이어 붙이면 가로 약 3미터 세로 약 7미터의 우리나라 전체 지도가 된다.

특히 정약용은 실학자 중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사람입니다.

정약용은 오랜 유배 생활중에도 연구를 계속 했습니다. 토지제도를 바꾸고 인재를 고르게 활용해야 한다는 [경세유포]를 썼습니다.

그는 목민심서를 통해서 관리들이 바르게 정치를 해야한다고 가르쳤습니다.

뿐만아니라 정약용은 과학과 건축에도 관심이 많았습니다. 특히 거중기를 만들어 수원화성을 쌓는데 인력과 비용을 절약하였습니다.


영조와 정조에 대해서 잠시 살펴 봅시다.

영조는 조선의 21대왕이고, 정조는 조선 22대왕 입니다. 영조와 정조는 탕평책을 실시하면서 왕권을 강화하고 인재를 골고루 등용하려고 했습니다.

당시 조선은 노론과 남인으로 나누어져서 서로 싸웠습니다. 의견이 달라서 당파가 나누어지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나라에도 여러 정당이 있습니다. 문제는 정치를 하는데 백성들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고 자신들의 이익만을 위해서 서로를 비난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기억하나요? 정약용은 이런 배경 속에서 "수령이 백성을 위해 있는 것이지, 백성이 수령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내용의 [목민심서]를 쓴 것입니다. 

서로 이렇게 싸우자 영조는 사람들을 모아 놓고 탕평채라는 음식을 대접하였습니다. 탕평채는 김, 미나리, 쇠고기 등 여러 음식들을 버무린 것인데, 여러 음식들이 버물어져 맛있는 음식이 되듯이 싸우지말고  화해를 하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론은 영조의 아들 사도세자를 죽게 했습니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며 영조의 손자였습니다. 

정조는 자신을 도울 수 있는 인재를 등용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신진 관료 중 유능한 사람들을 뽑아 규장각에서 학문을 연구하도록 하였습니다. (세종대왕이 집현전에서 학문을 연구하게 했던 것과 비슷한 것입니다.) 또 백성들의 생활 수준을 향상시키기 위하여 규장각 연구원들과 함께 의논하였습니다. 규장각은 정약용 등의 유능한 인재를 배출했습니다.

인재를 등용하는데 서얼을 차별하면 안된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서얼이란 서자와 얼자를 말 하는 건데, 첩의 아들을 서자라고 했으며, 양반이 노비를 통해서 낳은 자녀를 얼자라고 하였습니다. 이들은 아버지가 양반이었지만 과거시험을 볼 수 없었는데, 이들도 관직에 진출할 수 있도록 합니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아들로 살해위협을 많이 받았습니다. 정조는 자신을 호위하는 군대인 장용영을 조직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으로 옮겼으며 그곳에 수원 화성을 지어 정치적 군사적인 기능을 부여했습니다. 규장각에서 연구를 하던 정약용은 거중기를 만들었으며 이로 인해서 성을 짓는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수원 화성을 계획적으로 건설하고 군사와 상업의 새로운 중심지로 만들어 왕권을 강화하려 하였습니다. 수원 화성은 동서양의 건축 기술을 활용하여 과학적으로 건설되었습니다.(1796년 수원화성완공)(교과서19쪽)


수원화성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습니다.


수원 팔달문: 수원 화성의 남쪽 문으로 반원 모양의 옹성을 설치하여 적군을 사방에서 물리칠 수 있도록 하였다.(19쪽)

수원 서북공심돈: 성벽의 일부를 튀어나오게 만들고 별돌로 3층의 망루를 세워 군사들이 화포로 방어할 수 있도록 하였다.(19쪽)

수원 방화수류정: 주변을 감시하는 전망대로 병사들이 항상 머물렀기 때문에 이곳에는 온돌을 설치하였다.(20쪽)

수원 화홍문: 수원 화성을 통과해 흐르는 수원천의 북쪽 수문으로 하천이 범람하지 않도록 물길을 조정하는 구실을 하였다.(20쪽)



[화성성역의궤]는 수원 화성을 짓는 과정과 설계도등을 기록한 일종의 공사 보고서이다. 수원 화성은 일제 강정기와 6.25 전쟁을 거치면서 크게 훼손되었으나 화성성역의궤를 참고하여 복원되었다. 화성성역의궤를 포함하여 많은 양의 조선왕조 의궤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사회교과서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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