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수업/초등학교 6학년 1학기 사회

[초등학교6학년 1학기 사회] 1. 조선사회의 움직임_1)전란의 극복_두번째

지니쌤 동진이 2017. 3. 31. 17:41


[초등학교 6학년 1학기 사회]

1. 조선사회의 새로운 움직임

   1) 전란의 극복

   2)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인 조선

   3) 서민 문화의 발달

   4) 조선 시대 여성의 삶

   5) 조선을 뒤덮은 농민의 함성


두번의 큰 전쟁(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조선은 큰 피해를 보았습니다. 많은 군사들이 죽거나 다쳤고 포로로 끌려갔으며 우리 문화재들도 많이 약탈당습니다. 전쟁으로 인해서 백성들의 삶은 더욱더 어려워졌습니다.

이제 전쟁은 끝이 났고, 조선은 이 피해를 극복하기 위해 어떤 일을 했을까요? 함께 살펴 봅시다.(교과서 10쪽)


      <창덕궁: 임진왜란때 불에 탔지만 창경궁과 함께 가장 먼저 다시 지어졌다.>


전쟁 후 정릉행궁(현 덕수궁)에 머물렀던 광해군은 창덕궁과 창경궁을 가장 먼저 재건하였습니다. 그리고 경희궁을 창건하기도 했습니다.


<징비록:유성룡이 임진왜란 당시의 상황을 기록한 책으로 전쟁을 돌아보고 다시는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대비하기 위해서 쓴것입니다.>


징비록은 유성룡이 임진왜란(1592년~1598년)의 전황들을 기록한 것입니다. 징비록은 시경(유교경전)의 소비편(小毖篇) "내가 지난 잘못을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予其懲而毖後患)"라는 구절에서 따온것입니다. 이 책은 임진왜란 당시의 상황, 일본과 명나라의 외교, 전쟁 이후에 백성들의 생활상들에 대한 기록입니다.


유성룡은 전쟁을 미리 살펴보지 못한 것에 대해 돌이켜 반성해야 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순신을 비롯해 조선 관민과 의병의 공로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조선의 조정은 전쟁이 터지자 도망을 갔으며, 전쟁때 일본과 싸운 사람들은 이순신을 비롯 여러 장수들과 곽재우를 비롯한 의병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왕과 함께 도망을 했던 자들은 왕을 옆에서 보호해주었다는 이유로 1등공신이 된 반면 의병들에 대한 공로는 인정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유성룡의 징비록은 국가에서 공로를 인정해 주지 않은 자들에 대해 그 공로를 인정해 주어야 한다고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전란의 피해를 극복하고자 하고 국토를 지키려고 한 노력을 알아 봅시다.


전쟁으로 인해서 양안(토지대장)와 호적(신상명세)이 모두 불에 탔습니다. 조정은 인구조사를 시작하였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전쟁, 기근과 질병으로 인구가 크게 줄었습니다. 조정은 인구조사를 시작했습니다. 인구조사를 해야 세금도 걷을 수 있고 나라의 재정을 늘리고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전쟁으로 인해서 농지 역시 황폐해졌습니다. 농사에 필요한 저주지와 보(논농사에 필요한 물을 담아 두려고 쌓은 둑)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모내기 법이 보급되면서 적은 노동력으로도 넓은 땅을 경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조선 초기에도 모내기법은 있었지만 모내기는 법으로 금지가 되어 있었습니다. 남쪽 일부 지역에서만 시험적으로 모내기를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가뭄이 언제 올지 모르기 때문이었습니다. 모내기를 하기 위해서는 물이 넉넉히 필요한데 가뭄이 일어난다면 한해 농사를 망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저수지와 보를 설치함으로 인해서 모내기법이 널이 보급되었고 이로 인해서 적은 노동으로도 넓은 땅을 경작할 수 있었고 부유한 농민이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모내기법:모내기법은 모판에 씨를 뿌려 싹이 자란 모를 논에 옮겨 심는 방법이다. 잘 자란 모를 골라서 심기 때문에 수확량이 늘어났고 잡초를 뽑기가 쉬워져 일손을 줄일 수 있었다.>


모내기를 통해서 논농사의 경작이 수월하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서 농민들은 상품이 될 수 있는 여러 가지 작물들을 심기 시작했습니다. 예전에는 벼농사를 주로 심었지만 쌀이 넉넉해 지면서 쌀보다 더 상품성이 있는 인삼과 담배 채소 등의 작물을 심기 시작한 것입니다.


상품작물이 늘어나면서 자연적으로 상업이 발달을 하게 되었고 이 물건을 장에다 파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전국에 장시가 많이 생겨 났고 그 물건들을 사고 파는 사람들도 생겨났습니다.


<권용정: 보부상_보상은 보따리에 물건을 싸서 다니는 사람이며 부상은 지게를 매고 다니는 사람이다. 보상과 부상을 합쳐서 보부상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조정은 전란으로 황폐해진 백성들의 부담을 덜기 위해서 세금 제도를 정비했다. 백성들은 특산물을 세금으로 내는 것을 부담스러워 했다. 대동법이란 특산물 대신 토지의 면적에 따라 쌀이나 베, 무명, 돈 등으로 내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참고: 돈으로도 내게 한 것은 숙종 때 부터입니다. 숙종 때부터 화폐가 유통되었습니다.> 광해군(15대왕)때 시작된 대동법은 경기도에서 실시(1608년) 되었으며 점차 확대되어 숙종(19대왕)때 전국(1708년)으로 확산되었습니다. 대동법이 전국으로 확산되기 까지 약 100년이 걸렸습니다.


<대동법 확대 지도>

평안도와 함경도에서는 세금을 걷어 한성(오늘날 서울)으로 보내지 않고 현지에서 국방비나 사진 접대비 등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제주도는 쌀농사가 많이 어렵고 운반하는데 돈이 더 많이 들기 때문에 자체적으로 사용하도록 했습니다.


세금에는 조세, 공납, 역 세가지가 있었습니다, 조세는 땅에서 농사 지은 것을 내는 것이며, 공납은 각 지역의 특산물을 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역은 국가에서 군대입대와 성벽등을 쌓는데 필요한 노동을 제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공납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마을에서 나지 않는 특산물을 세금으로 내라고 하는 일이 많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산속에 사는 사람들에게 생선을 세금으로 내라고 한다던가, 바다에 사는 사람에게 산에서 구할 수 있는 약초나 열매를 세금으로 내라고 한것입니다. 할 수 없이 이들은 세금을 내기 위해 다른데서 사서 세금으로 내야 했는데 관리와 상인이 짜고 물건을 비싸게 팔았습니다. 이런 일이 너무 많이 있어 백성들의 삶은 더욱더 어려워 졌습니다. 대동법은 땅이 적게 있거나 없는 백성들에게 짐을 덜어주는 좋은 제도였습니다.


임진왜란으로 인해서 많은 백성들이 죽었는데 전쟁으로 인한 것 뿐마 아니라 기근과 전염병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선조 때 왕명으로 허준을 비롯해 정작, 양예수, 김응탁 등이 함께 만든 책입니다.


<허준: 동의보감_선조때 만들기 시작하여 광해군때 완성된 의학서로 유네스코세계기록 유산에 등재되었다.>


정유재란(1757년)때 잠시 중단되었다가 광해군의 독려로 1610년 완성되었습니다. 허준은 동국(조선)의 실정에 맞는 의서라 하여 “동의보감”이라고 제목을 붙였습니다. 동의보감은 중국의 약재가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나는 약재를 권장하였습니다. 중국에서 나는 약재는 구하기도 힘들고 가격이 비쌌지만 우리나라에서 나는 약재는 구하기도 쉽웠고 그만큼 가격도 쌌습니다. 그리고 우리 나라 사람들의 체질에 맞는 제조법 등을 수록했기 때문에 중국 의서들보다도 훨씬 좋은 장점이 있었습니다. 동의보감은 2009년 7월 31일,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었습니다.

참고: 동의보감 이전에 세종에 지어진 향약집성방, 의방유취 등의 여러 의서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조정은 임진왜란으로 파괴된 궁궐과 사고를 다시 지었으며 무너진 성을 다시 쌓고 무기를 수리하는 등 국방에서 힘을 썼습니다.

사고는 조선의 왕이 나라를 다스릴 때 있었던 사실들을 기록한 실록 및 종요한 책을 보관하는 곳입니다. 왕들의 중요한 기록은 남긴 실록은 화재 및 전쟁 등으로 분실될 것을 우려하여 여러개를 만들어 보관하였습니다. 조선 전기에는 춘추관·충주·전주·성주에 보관을 하였으며 임진왜란 이후에는 춘추관, 마니산, 오대산, 태백산, 묘향산에서 보관을 하였습니다. 조선왕조 실록은 총 1,894권 888책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총 49,646,667자 의 방대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은 1997년 10월 1일 유네스코에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되어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왼쪽부터, 세종, 중종, 성종 실록>

그리고 조정은 임진왜란으로 파괴된 궁궐과 사고를 다시 지었으며 무너진 성을 다시 쌓고 무기를 수리하는 등 국방에서 힘을 썼습니다.

사고는 조선의 왕이 나라를 다스릴 때 있었던 사실들을 기록한 실록 및 종요한 책을 보관하는 곳입니다. 왕들의 중요한 기록은 남긴 실록은 화재 및 전쟁 등으로 분실될 것을 우려하여 여러개를 만들어 보관하였습니다. 조선 전기에는 춘추관·충주·전주·성주에 보관을 하였으며 임진왜란 이후에는 춘추관, 마니산, 오대산, 태백산, 묘향산에서 보관을 하였습니다. 조선왕조 실록은 총 1,894권 888책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총 49,646,667자 의 방대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은 1997년 10월 1일 유네스코에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되어 있습니다.


임진왜란 이후에 일본은 조선과 다시 국교를 맺고 친하게 지내고 싶어했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쟁때 죽었고 조선에 우호적인 도쿠가와 쓰나요시가 정권을 잡고 있었습니다. 광해군은 포로반환을 요청으로 일본과 다시 국교를 맺습니다. 그리고 대규모의 사절단을 일본에 보내는데 이들을 통신사라고 부릅니다. 통신사는 조선의 문물을 일본에 가르쳐 주는 역할도 하였습니다. 일본은 은 100만냥을 들여서 33만명을 동원하고 말 7600두를 동원하여 조선의 통신사를 환영하였습니다. 이때 전국이 축제 분위기를 이루었고 에도막부 쇼군(도쿠가와 쓰나요시)의 승계를 대외적으로 공인 받고 조선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것이 일본의 목적이었습니다.


통신사의 행로

통신사의 행렬

통신사를 맞이하는 애도(토교) 사람들

임진왜란이 끝난 뒤에 조선은 일본과 국교를 끊었느나 몇 년 후 일본의 새로운 정권은 다시 국교를 맺기를 요청하였다. 이에 조선은 전쟁중에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 포로를 데려오는 조건으로 일본과 국교를 맺었다. 이후 통신사는 조선의 문화를 일본에 전해주어 일본의 문화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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