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수업/초등학교 6학년 1학기 사회

[초등학교6학년 1학기 사회] 1. 조선사회의 움직임_2)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인 조선_두번째

지니쌤 동진이 2017. 4. 4. 14:44

[초등학교 6학년 1학기 사회]


1. 조선사회의 새로운 움직임

   1) 전란의 극복

   2)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인 조선

   3) 서민 문화의 발달

   4) 조선 시대 여성의 삶

   5) 조선을 뒤덮은 농민의 함성


학습내용: 새로운 문물의 수용에 따른 변화를 알아봅시다.


새로운 문물의 수용과 서학에 대하여 알아봅시다.


중국에 다녀온 사신들은 조선에 세계지도, 과학기술에 관한 서적, 화포, 자명종, 천리경 등 서양문물을 들여와 소개하였다. 중국을 세계 중심으로 여기던 조선 사람들은 서양 문물으 접하면서 생각이 달라지기 시작하였다.(22쪽)



조선후기에 조선에는 서양문물들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대표적으로 천리경과 자명종이 있습니다. 이것들 뿐만 아니라 안경(애체), 유리거울, 양금(철사로 만든 현악기)등등 많은 물건들이 있었습니다.

외국의 문물들이 조선 후기에 처음 들어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삼국시대 때도 외국 문물이 들어왔었는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외국과의 교류가 거의 단절되었습니다.

 

천리경은 망원경입니다. 청나라에 다녀온 사신 정두원이 천리경, 서양 대포, 자명종 등을 임금에게 바쳤다는 <인조실록>의 기록이 있습다. 천리경 렌즈에 색처리를 하여 일식을 관찰하 수 있게 했으며 “규일영(해를 엿본다)‘라고 불렀습니다. 태양은 왕을 상징했었는데 태양을 엿본다는 것을 왕을 엿본다 하여 불경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천리경을 부숴버렸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좌우간 천리경은 천체관측 하는데 도움을 주었으며, 천동설(태양지 지구 주변을 돌고 있있다고 생각)에서 지동설(지구가 태양주변을 돌고 있다)로 바뀌는 변화를 가지고 왔습니다. 그리고 땅을 측정하는데도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자명종은 복제가 불가능할 정도로 정교했습니다. 자명종은 널리 사용되지 못하고 일부 살류층에게만 사용되었습니다. 아무래도 백성들 대다수가 농민이었기 때문에 정확한 시간을 파악하는 것에는 큰 관심이 없었을 것입니다. 계절의 변화 24절기 등만 알면 되기 때문입니다.

천리경, 안경, 앙금, 거울, 자명종

천리경과 자명종은 널리 사용되지는 않았으며 일부 계층의 사람들만 사용했습니다. 천리경과 자명종 이외에 안경, 유리거울, 앙금(철사로 만든 현악기)등은 일반 사람들에게도 널리 사용되었습니다.

특히 안경은 인기가 많았습니다. 아무래도 독서를 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안경을 처음 쓴 왕은 숙종이었으며 정조역시 안경을 썼습니다. 규장각에서 연구를 했던 정약용 역시 안경을 썼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리고 조선 후기 화가 김득신의 그림에도 안경을 쓰고 있는 사람이 보입니다.

유리거울은 안경과 마찬가지로 널리 사용이 되었으며, 양금은 우리의 문화속에서 자리잡아 널리 사용되었습니다.

김득신, 투전도


조선시대의 성리학은 이런 서양문물들에 대해서 대부분 사치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 보았듯이 실학자들은 농업뿐만 아니라 상공업에 있어서도 개혁을 해야한다고 주장했으며 발달된 문물들을 적극수용하고자 했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나라 안의 지형을 살펴볼 수 있는 지도뿐만 아니라 주변 나라까지 그려진 세계지도를 만들었다. 세계지도는 당시 사람들의 세계관을 짐작해 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23쪽)

조선전기: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1402년 제작된 세계지도이다. 이 지도는 세계를 사각형으로 표현하였으며 중국과 일본 뿐만 아니라 아프리카 유럽까지 나타내었다. 또 조선을 크게 표현하고 중국을 지도 중앙에 그렸다는 점에서 당시 사람들의 세계관을 짐작할 수 있다.


조선후기:조선의 곤여만국전도는 1708년 중국에서 가져온 곤여만국전도를 보고 그린 세계지도이다. 세계를 원으로 표현한 이 지돈느 당시 사람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때부터 곤여만국전도와 비슷한 세계지도가 제작되기 시작하였으며 더 넓은 세계가 있음을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질문: 곤여만국전도는 조선 전기에 만들어진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와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서양의 발달된 문물 뿐만 아니라 세계지도도 가지고 왔습니다. 조선 전기에도 세계지도가 있기는 했습니다. 조선 전기의 세계지도는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입니다.

이 지도는 동양에서 발견된 세계지도중 가장 오래된 지도입니다. 중국이 세계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을 정도로 크게 글져 있고 한반도 역시 아프리카대륙보다 크게 그려져 있습니다. 이 지도는 중국중심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고있습니다.

조선 후기에 “곤여만국전도”를 가지고 왔습니다. 처음 가지고 온 것은 1608년에 청에사신으로 갔던 이광정과 권희가 가지고 왔으며, 그 후 마태오리치의 지도를 바탕으로 1708년 숙종의 명을 받아 김진여가 그린 것입니다(23쪽). 

이 지도를 통해 조선은 중국보다 넓은 세계를 알게 되었으며,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라고 생각했던 것도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더이상 중국은 세계의 중심이 아니었습니다. 중국중심의 세계에서 벗어나 더 넓은 세상을 보게 된 것에 큰 의미가 있습니다.


중국에 다녀온 사신들은 조선에 천주교를 소개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천주교를 서양학문의 하나로 받아들여 서학이라고 불렀다. 이후 일부 학자들이 천주교를 신앙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하였고 점차 상민과 부녀자들에게도 널리 퍼지게 되었다.

천주교를 믿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조상에 대한 제사를 거부하는 일이 생겼다. 나라에서는 천주교의 인간 평등 사상과 제사 거부가 유교 사회의 질서를 무너뜨릴 수 있다는 이유로 천주교를 금지하고 탄압하였다.(24쪽)


조선 후기 이승훈은 사절단의 일원이 되어 청나라에 갔습니다. 그는 그라몽 신부로부터 세례(영세)를 받았으며 베드로라는 세례명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1784년 이승훈은 성서와 묵주 등을 가지고 한양으로 돌아왔습니다. 1785년 자신의 집에 천주교회를 세웠으며, 정약용, 정약종, 정약진 등 삼형제와 함께 성서를 한글로 번역하고 나누어 주며 가르쳤습니다. 처음에는 이들이 신앙생활을 하는데 큰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윤지충이 모친상을 당했는데 천주교회식으로 장례를 치린 것이 문제가 되어 참수당했습니다(신해박해 1791년). 이승훈은 1801년 신유박해때 처형을 받았으며, 그 이후로도 조정은 천주교를 계속 탄압해 기해박해(1839년)때도 많은 천주교인들이 죽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정약용과 정약전도 천주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유배를 갔으며 정약전은 끝까지 신앙을 버리지 않아 처형을 받았습니다.


조선최고의 과학자 홍대용

과학에 관심이 많았던 홍대용은 청에가서 망원경으로 태양을 관찰하고, 여러 천문 기구제작법과 사용법을 배웠다. 이후 홍대용은 천문, 역법 등을 연구하면서 중국 중심의 세계관에서 벗어날 것을 강조하였고 지구가 하루에 한번씩 자전하기 때문에 낮과 밤이 생긴다고 주장하였다.(25쪽)


홍대용이 만든 혼천의

지구는 둥글고 빠른 속도로 자전을 하기 때문에 지구 중심으로 쏠리는 힘이 발생하게 되며, 이 힘으로 사람들이 지구로부터 거꾸로 떨어지지 않는다는 이론을 내세웠습니다. 이를 상하지세(上下之勢)라고 했는데 오늘날의 중력과 같은 개념입니다. 뿐만 아니라 지구를 넘어서 은하계의 존재에 대해서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홍대용은 무한한 우주 속에 지구외의 다른 세계가 존재할 수 있음을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홍대용은 자신이 연구한 내용을 "의산문답"에 엮었습니다. 이 책에서 지구가 둥글다는 것과 지구가 태양 주변을 돌고 있다는 것, 그리고 무한우주설을 주장했습니다. 

지구가 둥글기 때문에 어느 한 곳이 세상의 중심이 될 수 없으며(중국이 중심이 아니다.) 오랑캐도 없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지구는 둥글기 때문에 어디를 기준으로 하느냐에 따라 중심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새로운 지식혁명의 원동력을 심어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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