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수업/초등학교 6학년 1학기 사회

[초등학교6학년 1학기 사회] 2. 근대국가 수립을 위한 노력과 민족운동_4)나라를 되찾기 위한 노력_세번째

지니쌤 동진이 2017. 5. 24. 22:02

[초등학교 6학년 1학기 사회 요점 정리 및 해설]


2. 근대 국가 수립을 위한 노력과 민족 운동
    1) 조선의 개항
    2) 자주독립 국가의 선포
    3) 나라를 지키기 위한 노력
    4) 나라를 되찾기 위한 노력


학습목표: 나라를 되찾기 위한 우리 민족의 노력을 알아봅시다.


3.1운동 이후의 독립운동에 대하여 알아봅시다.(94쪽)


일제의 문화통치(94쪽)
① 1910년대 일제는 헌병경찰제를 실시하여 강압적인 통치를 하였습니다.
② 3.1운동 이후 일제는 무력만으로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를 억누를 수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③ 일제는 헌병경찰제를 폐지하였습니다.
④ 우리 민족에게 신문과 잡지의 발행을 허용하였습니다. 그러나 신문과 잡지를 미리 검열하여 식민 지배를 비판하는 내용을 삭제하였습니다.
⑤ 일제는 경찰력을 더 강화하였습니다.
⑥ 일제가 문화통치를 한 이유는 식민 지배에 대한 우리 민족의 저항 의지를 약화시키고 친일세력을 늘려 민족을 분열시키려는 것이었습니다.


해설

일제는 1910년대에는 헌병경찰제를 통해서 강압적으로 통치를 하려 했습니다. 많은 독립운동가들을 체포했으며, 일상생활에서까지 감시를 하였습니다. 태형령을 통해서 재판없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재판없이 때릴 수 있는 형벌을 내리기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교사들에게도 제복을 입게 하고 칼을 차게 하면서 학생들에게 위협을 가했습니다. 이런 통치를 하였지만 1919년 3월 1일 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일제는 강압적으로 지배를 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일제는 헌병경찰이 아닌 보통 경찰제실 실시했고, 교사들의 제복 착용을 폐지 하였습니다. 그리고 언론 출판 집회의 자유를 부분적으로 허용하였습니다. 1920년대 시기를 문화통치라고 부릅니다. 겉으로는 조금 유연해진 듯 보였으나 그 속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문화통치는 친일파들을 통해서 우리민족을 탄압하였으며 민족 분열을 일으키는 술수에 불과하였습니다. 경찰 수는 늘어났으며 언론과 출판 집회의 자유가 있다 했으나 신문이나 잡지들은 모두 검열을 받았습니다. 검열이란 통제를 하는 건데 일제에 대해 비판을 하거나 독립에 대한 내용이 있으면 모두 삭제하도록 한 것입니다. 또한 치한유지법을 통해서 우리민족의 독립운동을 막았으며 감시와 탄압을 하였습니다.


* 치안유지법: 조선의 독립운동과 공산주의 운동 탄압에 적극 활용되었다.


물산장려운동과 민립대학설립운동(94쪽)
① 일제로부터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민족지도자들은 민족의 실력을 키우기 위한 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② 평양에서는 물산 장려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운동을 통해 국산품을 애용하고 근검절약 등을 실천하여 민족 기업을 키우려고 하였습니다. 
③ 일제의 식민지 교육에 맞서 민족 교육을 담당할 대학 설립 운동을 펼치기도 하였습니다.

*물산: 그 지방에서 생산되는 물품.

물산장려운동신문기사: '내 살림 내 것으로', '조선 사람 조선 것'이라는 글이 적혀 있다.


해설: 물산장려운동

일제는 1910년에 회사령을 통해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회사 운영하는 것을 통제하였습니다. 회사령은 회사를 세우기 전 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3.1운동 이후에 회사령은 폐지되었습니다. 이제는 누구나 회사를 차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늦게 시작한 우리나라 사람들은 여러 가지 경쟁에서 일본보다 늦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배경 가운데 “물산장려운동”이 평양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조선 물산 장려회는 ‘조선 사람은 조선 사람이 지은 것을 사 쓰자’는 슬로건을 걸었고, 동아일보는 이를 홍보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일부 상인들이 물산장려운동을 이용하여 큰 이익을 보려고 물건값을 올리는 등, 사회주의자들은 일부 자본가들(사장들)만을 위한 것이라고 비판을 하였기 때문에 점차 쇠퇴하게 되었습니다.



       물산 장려외 궐기문


해설: 민립대학설립운동
대학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하자 우리나라는 민립대학설립운동을 펼쳤습니다(1922년). 일천만동포가 1인당 1원씩 모금을 해 천만원을 모아 대학을 세우자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일제는 이를 대학세우는 것을 방해 하였습니다. 그리고 경성제국대학을 세움으로서 민립대학설립을 하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경성제국대학은 일제가 세운 대학으로 자신들이 교육하고 싶은 것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을 친일적으로 교육을 하는 학교였습니다.


광주학생항일운동(94쪽)
① 전라남도 광주에서는 기차로 통학을 하던 한일 학생간의 충돌을 계기로 항일 운동이 일어났습니다.(광주 학생 항일 운동, 1929년).
② 학생들은 민족 차별과 식민지 교육의 철폐를 주장하며 대규모 시위를 하였다.


해설

1929년 10월 30일 광주의 한 통학열차 속에서 일본인 학생이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3학년 박기옥 학생을 희롱한데서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나라 여학생이 희롱을 당하자 우리나라 학생들과 일본 학생들 사이에 싸움이 일어났습니다. 경찰들이 현장에 왔지만 우리나라 학생들만 처벌을 받았습니다. 11월 3일 우리학생들과 일본학생들 사이에 다시 싸움이 일어났고 개인의 싸움이 학교과 학교의 싸움으로 번졌으며, 전라도 일대의 학생들을 넘어 전국적인 항일운동으로 번졌습니다.

11월 3일 광주지역에서부터 시작한 항일운동은 1930년 4월까지 194개 학교 5만 4천명의 학생들이 참여 하였는데 이는 전국 학생들 중 약 60%가 참여한 것이었습니다. 이로인해 약 5000여명의 학생들이 구속, 퇴학, 무기정학을 당하였습니다. 광주항일학생운동은 3.1운동 이후 최대 규모의 항일민족운동이었습니다.


참고: 광주학생항일운동당시 격문(1929)
장엄한 학생 대중이여! 최후까지 우리의 슬로건을 지지하라! 그리고 궐기하자! 싸우자! 굳게 싸우자!
1. 검거자를 즉시 우리 손으로 탈환하자.
1. 교내에 경찰의 침입을 절대 반대한다.
1. 언론, 출판, 집회, 결사, 시위의 자유를 획득하자.
1. 조선의 본위의 교육제도를 확립하라!
1. 식민지적 노예 교육을 철폐하라!
1. 사회과학 연구의 자유를 획득하라!
1. 전국 학생 대표자 회의를 개최하라!


11월 3일: 학생독립운동기념일

광주항일학생운동을 기념하며 1953년 정부는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된 11월 3일을 학생의 날로 제정 공포하였습니다. 학생의 날은 1973년 각종 기념일을 통폐합한다는 명분으로 폐기되었다가 1984년에 부활하였습니다. 2006년에는 학생독립운동기념일로 명칭이 바뀌었다.


신간회 창립(95쪽)
① 1927년에는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연합하여 국내 최대 규모의 항일 단체인 신간회를 창립하였습니다.
② 신간회는 한국인 위주의 교육실시, 착취기관의 철폐 등을 주장하였습니다.
③ 다양한 사회 운동을 지원하였습니다. 특히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을 전국으로 확산시키는 데에도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해설:

조선중앙기독교청년 회관에서 신간회가 결성되었습니다(1927년). 이는 민족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이 연합해서 만든 단체였습니다. 보수적인 사람들과 진보적인 사람들이 힘을 합쳐서 만든 최초의 단체였습니다.
신간회는 합법단체였으며 공개된 단체였습니다. 교육사업과 노동쟁의 학생운동들을 지원하였습니다. 특히 신간회는 광주항일학생운동이 전국적으로 퍼지는데 도움을 주기도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사회주의자들이 체포가 되었으며, 보수적인 사람들만 남게 되었습니다. 보수적인 사람들이 많이 남았기 때문에 사회운동이나 쟁의 등에 대한 지원이 줄어들게 되자 진보적인 사람들은 불만을 품게 되었고 결국 신간회는 해체가 되고 말았습니다.


초등학교 국정교과서의 유감: 신간회는 좌우합작운동이었습니다. 좌우합작이란 보수진영인 우파와 사회주의운동을 했던 좌파 사람들이 함께 힘을 합친 운동이었습니다. 국정교과서인 초등학교 사회교과서는 우리나라 최초로 양진영 우파와 좌파가 함께 연합한 단체를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말을 넣으면서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는것 같습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얼마든지 좌우가 함께 공존할 수 있어야 하는데, 현재 우리나라의 상황은 그렇지 못한것 같습니다. 시민운동을 하는 사람들 특히 박근혜 최순실 게이트로 인해서 촛불을 든 시민들에게도 종북좌빨이라는 프레임으로 공격하는 모습은 정말로 큰 실망입니다. 국정교과서인 초등학교 사회 교과서의 이런 표현은 조금 수정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무장독립운동(95쪽)
① 3.1 운동 이후 무장 독립운동이 더욱 필요하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만주와 연해주에서 여러 독립군 부대를 조직하였습니다.
②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국내에 들어와서 일본 경찰서나 일본군을 공격하였습니다.
③ 일본군은 만주까지 쫓아와 독립군을 공격하였습니다.


해설

일제에 대한 무장투쟁운동은 3.1운동을 거치면서 급속도로 변했습니다. 만주와 간도지역에서 무장투쟁운동을 했던 이들은 국내진공작전을 종종 펼쳤습니다. 이들은 친일파들을 처단하였으며 국내에 있는 일제시설들을 파괴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일본은 독립군들을 막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습니다.


참고: 박정희 전대통령의 친일행각:

박정희는 일왕에서 충성을 맹세하는 혈서를 썼던 친일파였습니다. 박정희는 만주군관학교를 졸업하였으며 일본군 장교였습니다. 해방이후에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독재를 하면서 민주주의를 원하는 시민들을 학살하였으며, 민주주의의 발전을 가로 막은 사람이었습니다.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첩(95쪽)
① 독립군 부대는 봉오동과 청산리에서 일본군을 크게 무찔러 우리 민족에게 독립에 대한 희망과 용기를 심어 주었습니다.
② 독립군에 패한 일본군은 만주에 있는 우리 민족을 탄압하였고, 독립군 부내의 활동은 점점 어려워졌습니다.

③ 봉오동전투_독립군에게 공격을 받은 일본군은 만주의 봉오동까지 독립군을 쫓아왔습니다. 홍범도 부대는 계곡을 따라 산 중턱에 매복하였습니다. 그들은 일본군은 독립군의 포위망 속에서 몇 시간을 버티다 후퇴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홍범도 부대는 도망치는 일본군을 끝까지 추격하여 일본군에게 많은 피해를 입혔습니다.

④ 청산리대첩_봉오동 전투에서 크게 패한 일본군은 대규모 부대를 만주로 보내 독립군을 공격하였다. 이때 김좌진과 홍범도 등이 이끄는 독립군은 숲이 우거지고 계곡이 깊은 청산리에 매복해 있다가 쳐들어온 일본군 부대를 공격하였다. 독립군은 6일 동안 10차례의 전투 끝에 크게 승리하였다.

*매복: 상대편의 움직임을 살피거나 상대편을 갑자기 공격하려고 일정한 곳에 몰래 숨어 있는 것.


해설

1920년 6월 봉오동에서 홍범도가 지휘했던 부대는 일분군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했습니다. 후에 홍범도의 군대와 김좌진의 군대가 연합을 하여 청산리에서 전투를 하여 승리 하였습니다. 청산리 전투는 독립군이 이끈 전투 중에서 가장 큰 승리였습니다.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대첩 지역(95쪽)

▲ 홍범도와 김좌진


한인애국단(96쪽)
① 1920년대 중반 이후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이끌던 독립운동은 일제의 탄압으로 어려움에 처해 있었습니다.
② 김구는 1931년에 한인 애국단을 조직하여 일제의 주요 인물을 처단하였습니다.
③ 이봉창, 윤봉길 등의 의거는 중국인에게 감명을 주었고 중국이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지원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④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활동은 다시 활기를 띠게 되었다.


김구,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이끌었으며, 주석이 되어 항일 운동을 주도하였다.(96쪽)


⑤ 이봉창 의거_1932년 1월 일본의 도쿄에서는 일본 왕 히로히토가 탄 마차가 삼엄한 경호를 받으며 도로를 지나고 있었다. 이때 도로 옆 군중 속에 있던 이봉창이 뛰쳐나와 일본 왕이 탄 마차를 향해 폭탄을 던졌다. 그러나 폭탄이 마차의 뒤편에 떨어져 폭발하면서 일본 왕을 명중시키지 못하였고, 이봉창은 그 자리에서 체포된 이후 순국하였다. (사진, 이봉창)(96쪽)

⑥ 윤봉길 의거_1932년 4월 상하이에서 발생한 중국군과 일본군의 무력 충돌에서 일본군이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많은 일본인들이 홍커우 공원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윤봉길은 삼엄한 경계망을 뚫고 사람들과 함께 공원에 들어갔다.
행사가 한창일 때 윤봉길은 단상을 향해 폭탄을 던졌다. 큰 폭발과 함께 상하기 파견군 총사령관을 비롯한 여러 일본인이 쓰러졌다. 윤봉길은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고, 젊은 나이로 순국하였다. (사진, 윤봉길)(96쪽)


해설

일제는 만주 사변을 일으켰고 일으켰습니다. 만주를 점령한 일제는 상하이까지 점령하였습니다. 이런 상황가운데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조금 침체되었습니다. 김구는 대한민국임시정부에 활기를 불어 넣기 위해서 한인애국단을 조직했습니다(1931년).
한인대국단 단원이었던 이봉창 의사는 1932년 1월 도쿄에서 일왕에게 폭탄을 던졌습니다. 윤봉길 의사는 1932년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열인 일왕의 생일과 상하이 점령기념식에서 폭탄을 던졌습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도시락폭탄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윤봉길의사가 던진 폭탄은 도시락 폭탄이 아니라 물병폭탄이었습니다. 물병 폭탄은 이미 던져서 없고 체포된 후 발견된 것이 도시락 폭탄이라서 도시락 폭탄을 던졌다고 전해진 것입니다.

독립군들의 활동으로 인해 일제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윤봉길 의사가 폭탄을 던진일로 인해서 중국의 국민당 정부는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적극 지원해 주었습니다. 이후 조선의용대와 한국광복군 등이 독립군으로 활동을 하였습니다.

# 작은 이야기 역사, 이회영과 그의 형제들이 만주로 간 까닭은 무엇일까(97쪽)
이회영은 조선 시대의 명문가 자손으로, 그의 집안은 당시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부자였다. 그래서 일제 강점기였다 하더라도 자신이 원하면 평안한 삶을 살 수 있었다. 그러나 이회영은 동지들과 함께 만주를 돌아본 후 독립운동 기지를 세우는 것을 구상하였고, 이후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자 형제들에게 “큰 뜻을 위해 죽을지언정 왜적 밑에서 노예가 되어 생명을 구차하게 이어 갈 수는 없지 않느냐?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만주로 가서 독립운동 기지를 세우자고 권유하였다. 이회영의 권유를 맏아들인 형제들은 전 재산을 팔아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여 만주로 갔다.
만주로 간 이회영과 그의 형제들은 신흥 무관 학교를 세워 독립군을 길러냈다. 이후에도 독립운동에 헌신한 이회영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고문 끝에 숨을 거두었다. 그의 가족 대부분도 독립 운동을 하다가 죽음을 맞이하였다.
한 집안 모두가 독립운동에 참여하고 큰 재산을 독립운동에 바친 경우는 흔치 않다. 이회영과 그 일가의 희생은 독립운동에 큰 밑걸음이 되었다.

이회영과 그의 형제들이 만주로 떠날 계획을 하는 모습, 우당 기념관(97쪽)
참고: 당시 우당 이회영 선생님의 6형제가 독립군을 지원한 재산은 지금의 가치로 약 600억이나 됩니다. 여섯 형제중 둘째셨던 분은 굶어 죽었으며, 해방때까지 살아 있었던 막내 이시영 선생님은 우리나라 초대 부통령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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