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수업/초등학교 6학년 1학기 사회

[초등학교6학년 1학기 사회] 2. 근대국가 수립을 위한 노력과 민족운동_4)나라를 되찾기 위한 노력_네번째

지니쌤 동진이 2017. 5. 30. 19:16

[초등학교 6학년 1학기 사회 요점 정리 및 해설]


2. 근대 국가 수립을 위한 노력과 민족 운동
    1) 조선의 개항
    2) 자주독립 국가의 선포
    3) 나라를 지키기 위한 노력
    4) 나라를 되찾기 위한 노력


학습목표: 나라를 되찾기 위한 우리 민족의 노력을 알아봅시다.


민족 정신을 지키기 위한 우리 민족의 노력을 알아봅시다.(98쪽)


일제의 민족말살 정책(98쪽)

1) 역사왜곡(98쪽)

① 일제는 국권 침탈 이후 학교에서 일본어와 일본 역사를 가르쳤습니다.
②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한국의 역사를 거짓으로 꾸며 가르쳤습니다.
③ 일제는 한국과 일본이 하나라고 주장하며 우리의 민족정신을 없애려고 하였습니다.(내선일체)


해설

1910년대 일제는 헌병 경찰제를 통해서 우리 민족을 억압했습니다. 1919년 3.1운동 이후로 강압적인 방법으로는 안된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1920년대에는 문화통치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1910년대보다도 더 교활하게 우리 민족을 억압했습니다. 1930년대 들어와 일제는 민족 말살 정책을 펼쳤습니다.

일제는 우리 역사를 왜곡하기 위해서 조선사편수회를 조직하여 “조선사”를 편찬하였습니다. 이 책에서 우리 민족은 주체적으로 발전 할 수 없는 민족이기 때문에 일본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고 쓰고 있다. 이를 식민사관이라고 합니다.
일제의 역사왜곡의 예로 “임나일본부설”이 있습니다. 이는 일본이 4세기경 신라, 백제 그리고 가야를 식민지로 삼았다는 내용입니다. 임나는 가야를 다르게 부르는 말인데 조선총독부와 같이 임나에 일본본부를 두어 다스렸다는 내용입니다.
광개토대왕릉비의 내용을 근거로 내세우고 있지만 이는 일본이 잘못해석하고 있는 것입니다.


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 渡海 破百殘□□新羅 以爲臣民
백잔신라 구시속민 유래조공. 이왜이신묘년래 도해 파백잔□□신라 이위신민


이 부분을 일본은 “백제와 신라는 예로부터 (고구려의) 속민으로 조공을 바쳐왔다. 그런데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신라를 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일본이 해석을 잘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광대토대왕릉비이기 때문에 주어를 일본이 아니라 고구려로 해야한다는 것입니다. 광대토대왕릉비는 관대토대왕의 업적을 기리는 것인데 일본을 주어로 쓸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를 바르게 해석하는 이렇습니다. “백제와 신라는 예로부터 (고구려의) 속민으로 조공을 바쳐왔다. 고구려는 바다를 건너가 백제와 가야 신라는 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라고 말입니다.
일본은 자의적으로 해석을 하면서 일본과 우리민족은 원래부터 동족이었다것을 주장하며 “내선일체”를 주장하였습니다.
그리고 조선은 자율적인 힘이 없기 때문에 스스로 설 수 없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래서 옛날에도 일본의 지배를 받았고 지금도 그 지배를 받아야 한다는 주장을 하기 위해서 역사를 왜곡하였습니다.


2) 신사참배, 창씨개명(98쪽)
① 신사참배: 일제는 서울 남산에 조선 신궁을 짓고, 전국 곳곳에 신사를 세워 한국인에게 절을 하도록 강요하였습니다.
② 일본 왕에게 충성을 다짐하는 글을 외우도록 하였습니다.

③ 창씨개명: 성과 이름을 일본식으로 고치도록 강요하였다.

*신궁: 신사(일본 왕실의 조상, 국가에 공이 큰 사람 등을 신으로 모신 사당중에서 가장 높은 지위의 시설.


해설:

중일전쟁 이후 일제는 우리민족을 전쟁에 동원하기 위해서 황국신민화 정책을 펼쳤습니다. 일제의 미나미 지로 총독은 일본인과 조선인은 하나라는 내선일체를 내세우면서 우리 민족을 말살하려고 하였습니다.
일제는 황국신민의 서사를 암송하게 하였습니다(1937년).


-황국신민 서사(아동용)-
1. 우리들은 대일본 제국의 신민입니다.
2. 우리들은 마음을 합하여 천황폐하에게 충의를 다합니다.
3. 우리들은 인고 단련하고 훌륭하고 강한 국민이 되겠습니다.


일제는 황국신민 사상을 주입하기 위해서 전국곳곳에 신사를 세웠습니다. 신사란 일본의 민속신앙인 신토를 모시는 종교시설입니다. 일제는 일왕을 신격화하고 강제로 신사참배를 하게 함으로서 우리 민족을 정신적으로 지배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일왕이 있는 도쿄를 향해 감사의 절을 하는 궁성요배를 강요하였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곳으로는 서울 남산에 세워진 신궁이 있습니다.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사람들을 탄압하면서 감옥에 가두기도 하였습니다. 특히 기독교에서 반대를 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수많은 기독교학교들이 문을 닫았고 교회들이 폐쇄되고 많은 기독교 신자들을 감옥에 갇히기도 하였습니다.


일본의 신사는 지금도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종종 일본의 총리가 신사에 참배를 해서 논란이 되기도 합니다. 일본총리가 하는 신사참배가 논란이 되는 이유는 그 신사 중 전쟁전범들의 위패가 있기 때문입니다. 참배를 하는 행위가 전쟁범죄자들의 기리는 것이기 때문에 논란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일본은 지금도 자신들의 과거의 잘못에 대해 반성하고 있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일제는 우리말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학교에서도 오직 일본어만 사용하게 하였으며 조선어과목은 폐지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성과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는 창씨개명을 강요했습니다. 만약 창시개명을 하지 않으면 학교에 입학이 되지 않았으며 배급을 받지 못했습니다.


         ▲ 강제로 신사참배 하는 학생들(98쪽)


※ 일제강점기 어느학생의 생활(98쪽)


3) 일제가 우리나라 사람들을 강제로 끌고감(강제징용)_(99쪽)

①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99쪽)

1930년대 이후에 일제는 중국 대륙을 침략하였고(만주사변:1931년, 중일전쟁;1937년), 아시아와 태평양 곳곳으로 침략 전쟁을 확대하였다(태평양전쟁; 1941년).


② 강제징용과 공출제도(99쪽)

일제는 우리나라에서 전쟁에 필요한 사람과 물자를 강제로 끌고 가고 빼앗아 갔습니다.

공출제도_일제는 한국에 군수 공장을 건설하고, 전쟁에 필요한 무기를 만들기 위하여 지하지원과 금속을 강제로 가져갔습니다.
군인들의 양식이 될 만한 쌀, 보리, 감자, 고구마 등도 많이 빼앗아 갔습니다.

*군수: 무기 등 군사와 관련하여 필요한 물자


▲놋그릇을 강제로 거두어들인 모습(99쪽)


※ 일제는 놋그릇, 가마솥, 농기구와 같이 금속으로된 생활 도구 까지 빼앗아 갔습니다.

강제징용_일제는 한국인 학생들과 청년들을 전쟁터로 끌고 갔습니다.
일제는 많은 한국인을 광산이나 공장으로 보내 혹독하게 일을 시켰습니다.

정신_끌려간 사람들 중에는 여성들도 많았는데, 그 중 강제로 전쟁터에 끌려간 젊은 여성들은 일본군에게 많은 고통을 당하였습니다.


해설

일제는 국가총 동원법(1938년)을 제정하여 인력과 문자를 빼앗아 갔습니다. 전쟁을 하기 위해서 식량을 빼앗아 갔으며 배급을 실시하였습니다. 무기를 만들기 위해서 금속으로 된 모든 것을 빼앗아 갔는데, 놋그릇, 솥 등 생활용품까지도 빼앗아 갔습니다.


일제는 중일 전쟁 이후 조선의 청년들을 강제로 끌고가 전쟁에 동원시켰습니다. 1938년부터 강제로 끌려간 우리나라 청년들은 약 20만명이나 됩니다. 이들은 전쟁터뿐만 아니라 전쟁에 필요한 도를 닦는다거나 철도를 세우는 일 그리고 탄광에서 혹사당했습니다.


        ▲위안부로 끌려간 여성들

뿐만 아니라 수십만명의 여성(16~40세)들도 강제로 전쟁터에 끌려가 성노예로 살게 하였습니다. 강제로 끌려간 이들은 수도 없이 많이 죽었으며, 해방이후에도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일본은 아직까지 우리나라에게 사과를 하지 않고 있으며, 역사적 책임과 반성이 없습니다. 특히 지난 2015년 12월에 있었던 한일 위안부 합의는 아직까지 논란이 되고 있고 해결이 되지 않았습니다. 일본은 과거의 잘못을 반성도 하지 않고 있으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께 지원해주는 재단에 10억엔을 지원해줄 것이며, 대한민국이 앞으로 위안부 문제를 언급하지 않는다. 는 말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평화의 소녀상을 철거하라는 말까지 하고 있습니다. 일본은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제대로된 사과를 해야할 것입니다.


★ 참고: 본 게시글 아래 강제징용과 위안부 문제에 대한 EBS영상 자료가 있습니다.


▲ 강제징용된 노동자들(99쪽)
 


▲EBS에서 소개한 강제징용 영상

▲EBS에서 소개한 위안부 문제 영상


일본대사관앞 평화소녀상

우리 민족을 지키려는 사람들(100쪽)

일제의 식민지 정책에 맞서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우리의 민족 정신을 지키려고 노력하였습니다.


1) 일제강점기 국어학자들의 저항(100쪽)

이윤재, 최현배 등은 조선어 학회를 만들어 한글 보급에 앞장섰습니다.


해설

1921년 조선어 연구회가 조직되었습니다. 이들은 잡지 ‘한글’을 발간했습니다. 그리고 가갸날을 제정하였다(후에 한글날로 바뀜; 1928년). 조선어 연구회는 조선어 학회(1931년)로 바뀌었으며 한글 보급을 위해서 힘을 썼습니다. 그리고 조선어사전을 만들기 위해 준비하였으나 일제의 방해로 1942년 강제로 해산되었습니다.


2) 일제강점기 역사학자들의 저항(100쪽)

박은식, 신채호 등은 한국사에 관한 책을 써서 우리 민족의 긍지를 살렸습니다.


해설

위에서 말 했듯이 일제는 우리나라의 역사를 왜곡하였습니다. 일제가 우리나라의 역사를 왜곡하자 역사를 바로 잡으려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대표적으로 박은식과 신채호가 있었습니다. 박은식은 한국통사, 신채호는 조선상고사를 썼는데 이를 통해서 우리 민족의 고유성과 자주적인 역사관을 강조하였습니다.


3) 일제강점기 문학인들의 저항(100쪽)

이 외에도 한용운, 심훈, 윤동주, 이육사 등은 시나 소설과 같은 문학 작품으로 항일의지를 표현하였습니다.


해설

김소월, 한용운 등은 우리 고유의 민족 정서를 바탕으로 자신들의 소망을 담은 시를 지었습니다. 심훈, 윤동주, 이육사 등은 단순한 허무와 좌절을 넘어 민족의식을 담은 작품을 발표하여 일제의 통치에 저항하였습니다.


※ 참고: 우리 민족을 배신한 대표적 친일파들

일제는 우리나라를 지배하기 위해서 친일파들을 지원하기도 했습니다. 돈을 벌고 출세를 하기 위해서 우리민족을 배신하고 일제에 붙어서 우리민족을 탄압한 사람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일제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일본사람 보다 더 악랄하게 우리나라 사람들을 괴롭혔습니다.


반민족 행위를 했던 이들중 대표적으로 전직 대통령이었던 박정희(다까끼 마사오; 창씨개명 이름)가 있습니다. 그는 만주군관학교 출신으로 만주에서 독립군과 전투를 벌였던 부대 출신이었습니다. 해방 후 쿠데타로 정권을 잡고 19년간 독재를 하며 민주주의를 발전을 가로 막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광수, 최남선, 노천명 같은 유명한 문학인들도 변절 하였습니다. 이들은 일본이 강제징용을 하는데 우리나라 청년들에게 전쟁터에 지원을 하라고 권유하는 신문기사를 쓰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화신백화점 사장 박홍식등은 전쟁터에서 사용할 비행기와 무기를 구입하여 헌납했습니다.


작은 이야기 역사, 윤동주는 어떻게 독립운동을 하였을까(101쪽)

윤동주는 일제 강점기에 간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후 고국으로 돌아와 평양의 숭실중학교와 서울의 연희전문학교에서 공부하였다. 윤동주는 항상 우리 민족이 처한 고통스러운 현실에 대하여 슬퍼하고 안타가워하였다. 그럴 때마다 그는 시를 써서 민종이 처한 어려움과 어두운 현실 속에서도 희망을 간직하면서 부끄럼 없는 삶을 살기를 염원하였다. 그러나 윥동주는 일본 유학 중 항일 운동을 하였다는 이유로 일제에 잡혀갔고, 1945년 2월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한 채 일본 감옥에서 숨을 거두었다.

윤동주의 시에는 독립을 향한 의지와 희망이 담겨 있다.


지니가 2006년 항일운동탐방 하면서 윤동주 선생님 생가앞에서 찍은 사진

▲ 지니가 2006년도에 찍은 윤동주 생가 사진

(사진, 윤동주 생가, 중국 룽징)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를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서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