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수업/초등학교 6학년 1학기 사회

[초등학교6학년 1학기 사회] 2. 근대국가 수립을 위한 노력과 민족운동_3)나라를 지키기 위한 노력_두번째

지니쌤 동진이 2017. 4. 26. 13:53

[초등학교 6학년 1학기 사회 요점 정리 및 해설]


2. 근대 국가 수립을 위한 노력과 민족 운동
    1) 조선의 개항
    2) 자주독립 국가의 선포
    3) 나라를 지키기 위한 노력
    4) 나라를 되찾기 위한 노력


학습목표: 일제에 대항하여 나라를 지키려 했던 우리 민족의 노력을 알아봅시다.


나라를 지키기 위한 우리 민족의 노력을 알아봅시다.(80쪽)

항일의병

항일의병/ 민종식, 최익현, 신돌석
-을미 사변과 단발령으로 시작된 항일의병 운동이 을사늑약 이후 다시 전국에서 일어났습니다.
-의병장은 대부분 양반 출신이었지만 신돌석과 같은 평민 출신도 있었습니다.
  (충청도: 민종식, 전라도: 최익현, 태배산맥, 신돌석)
-신돌석이 이끄는 의병부대는 한때 수 천 명에 이르기도 하였습다.

해설:

을미사변과 단발령으로 항일의병 운동이 있었습니다. 을사늑약 체결 이후 의병운동이 다시 일어났습니다(을사의병).
민종식이 충청도 일대에서 활동을 했습니다(1906년). 이들은 홍성을 점령하기도 했습니다. 최익현은 태인지역에서 의병활동을 하였습니다. 최익현은 체포가 되었고 대마도로 압송되었습니다. 대마도에서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주로 유생들이 주도적으로 일어났지만 신돌석과 같은 평민 출신도 있었습니다. 신돌석이 이끄는 의병은 3000여명이 될 정도로 많은 인원이 모이기도 했었습니다. 신돌석은 경상도 영해와 평해 일대에서 활동했습니다.
을사의병은 민중들도 가세한 반외세 의병활동이었습니다.

최익현, 신돌석

항일의병운동(교과서 80쪽)

의병운동_초등학교 사회과부도 103쪽

항일의병_해산된 군인들의 참여
-고종황제가 강제로 물러나고, 대한제국의 군대가 해산되자 의병운동은 더욱 활발해졌습니다.
-해산된 군인들의 참여로 의병부대는 더욱 조직적으로 활동하였습니다.
-해산된 군인들의 참여로 신식 무기와 새로운 전술을 사용하여 전투력이 향상되었습니다.
-해산된 군인들의 참여로 항일 의병 운동은 의병 전쟁으로 발전하였다.

해설:

고종 황제가 헤이그특사를 파견한 것에 대해서 일본은 고종황제를 강제 퇴위 시켰으며, 군대를 해산하였습니다(1907년, 정미년). 군대가 해산되면서 군인들도 의병활동에 참여 하였습니다. 이때 발생한 의병운동을 정미의병이라고 합니다. 군인이었던 이들이 함께 하면서 전술과 화력이 향상되었습니다. 이전까지는 의병운동이었다면 이때부터는 전쟁화 됩니다. 의병들의 화력이 커졌다는 증거입니다. 이들은 ‘13도창의군’을 결성하며 한성(서울)진공작전을 펼쳤지만 실패하였습니다.

대한제국국인들의 훈련모습
항일의병_의병들의 연합부대
-의병전쟁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각 지역에서 활동하던 의병들은 연합 부대를 만들었습니다.
-연합부대는 일제를 몰아내기 위하여 대한 제국의 수도인 한성(오늘날 서울)을 향해 진격작전을 벌였으나 실패하였습니다.
-일제의 대대적인 탄압으로 국내에서 활동하기 위려워진 의병들은 만주나 연해주로 이동하여 항일 투쟁을 이어갔습니다.

해설:

의병운동은 호남지역에서 치열하게 일어났습니다. 이들은 일본군을 끊임없이 괴롭혔고 일본은 호남의병을 겨냥하며 공격을 하였습니다. 이를 남한터벌작전이라고 부릅니다. 일본의 공격으로 활동이 어려워지자 의병들은 국외로 피신을 했습니다. 그러나 완전히 도망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서 일본에 저항하기 위해 준비를 하였습니다. 후에 이들은 항일 무장투쟁을 하게됩니다.

의병의 모습: 양반, 군인, 농민, 상인, 승려, 포수 등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의병운동에 참여하였다.


애국계몽운동
-항일의병 운동이 전개되는 동안 다른 한편에서는 민족의 실력을 길러 나라를 지키려는 애국계몽 운동이 전개되었습니다.
-민족 지도자들은 학교를 세워 인재를 길렀습니다.
-신문과 잡지를 발간하여 사람들을 계몽하였습니다.
-산업을 발전시켜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고자 하였습니다.
국채보상운동
-일제에 진 빚을 우리 스스로 갚아 경제적으로 자립하자는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났습니다(1907년).
-국채보상운동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으나 일제의 방해와 탄압으로 중단되었습니다.

해설:

일본에 저항하는 방법은 다양했습니다. 의병운동을 한 사람이 있었다면, 애국계몽운동을 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경쟁을 통해서 살아남아야 한다고 생각 했습니다. 일본과 경쟁하기 위해서는 교육을 통해 실력을 키워야 한다고 생각한 겁니다. 이때 세워진 대표적인 학교는 이승훈이 정주에 세운 오산학교(1907년), 안창호가 평양에 세운 대성학교(1908년)입니다.

오산학교: 1907년 이승훈이 정주에 세운 학교이다.

대성학교: 1908년 안창호가 평양에 세운 학교이다.(83쪽)

근대교육운동_초등학교 사회과부도 103쪽 

그리고 신문과 잡지 등을 통해서 국민들을 계몽하였습니다. 이와 더불어 앞세운 것이 경제성장입니다. 대표적으로 대한매일신보와 황성신문이 있습니다. 대한매일신보는 국채보상운동을 홍보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국채보상운동은 일본에 진 빚을 갚기 위한 국민모금운동입니다. 지금도 국가에 무슨 일이 발생했을 때 모금운동을 하지요. 그것과 비슷한 것입니다. 그리고 대한매일신보는 영국사람 베델의 이름으로 창간하였습니다. 실제로는 양기탁이라는 우리나라 사람이 발행인이었지만 외국 사람을 통해 발행하면서 일본의 감시를 피해갔습니다.
황성신문은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으로 유명합니다. 시일야방성대곡의 한 구분을 살펴 봅시다. “아! 원통한지고, 아! 분한지고. 우리 2천만 동포여, 노예된 동포여! 살았는가, 죽었는가?단군.기자 이래 4천년 국민정신이 하룻밤 사이에 홀연 망하고 말 것인가. 원통하고 원통하다. 동포여! 동포여!” 외교권을 박탈당한 슬픔에 대해 통곡하는 한 지식인의 원통함이 담겨져 있습니다.
교육, 언론들과 더불어 산업을 발전시켜서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고자 하였습니다. 대표적으로 도자기를 만드는 자기회사와 출판사였던 태극서관 등이 있습니다.

대한매일신보: 일제의 침략을 비판하는 글을 실었고, 국채 보상 운동의 확산에 기여하였다(82쪽).

황성신문: 을사늑약 체결과 일제의 침략을 비판하는 시일야방성대국(이날에 목 놓아 통곡 하노라)이라는 논설을 실었다(82쪽).

일제가 파악한 국채 보상 운동 모금액 표(82쪽)


국채 보상 운동 기념비(대구광역시 중구)(82쪽)

국채보상운동내용:

1905년 일본은 화폐개혁을 합니다. 우리나라를 경제적으로 침략할 목적을 가진 것입니다. 이 사업을 진행하려면 돈이 필요한데 우리나라는 진행할 돈이 없었습니다. 일본은 강제로 사업을 진행시키면서 돈을 빌려 주었습니다. 그래도 우리나라는 일본에 빚을 지게 되었습니다.
위에서 살펴 봤듯이 국채보상운동은 “대한매일신보”에서 홍보를 하면서 전국적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어떤 홍보의 글이 실렸을까요?
지금 우리들은 정신을 새로이 하고 충의를 떨칠 때이니 국채 1300만원은 우리 대한 제국의 존망에 직결된 것입니다. 지금 국고에서는 도저히 갚을 능력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를 갚을 길이 있으니 2천만 인민들이 3개월 동안 흡연을 금지하고 그 대금으로 한 사람에게서 매달 20전씩 거둔다면 1천 3백만원을 모을 수 있습니다.(대한매일신보1907년 2월 21일)”

애국계몽운동_초등학교 사회과부도 103쪽
신민회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안창호, 양기탁 등은 비밀 단체인 신민회를 조직하였습니다.
-신민회는 나라의 힘을 기르기 위한 방법으로 교육의 강화와 산업의 발달을 주장하였습니다.
-오산 학교와 대성 학교 등을 세웠고, 민족 기업을 육성하였습니다.
-장기적인 무장 독립 투쟁을 위하여 만주에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고 독립군을 길렀습니다.


해설
일본의 남한토벌작전으로 의병들이 해외로 피신했다고 했지요. 이들은 만주등에 독립운등 지를 건설하여 독립군을 훈련시켰습니다.
신민회가 다른 단체들과 구분이 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애국계몽을 하겠다면 생겨난 단체들은 대부분 교육만을 강조 했는데, 신민회는 교육, 산업발전 뿐만 아니라 군인도 키워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독립군 기지를 만들어 무관 학교를 설립하고 독립군 사관을 양성하여 현대전에서 승리할 수 있는 강력한 독립군을 창건하였습니다.


의열투쟁
-우리민족의 저항-:일제의 침략에 참여한 사람들을 처단하려는 활동도 꾸준하게 전개되었습니다.


해외: 미국, 중국
-미국에서는 전명운과 장인환이 일제의 침략을 지지할 스티븐스를 저격하였습니다.
중국 하얼빈
-안중근은 우리나라의 침략에 앞장섰던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였습니다.

안중근(84쪽)

안중근 의사 어머니의 편지. 감옥에 있는 아들에게 보냈던 편지이다.


국내:
이재명은 을사오적을 처단하려는 목적으로 이완용을 공격하여 부상을 입혔습니다.
*을사오적: 을사늑약 체결에 앞장선 박제순 이지용 이근택 이완용 권중현을 말한다.

해설:

미국에서 전명훈과 장인환은 스티븐슨 암살을 시도했습니다. 스티븐슨은 조선은 일본의 보호를 받을 수 밖에 없는 후진적인 나라라고 말을 하며, 일본이 우리나라를 침략하는데 협조한 사람이었습니다. 국제 언론에 일본이 우리나라를 지배하는데 우호적인 입장을 밝혔습니다. 전명훈과 장인환의 총에 맞아 죽었습니다.
중국 하얼빈에서 중요한 사건이 일어 납니다.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했습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한일합방이 되는데 가장 큰 역할을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안중근은 현행범으로 체포 되었습니다.
오적 암살단이 결성되어 사철과 오기호는 을사오적 처단을 하려 했습니다. 이재명은 명동성당 앞에서 이완용을 칼로 공격했지만 죽이지는 못했습니다.


국권피탈_경술국치(1910년 8월 22일)
을사늑약(1905년; 외교권 빼앗김)- 군대해산(1907년) - 사법권과 경찰권 빼앗김(1909년, 기유각서) - 국권피탈(경술국치 1910년; 우리나라의 통치권을 빼앗고 우리나라를 식민지로 삼음.)
하지만 끈질긴 저항에도 불구하고 우리 민족은 일제에 강제로 나라를 빼앗겼습니다.(국권피탈, 1910년)
*국권피탈: 1910년 대한 제국이 일제에 강제로 통치권을 빼앗기고 식민지가 되었던 것을 말한다.

해설:

한일병합내용
일본국 황제 폐하 및 한국 황제 폐하는 양국간에 친밀한 관계를 고려하여 상호의 행복을 증진하며 동양 평화를 영구히 확보하고자 하며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한국을 일본제국에 병합함이 선책이라고 확신하고 아래 조항을 협정하였다.
1. 한국 황제 폐하는 한국 전체에 관한 모든 통치권을 완전 또는 영구히 일본 황제 폐하에게 양여한다.

하지만 이 내용들은 불법이었습니다. 고종황제는 이에 동의한 적이 없었습니다. 1910년 8월 22일 일본에 의해 나라를 빼앗겼습니다.

국권피탈 이후 일장기가 걸린 경복궁 근정전(84쪽)


작은이야기 역사_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까닭은 무엇일까?(85쪽)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는 러시아와 회담을 하려고 하얼빈 역에 도착하였다. 그는 을사늑약을 체결하고 초대 통감이 되어 우리나라를 일제의 식민지로 만드는데 앞장 섰던 일물이다.
기차에서 내린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군 의장대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때 안중근이 사람들을 밀치고 나와 이토 히로부미를 향해 총을 쏘았다. 이토 히로부미가 쓰러지는 것을 본 안중근을 품에서 태극기를 꺼내 “꼬레아 우라(대한 독립 만세)!”라고 소리 높여 외쳤다.
체포된 안중근은 투옥되었고 재판을 받았다. 안중근은 재판장과 법정에 모인 사람들에게 당당하게 말하였따.
“조선의 독립을 회복하고 동양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는 먼저 민족 최대의 적이요, 만고의 역적인 이토 히로부미를 없애야 한다는 확신을 품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목숨을 버릴 각오로 의병을 모아 일본군과 싸웠고. 이번 의거는 대한국 의군의 참모 중장 자격으로 적장 이토 히로부미를 살해한 것이지 결코 개인 자격으로 행한 행위는 아니다. 적과 싸우다가 포로가 된 나를 형사 피고인으로 취급하는 것은 부당한 행위이다.”
한중근은 1910년 2월 14일 사형 선고를 받았으며 3월 26일 뤼순 감옥에서 순국하였다.
*순국: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침.

이토히로부미를 저격하는 안중근(독립기념관)(8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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