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수업/초등학교 6학년 1학기 사회

[초등학교6학년 1학기 사회] 3. 대한민국의 발전과 오늘의 우리_1)8.15광복과 대한민국 정부수립. 두번째

지니쌤 동진이 2017. 6. 17. 23:00

[3. 대한민국의 발전과 오늘의 우리_1)8.15광복과 대한민국 정부수립. 두번째]


초등학교 6학년 1학기 교과서 3단원 첫번째 주제에 대해서...

교과서는 "8.15광복과 대한민국 수립"이라고 나와 있지만 저는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며 "8.15광복과 대한민국정부수립"이라고 쓰도록 하겠습니다.

1948년 제헌헌법에는 "우리들 대한국민은 기미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 하여" 라고 나와 있으며, 현재 대한민국 헌법 전문 에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라고 나와 있습니다. 즉 1919년 3.1운동으로 대한민국이 건립되었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헌법의 용어와 어구는 그 '어구대로' 해석 해야 하는 것이며, 논란이 되는 것이 이상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 저는 국정교과서인 초등학교 사회교과서에 유감을 표시하며, 교과서가 수정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3. 대한민국의 발전과 오늘의 우리
    1) 8.15 광복과 대한민국 정부수립
    2) 민족의 상처, 6.25전쟁
    3) 자유민주주의의 시련과 발전
    4) 경제발전과 사회.문화의 변화
    5) 대한민국의 미래와 평화평일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과정을 알아봅시다.(114쪽)

일제 강점기에 민족 지도자들은 일제를 물리치고 독립을 이루자는 같은 목적을 가지고 힘을 모았다. 그러나 8.15 광복 이후 서로 이념이 다른 미국과 소련에 의하여 국토가 나누어졌고, 민족 지도자들 사이에서도 만들고자 하는 나라에 대한 생각이 달랐다. 우리 민족의 바람과는 달리 하나의 정부를 세우는 일은 어려웠다.

38도선의 초기 모습(114쪽)

모스크바 삼국 외상회의_1945년12월(115쪽)

1945년 12월 미국, 영국, 소련 세 나라 대표는 모스크바 삼국 외상회의 를 열어 한반도 문제를 의논하였습니다.

*모스크바 삼국 외상 회의: 미국 영국 소련의 외무장관이 모스크바에 모여 한반도 문제 등을 협의한 회의.
회의내용
한반도에 민주적인 임시 정부를 수립하고, 미소 공동위원회를 설치하기로 하였습니다.
임시 정부와 미소 공동위원회 협의를 통한 신탁통치 등을 결정 하였습니다.

*신탁통치: 특정 국가가 일정 지역을 대신 다스리는 통치 체제.


해설:

모스크바 삼국 외상 회의는 1945년 12월 모스크바에서 미국, 영국, 소련의 외무장관들 모인 회의입니다. 이들은 한반도 문제에 관해 임시민주정부 수립, 미소 공동위원회 설치, 최고 5년간의 신탁통치 실시를 결정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회의 내용이 우리나라에 제대로 전해지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에 전해진 내용은 “5년간의 신탁통치”,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과 38년 분할 점령, 미국은 즉각 독립 주장”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소련은 즉각 독립을 주장하였으며, 미국이 먼저 신탁 통치를 주장하였고 그 기간도 늘리려고 하였습니다.

우리나라에 잘못 전달이 되자 좌우익 모두 이 회의 내용을 반대 합니다. 그러나 얼마 후 우니라라에 제대로된 회의 내용이 전달이 되자 좌익은 신탁통치를 찬성했으며, 우익은 신탁통치를 반대하였습니다. 좌익은 임시정부가 만들어지면 5년 후에는 완전히 독립이 된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우익이었던 김구와 이승만 등은 신탁통치를 반대하였습니다. 일제의 식민 지배에서 벗어난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이었는데, 신탁통치를 한다는 것은 식민지배의 연장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반대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 잘못 전달이 되자 좌우익 모두 이 회의 내용을 반대 합니다. 그러나 얼마 후 우니라라에 제대로된 회의 내용이 전달이 되자 좌익은 신탁통치를 찬성했으며, 우익은 신탁통치를 반대하였습니다. 좌익은 임시정부가 만들어지면 5년 후에는 완전히 독립이 된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우익이었던 김구와 이승만 등은 신탁통치를 반대하였습니다. 일제의 식민 지배에서 벗어난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이었는데, 신탁통치를 한다는 것은 식민지배의 연장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반대한 것이었습니다.

모스크바 삼국 외상 회의의 결정을 지지하는 집회(신탁찬성)_115쪽

신탁 통치를 반대하는회(115쪽)

미소공동위원회_1946년 3월(116쪽)

민주적인 임시 정부 수립과 신탁통치 문제 등을 협의하기 위하여 미소 공동위원회가 열렸습니다.
미국과 소련의 의견차이가 커서 임시정부 수립에 어려움이 생겼습니다.
미소 공동 위원회에서 우리나라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게 되자 미국은 이 문제를 국제연합에 넘겼습니다.

국제연합은 남북한이 동시에 총선거를 실시하도록 결정하고, 유엔 한국 임시 위원단을 파견하였습니다.

북한이 국제연합의 결정을 거부하자 국제연합은 남한만이라도 총선거를 실시하도록 결정하였습니다.

*국제연합(UN): 세계평화 유지와 인류복지의 향상을 목적으로 설립된 국제기구.


▲ 유엔 한국 임시 위원단 환영식(116쪽)

이승만: 통일 정부를 수립하기 어렵다면 남한만이라도 임시 정부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김구: 남한만의 총선거에 반대하였습니다. 김구는 북한을 방문하여 북한의 지도자들을 만나는 등 통일 정부를 수립하려고 노력하였으나 목적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남북연석회의: 김구가 북한을 방문했을때 열린 회의. 1948년 북한의 평양에서 열린 남한과 북한의 정치 지도자, 사회단체 대표자등이 참석한 회의.


해설

모스크바 삼국 외상회의에 따라서 1946년 3월 미소 공동위원회가 열렸습니다. 미국과 소련은 민주정부 수립에 참여할 사람들의 범위를 놓고 다투었습니다. 임시정부를 구성하기 위해서 미국은 원하는 단체들은 모두 참석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고, 소련은 모스크바 삼국 외상회의의 내용에 반대하는 단체는 참석하면 안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렇게 대립을 하였기 때문에 아무런 성과 없이 회의는 휴회하였습니다.
미소공동위원회는 1947년 5월 재개되었지만(2차회의) 역시 아무런 성과 없이 끝났습니다. 이 시기 미국대통령 트루먼이 공산주의 확산을 막는다는 원칙을 내세운 연설을 하였습니다(1947년 3월, 트루먼 독트린). 이런 배경 속에서 공산주의 국가였던 소련과 자본주의 국가였던 미국간의 회의는 성과 없이 끝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성과없이 회의가 끝나자 미국은 국제연합(유엔)에 한반도 문제를 넘겨 해결하도록 하였으며, 소련은 한반도에서 미국과 소련군대가 철수하고 한국인 스스로 정부를 수립하도록 맡기자고 주장하였습니다.
국제연합회의에 소련은 참석하지 않았으며, 소련이 불참한 가운데 미국의 제안에 따라 인구비례에 따라 총선거를 실시하는 안을 통과시켰습니다(1947년 11월). 국제연합은 한반도에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을 파견하였지만 북한과 소련은 반대하였습니다. 북한에서 반대하자 국제연합은 남한만이라도 총선거를 실시하도록 결정하였습니다(1948년2월).
하지만 김구는 남한만 단독선거를 반대하였습니다. 남한만의 단독 선거는 나라가 분단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김구는 북한에 가서 북한지도자들을 만나 분단을 막고 통일정부를 세우려고 하였지만 목적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 북한에서 열린 남북 연석 회의에 참석하여 연설하는 김구(116쪽)

참고_김구의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1948.2)
이 육신을 조국이 요구한자면 당장이라도 제단에 바치겠다. 나의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도선을 베고 쓰러질 지언정 일신에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 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


대한민국정부수립_1948년8월15일(117-118쪽)

 5.10 총선거(1948년)

남한만의 총선거가 결정되자 이에 반대하는 의견도 있었지만, 민주적 절차에 따라 제헌국회 의원을 선출하는 총선거가 실시되었습니다.

*제헌국회: 우리나라의 헌법을 제정한 초대국회.
5.10 총선거는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국회의원을 뽑은 선거였습니다.

전국 투표율이 95%가 넘을 정도로 국민의 관심이 높았습니다.

▲ 5.10 총선거(117쪽)


▲ 5.10총선거 포스터


해설

1948년 5월 10일 남한에서만 총선거가 실시되었습니다. 21세 이상의 모든 국민에게 투표권이 있으며, 우리나라 최초의 보통 선거였습니다. 김구는 단독선거를 반대하였기 때문에 선거에 출마하지 않았습니다. 5월 10일 198명의 제헌국회의원이 선출되었습니다.


제헌헌법 공포(1948년7월17일)_118쪽

1948년 5.10 총선거를 통하여 구성된 제헌 국회는 나라의 이름을 대한민국으로 정하였습니다.

7월 17일에 3.1 운동과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독립 정신을 계승한 제헌 헌법을 공포하였습니다.

<제헌헌법>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 국민은 기미 삼일 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 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민주 독립 국가를 재거함에 있어서.......

제 1조. 대한민국은 민주 공화국이다.

제 2조.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 부터 나온다.

▲ 제헌국회 개원식(117쪽)


해설

제헌 국회는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하였습니다. 그리고 1948년 7월 17일 제헌헌법을 공포하였습니다. 제헌헌법 전문에는 대한민국이 기미년 3.1 독립운동으로 수립되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국민에게 주권이 있는 민주 공화국임을 명시하였습니다.


대한민국정부수립(1948년8월15일)_118쪽

헌법에 따라 선출된 이승만 대통령은 정부를 구성하고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하였습니다.

북한은 남북한 총선거를 실시하도록 한 국제 연합의 결정을 거부하고 최고 인민 회의를 구성하였고, 1948년 9월에 북한 정권을 수립하였습니다.
1948년 12월 국제 연합은 대한민국 정부를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승인하였습니다.

▲ 대한민국 정부 수립 축하식을 보기 위해 모인 사람들


해설
초대대통령은 국회에서 선출하였으며(간선제), 초대 대통령으로는 이승만, 보통령으로는 이시영이 당선되었습니다. 이승만은 내각을 조직하고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하였습니다. 이에 북한은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수립을 선포하였습니다.
1948년 12웡 프랑스에서 열린 국제연합회의에서는 남쪽 정부만 합법 정부라는 결의안을 통과하였습니다.


작은 이야기 역사: 초등학교라는 이름은 언제부터 쓰였을까? (119쪽)

초등학교라는 이름은 갑오개혁 때 세운 소학교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소학교는 그 이후 보통학교라는 이름으로 바뀌었고, 다시 소학교로 되었다고 초등학교로 바뀌었다. 초등학교라는 말은 일제 강점기인 1941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일본에 충성하는 국민을 만든다는 의미가 있었다.
8.15 광복 이후에 초등학교라는 이름을 바꾸어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지만, 그대로 사용하다가 많은 논의 끝에 1996년에 초등학교로 이름을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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