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수업/초등학교 6학년 1학기 사회

[초등학교6학년 1학기 사회] 3. 대한민국의 발전과 오늘의 우리_2)민족의 상처, 6.25전쟁

지니쌤 동진이 2017. 6. 22. 01:19

[3. 대한민국의 발전과 오늘의 우리_2)민족의 상처, 6.25전쟁]


3. 대한민국의 발전과 오늘의 우리
    1) 8.15 광복과 대한민국 정부수립
    2) 민족의 상처, 6.25전쟁

    3) 자유민주주의의 시련과 발전
    4) 경제발전과 사회.문화의 변화
    5) 대한민국의 미래와 평화평일


전쟁의 배경(120쪽)

우리나라는 하나의 정부를 세우기 위한 민족의 기대와 노력에도 불구하고 남과 북으로 나뉘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은 한반도를 무력으로 통일하기 위하여 38도선을 넘어 남한을 침략해왔다.
6.25전쟁은 어떻게 진행되었을까? 전쟁은 사람들의 생활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120쪽)


해설:

해방이후 우리나라는 38도선을 경계로해서 미국과 소련이 분활점령하였습니다. 1948년 남한에는 단독정부가 수립되었고, 같은해 북한에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습니다. 남한에 단독정부가 수립된 후 미군은 일부 병력만 남긴 채 철수하였습니다.
1949년 중국에서는 국민당(장세스)이 공산당(마오쩌둥)에게 패배하였습니다. 이때쯤 소련은 한반도문제에 적극 개입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소련은 처음에는 북한의 전쟁계획을 반대하였습니다. 그러나 소련은 1950년 4월부터 북한에 군수물자를 지원하였으며, 북한과 중국은 군사협정을 맺었습니다.
남한과 북한은 서로 통일을 하려고 하였으며, 1949년에 38선 부근에서는 무려 874회의 무력충돌이 있었습니다.

파괴된 대동강 철교를 건너는 피란민들(120쪽)


6.25전쟁의 전개 과정을 알아봅시다.(121-122쪽)

6.25전쟁의 전개과정

1.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 3일만에 서울을 빼앗은 북한군(121쪽)



① 소련의 도움을 받아 군사력을 키운 북한은 무력으로 통일을 이루려고 전쟁을 준비하였습니다.
② 1950년 6월 25일 북한은 38도선을 넘어 갑자기 남한에 쳐들어왔습니다.
③ 전쟁이 시작되자 국군은 북한군의 공격에 맞섰지만 3일 만에 북한군에게 서울을 빼앗겼습니다.

         ▲ 서울을 빼앗은 북한군(121쪽)

해설:

1950년 6월 25일 북한은 남한을 공격하였습니다. 북한의 인민군은 일방적으로 몰아붙였으며 3일만에 서울을 점령하였습니다. 북한은 7월 말쯤에 한반도의 낙동강 일대를 제외하고 거의 전 지역을 점령하였습니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은 6월 26일 오후 3시 피난을 결정하였으며 6월 27일 새벽4시 서울역에서 출발하였습니다. 이승만은 12시 30분에 대구역에 도착하였지만 너무 멀리왔다고 생각하여 다시 대전으로 향했는데, 대전에 도착했을 때 시각은 4시30분이었습니다.

국회에서는 서울을 사수해야 한다고 결정한 후 대통령에게 보고하기 위해 경무대에 갔지만 이승만은 피난을 가고 없었습니다. 이승만은 자신은 피난길에 떠났지만 국민들에게는 국군이 서울을 지키고 있다며 거짓 방송을 하였습니다. 거짓방송으로 국민들은 피난길을 막았으면서 정작 자신은 얼마뒤 부산까지 도망을 갔습니다.

국민들의 생명에는 안중에도 없고 거짓말로 "가만히 있으라"라고 방송한 정부로인해서 더 많은 인명피해가 있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정부는 인민군이 한강을 넘어올 것을 우려하여 6월 27일밤에 한강철교를 폭파하였습니다. 이로인해 피난길을 가던 국민 약 500명이 사망하였습니다. 한강철교 폭파로 인해 국민들은 오도가도 못하게 되었습니다. 

서울을 떠나 대전 대구 부산까지 도망간 이승만은 수도를 부산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미국에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미국은 한반도에 군대를 투입하였습니다. 그리고 미국은 국제연합(UN)에 안정보장이사회(안보리)를 소집한 후 유엔의 파병을 결의하였습니다. 국제연합의 결의때 따라 16개의 나라가 한국전쟁에 군대를 파명하였습니다.


2. 국제연합의 전쟁참여, 인천상륙작전(121쪽)

① 전쟁이 일어나자 국제연합은 여러 나라로 구성된 군대를 대한민국에 파병하고 물자를 지원하였습니다.
② 국군과 국제연합은 인천 상륙작전으로 서울을 되찾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③ 38도선을 넘어 북쪽으로 향하였고 압록강에 이르러 통일을 눈앞에 두었습니다.

▲ 인천상륙작전(121쪽)

해설

국제연합은 미국을 주축으로 하여 16개 나라가 참전하였습니다. 7월 7일 유엔군 사령부가 설치되었으며 7월 14일 이승만은 한국군의 지휘권을 유엔 사령관에게 넘겼습니다.

전쟁은 북한의 인민군이 주도하고 있으며, 유엔군의 사령관 맥아더는 9월 19일 인천에서 대규모 상륙작전을 실시했습니다. 이 작전으로 인해 전세를 뒤집었습니다. 인천을 장악한 유엔군은 9월 28일 서울을 되찾았습니다.
이 여세로 10월1일에는 38도선을 돌파했습니다. (이로인해서 10월 1일이 국군의 날로 지정되었습니다.) 중국은 유엔군에 더이상 북진하지 말것을 요규하였지만 계속 진격하였으며 10월 15일에는 평양을 점령하였습니다. 그리고 10월 26일에는 중국과 경계선인 압록강과 두만강까지 치고 올라갔습니다.
국군과 유엔군이 압록강과 두만강까지 올라가자 중국은 북한이 미국제국주의자들에게 유린당하는 것을 볼 수 없다 하며 전쟁에 참여할 수 있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3.중국군의 개입 1.4후퇴(122쪽)

① 국군과 국제 연합군이 북쪽으로 전진하자 중국군이 북한을 도와 전쟁에 개입하였습니다.
② 국군과 국제연합군은 북한군과 중국군에게 밀리면서 후퇴하였습니다.
③ 국군과 국제 연합군은 서울을 빼앗겼다가 전열을 정비하여 되찾았습니다.

▲ 중국군 개입(122쪽)

해설

국국과 유엔군이 압록강과 두만강까지 올라오자 중국은 북한을 돕기위해 1950년 10월 25일 약 60만명의 중국군을 파병하였습니다.  1950년 중국군의 파병으로 인해 12월 5일 평양을 내어주었습니다.

중국군으로 인해서 남쪽으로 밀린 유엔군은 중국군이 내려오는 것을 막기 위해 대동강철교(교과서 120쪽 사진)를 폭파시켰습니다.  당시 철교위에는 수많은 피난민들이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중국군의 파병으로인해 1951년 1월 4일 다시 서울을 빼앗겼습니다.(1.4후퇴) 서울이 빼앗기자 맥아더는 만주에 원자폭탄을 투하할 것을 고려하였으며, 대만으로 하여금 중국 남쪽을 공격할 것을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세계 제3차 대전으로 확대될 것을 우려하였으며, 결국 맥아더는 유엔군 사령관에서 해임이 되었습니다.
1월 4일 서울을 빼앗겼지만 3월5일 다시 서울을 되찾았습니다. 그러나 중국군으로 인해서 오늘날의 휴전선 부근에서 더 이상 올라가지 못하고 소모적인 전투를 계속 하였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피해가 커지자 협상을 통해서 전쟁을 끝내기 위한 협상이 시작되었습니다.

4. 휴전협정(122쪽)

① 국군과 국제연합군은 북위 38도선 부근에서 북한군 중국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습니다.
② 1951년 국제 연합군은 북한군 중국군과 휴전협상을 시작하였습니다.
③ 1953년 7월 27일 대한민국 정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휴전선을 정하여 전쟁을 멈추기로 약속하는 휴전협정을 맺었습니다.


         ▲ 휴전협정(122쪽)

해설

휴전은 소련이 먼저 제안했습니다. 유엔은 이 제안을 받아들였으며 1951년 7월 유엔군대표 미국과 북한과 중국 대표가 참가한 가운데 휴전협정이 시작되었습니다. 남한은 전쟁의 당사자 였지만 전쟁 초기 한국군의 지휘권을 유엔사령부에 넘겼기 때문에 휴전협정에 참석할 수 없었습니다.
북한측은 모든 포로를 무조건 풀어주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미국은 포로들에게 석방 후 어느나라로 갈지 자유롭게 결정을 하게 해주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결국 미국이 주장한 자쥬로운 포로송환방식으로 협상을 보았으며,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체결되었습니다.


 참고: 휴전협정문 일부
한 개의 군사 분계선을 확정하고 쌍방이 이 선으로부터 2km씩 후퇴함으로써 비무장 지대를 설정한다. 한 개의 비무장 지대를 설정하여 이를 완충 지대로 함으로써 적대 행위의 재방을 초래할 수 있는 사건의 발생을 방지한다.

            ▲ 휴전협정문

우리 민족이 겪은 어려움을 알아봅시다.(123쪽)

폐허가 된 서울 시내(123쪽)

① 6.25전쟁이 시작되자 많은 사람이 살던 곳을 떠나 피란민이 되었습니다.


피란행렬(123쪽)

② 가족을 잃거나 다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산가족 찾기(124쪽)
③ 낙동강 이남으로 후퇴한 정부는 부산을 임시 수도로 정하여 나라 살림을 하고 전쟁을 치렀습니다.
④ 많은 피란민이 낙동강 이남으로 몰려들면서 낙동강 이남 지역에는 이들을 위한 천막촌과 천막학교 등이 생겨났습니다.

천막학교(123쪽)


6.25전쟁으로 인한 피해

1.경제피해(124쪽)
① 6.25전쟁으로 국토는 황폐해졌습니다.
② 건물, 도로, 철도, 다리 등 주요 시설물이 파괴되어 복구하는 데 막대한 시간과 비용이 들어갔습니다.
③ 많은 문화재가 부서지거나 사라졌습니다.

6.25 전쟁으로 파괴 된 수원 화성(124쪽)

해설

6.25전쟁으로 남북한이 입은 경제적 손실 역시 커습니다. 전쟁으로 인해 많은 곳이 불에 탔습니다. 농사에도 영향을 주어 생산량이 줄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배고픔에 시달렸습니다.

2.인명피해(124쪽)
① 군인뿐만 아니라 민간이도 많이 죽거나 다쳤습니다.
② 가족과 헤어져서 찾지 못하는 이산가족도 많았고 부모를 잃은 전쟁고아가 생겨났습니다.
③ 이산 가족 찾기 방송, 남북한 이산가족 상봉 행사와 같은 노력이 있었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가족과 헤어진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구분

사망

실종및 포로

부상

국군

137,899

32,838

450,742

국제연합군

40.670

9,931

104,280

북한국

508,797

98,599

-

중국군

148,600

25,600

798,400

표, 6.25 전쟁으로 인한 인명 피해_단위:명 (124쪽)

해설:

전쟁으로 인한 피해는 컸습니다. 약 500만명의 사상자가 있었으며 1천만명의 이산가족이 생겼습니다. 전쟁고아들이 수도 없이 많았으며 식량등이 부족하여 많은 고통을 받게 되었습니다.

전쟁으로 인해서 민간인들의 희생이 컸습니다. 남한의 국군과 유엔군 그리고 북한의 인민군에게 수많은 민간인들이 학살을 당했습니다.


▲ 영상, 숫자로보는 6.25전쟁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촬영)_아래링크 유튜브로연결

https://www.youtube.com/watch?v=ONyNh88aSqg


작은 이야기 역사. 6.25 전쟁과 관련된 지명이나 음식에는 무엇이 있을까?(125쪽)

1. 아바이 마을
함경도에서 피란 온 사람들이 강원도 속초 지역에 아바이 마을을 만들고 정착하였다. 아바이라는 말은 함경도 사투리로 아버지라는 뜻이다.
이 마을에서 함흥냉면과 아바이 순대 등 함경도 음식을 만을어 팔고 있다.


2. 백마고지
강원도 철원군에 있는 백마고지는 625 전쟁 당시 국군과 중국군이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곳이다. 이곳의 주인이 열흘간 24차례나 바뀔 정도로 치열하게 싸운 끝에 국군이 승리하였다. 이때 포탄을 심하게 맞은 땅의 모양이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마치 백마(흰말)가 쓰려져 누워 있는 모습을 닮았다 하여 백마고지라고 부르게 되었다.

▲ 백마고지 전적지

3 부대찌개
부대찌개는 625전쟁 이후 미군이 주둔한 지역을 중심으로 생겨난 음식이다. 미군 부대 근처에서 만든다고 하여 부대찌개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 부대찌개는 전쟁 후에 먹을거리가 부족해진 사람들이 미군이 먹는 햄이나 소시지 고기 등을 가져다 김치와 끓여 먹었던 데서 유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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