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수업/지니의 조선왕조실록

지니의 조선왕조실록_태조대왕실록(1)

지니쌤 동진이 2018. 12. 22. 14:25

지니의 조선왕조 실록

태조실록(1)


                     ▲ 태조대왕실록_태백산사고본캡쳐


인물소개


                  ▲ 태조 이성계


본명: 이성계(1335년_충숙왕4년~1408년_태종8년)

자: 중결

재위: 1392년~1398년

시호: 강헌지인계운성문신무대왕(康獻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

묘호: 태조 

능묘: 건원릉(健元陵)_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역성형명의 성공

 

태조 이성계는 1392년 7월 17일 수창궁에서 왕이 되었다.

이에 앞서 며칠 전(7월 12일) 공양왕은 이성계와 동맹을 하기 위해서 찾아갔었다. 이때 시중 배극렴은 왕대비를 찾아갔다. “왕은 정신이 온전치 못하고 백성의 민심도 떠났으므로 폐하기를 청합니다.” 공양왕의 폐위는 결정되었고 왕대비의 교지를 남은과 정희계가 선포했다. 공양왕은 교지를 듣고 엎드려 말했다.

“나는 임금이 되고 싶지 않았는데 신하들이 억지로 왕으로 세웠습니다. 내가 어리석고 둔한 사람입니다.” 공양왕은 눈물을 흘리며 왕위를 내려놓았고 원주로 떠났다.

대왕대비는 태조 이성계를 감록국사로 세우면서 모든 정사를 실제로 주관하게 하였다(7월 13일). 배극렴과 조준, 정도전 등은 국새롤 받들어 태조의 집에 찾아가 왕이 되기를 청했다(7월 16일). 이성계는 여러번 거절하다가 다음 날 수창궁에서 왕이 되었다.


          ▲ 공양왕의 폐위_KBS드라마 정도전


역성혁명이 성공한 것이었다. 약 500년동안 내려온 왕씨왕조는 끝이 났으며 이씨가 왕이 되었다. 하지만 실록은 이미 오래전 왕씨왕조가 폐하여 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공민왕의 아들 우왕은 신돈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실록은 왕우가 아닌 신우라고 쓰고 있다. 뿐만 아니라 공양왕은 덕이 되지 못해 왕의 자질이 되지 못한다고 쓰고 있다. 하지만 우왕과 창왕이 신돈의 자손이라는 것은 역성혁명의 정당성을 위한 기록일 뿐 사실은 아닌 것 같다.

 

당시 여러가지 개국의 조짐이 있었다 하는데 여기서 한가지만 소개하려고 한다. 태조가 꿈을 꾸었는데 한 사람이 나타나 목자(木子)가 돼지를 타고 내려와 삼한(三韓)의 강토를 바로 잡을 것이다.“라고 말을 하였다. 목자의 木아래 子를 쓰면 오얏이(李)가 되는데 이씨가 왕이 된다는 해몽이 된다. 그리고 다음날 오랜 가뭄 끝에 비가 내렸는데 백성의 마음이 기뻤다. 하지만 이비가 마냥 기쁘기만 했을까? 오래된 왕씨 왕조가 끝이난 사람들에게 이 비는 어떤 의미로 다가왔을까?

 

역성혁명을 일으킨 후 가장 견제해야할 세력은 고려왕조의 왕족들일 것이다. 이에 사헌부 대사헌 민개는 등은 왕씨의 후손들을 멀리 두기를 청했다(7월20일). 태조는 이를 받들어 나라에 공로가 있는 순흥군의 아들 왕강과 왕우와 그의 아들 조와 관을 제외하고 모두 강화도와 거제도로 보냈다.(왕강의 아들 전흥은 남양전씨의 시조가 된다.)

 

태조의 즉위교서가 내려졌다(7월 28일). 이 즉위교서에는 이성계가 왕이 된 것에 명분과, 나라의 이름은 계속해서 고려를 사용한다는 것을 포함해서 많은 내용들이 들어있는데, 눈여겨 볼 내용이 있다. 교서 안에는 우현보, 이색, 설장수 등을 폐하고 서인(庶人)으로 삼아 해상(海上)으로 옮겨 살게 해야 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즉위교서의 마지막에 짧은 논평이 쓰여져 있는데 이 교서를 정도전이 썼다는 것이다. 즉 정도전이 우현보와 원한이 있어서 이런 내용을 썼다는 것이다.

여기서 다시한번 역사는 강자의 손에 의해서 쓰여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차 왕자의 난때 역적으로 몰려서 죽임을 당한 정도전에 대해서 사사로운 감정의 소유자로 악평을 하고 있는 듯 하다.

 

왕세자는 누가되나?


새로운 왕이 세워졌으니 왕권을 위해서 세자를 세우는 일은 시급한 일이었다. 신의왕후 한씨에게 6명의 아들과 두명의 딸이 있었고, 신덕왕후 강씨에게는 2명의 아들과 딸이 1명 있었다. 이렇게 이성계에게는 8명의 아들이 있었다. 원칙대로라면 장자인 진안대군이 세자가 되어야 했지만 엉뚱한 사람이 세자가 되었다.


         ▲ 태조 이성계 가계도 


신의왕후 한씨는 이성계가 왕이 되기 전에 개성에서 죽었다. 신덕왕후 한씨의 자녀들의 뒤를 봐줄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신덕왕후 강씨는 이성계의 총애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개국공신들과도 깊은 친분이 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아들이 세자가 될 수 있었다. 신덕왕후 강씨는 첫째 아들인 방번을 세자로 세우려고 하였으나 배극렴, 조준, 정도전 등이 방번은 경솔하고 볼품이 없기 때문에 방석이 세자가 되었다.(태조1년 8월 20일)

이를 지켜 보고 있던 신의왕후 한씨의 자녀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특히 야심이 있었던 방원과 방간은 화가 치밀어 올랐을 것이다. 특히 방원은 개국을 하는데 있어서 큰 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세자의 자리에게 밀렸으니 그 속을 누가 알 수 있을까?

누가 봐도 정당해 보이지 않았던 세자 책봉은 훗날 왕자의 난이 일어나는데 한 가지 이유라고 할 수 있겠다. 태조 실록에는 방석이 세자가 된 것을 서자 방석이라고 쓰고 있다. 신덕왕후가 두 번째 부인이기는 하였지만 첩은 아니었음에도 서자라로 쓰고 있다. 이는 태종이 왕이 되면서 신덕왕후를 첩으로 격하시켰기 때문이다. (태조실록은 태종때 쓰여졌다.)

 

공신들에 대한 상

 

혁명에 성공을 했으니 공신들에 대한 상을 주었다. 1등 2등 3등 공신으로 나누어져 있으며(9월 16일), 개국공신들대 대한 칭호는 1등은 좌명개국(佐命開國), 2등은 협찬개국(協贊開國), 3등은 익대개국(翊戴開國)이라 하였다(10월 9일).

 

1등공신(좌명개국): 배극렴, 조준, 정도전, 식실봉 등 총 18명(토지150-220결, 노비15-30구)

2등공신(협찬개국): 윤호, 박포, 조영규 등 총 12명(토지100결, 노비 10구)

3등공신(익대개국): 안경공, 조영무, 심효생 등 총 17명(토지 70결, 노비7구)

이들 개국 공신들에게는 토지와 노비를 주었을 뿐만 아니라 공신 아무개의 자손이라고 자세히 써서 범죄가 있어도 사면이 영구히 이르게 하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노비에 대해서 15구, 30구 등으로 그 수를 세고 있는데, 이는 노비들이 사람으로 취급을 받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려에서 조선으로

 

밀직사 조임을 명나라로 보내 태조가 왕이된 사유를 알렸다(8월29일). 조임이 돌아온 후 국호 변경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 졌는데 1)화령, 2)조선 두가지중 하나로 국호를 정해달라는 주문을 명나라에 보냈다. 화령은 이성계의 고향이고, 조선은 단군조선에서 지은 것이다. 주문사 한상질은 명나라로 가서 조선으로 정하여 가지고 왔다. “조선의 칭호가 아름답고 또한 이것이 전래한지 오래 되었으니…하늘을 본받아 백성을 다스려 후사를 영구히 번성케 하라”는 자문서를 가지고 왔다.


                         태조실록 2년15일_국호변경_태백산사고 캡쳐


태조는 나라 이름이 바뀌었다는 교지를 내렸다(태조2년 2월 15일). “지금부터는 고려(高麗)란 나라 이름은 없애고 조선(朝鮮)의 국호를 좇아 쓰게 할 것이다.” 그리고 한상질에게 토지 50결을 주었다. 한상질의 후손 중 한명이 바로 계유정난의 공신 압구정 한명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