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수업/지니의 조선왕조실록

지니의 조선왕조실록_태조대왕실록(2)

지니쌤 동진이 2018. 12. 22. 14:54

지니의 조선왕조 실록

태조실록(2)



왕씨를 다시 육지로 불러들이다. 그러나...

 

태조 이성계는 강화와 거제로 쫓아냈던 왕씨들을 다시 육지로 돌아와 살수 있게 해 주었다.


 “하늘이 명을해서 왕이 되었으니 왕씨들도 나의 백성이다. 그들 중 능력이 있는 사람은 벼슬도 할 수 있도록 하여라(태조2년 5월 26일)”


하지만 얼마가지 않아서 큰 사단이 나고 말았다. 박위와 김가행, 박중질 등이 장님 이흥무에게 가서 점을 쳤었다. 그들이 이흥무를 찾아가 공양왕의 명운과 이성계의 명운을 물어 보았으며, 왕씨중 누구의 운이 가장 귀한가를 물어본 것이었다.

박위는 체포되어 순군옥(=의금부, 중죄인을 가두는 옥)에 갇혔다. 이흥무는 남평군 왕화의 운가 가장 귀하며, 그의 동생 영평군 왕거가 다음이라고 말을 했다고 모두 털어 놓았다(태조3년1월 16일). 김가행과 박중질의 체포명령이 떨어졌으며, 다음날 왕화와 왕거까지 모두 옥에 갇히고 말았다. 이 네명 중 “박위는 배반할 마음이 있다 하더라도 내가 높은 벼슬을 주어 후하게 대우 하였으니 역모는 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인재를 구하지 쉽지 않다”하여 복직을 시켜 주었으며 나머지 세명(김가행, 박중질, 이흥무)은 귀양을 가게 되었다. 역모사건은 이렇게 일단락 되는 듯 했으나 끝이 아니었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2권 63쪽. 


하지만 왕씨들에 대한 경계는 다시 시작되었다. 왕씨의 운이 좋아 하였으니 그냥 두고만 볼 수 없었다. 그래서 왕씨들을 제거해야 한다고 했으나 태조는 허락하지 않았다. 운이 가장 좋았던 왕화와 왕거 그리고 귀양을 가 있던 사람들을 모두 불러 대질심문을 하기도 했다(태조3년 2월 11일). 왕씨일족을 다시 섬으로 보내자 하였지만 태조는 거듭해서 허락하지 않았지만 그해 4월 왕씨 일족을 제거하는데 허락을 하였다. 결국 강화와 거제로 가는 도중 모두 물에 빠져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 왕씨 성을 더 이상 사용하지 못하게 하였으며, 어머니의 성을 따르도록 하였다. 왕씨들은 전(全), 전(田), 옥(玉), 용(龍)씨 등으로 성을 바꾸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수도를 한양으로 옮기다.

 

개성 수창궁에서 왕이 되었지만 수도를 옮기고자 하였다. 권중화는 계룡산이 좋다고 하며 도읍 지도를 바쳤다(태조2년 1월 2일). 계룡산에 궁을 짓고 있었지만 경기도 관찰사 하윤이 풍수가 좋지 않다 하여 중단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다른 장소를 찾고 있었는데 쉽지 않았다. 심지어 유한우는 개성이 낫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 도성도(都城圖)_1750년대 한양지도


우여곡절 끝에 남경(한양)으로 결정하였다. 한양은 고려시대에도 명당중에 하나였으며, 고려 숙종6년(1101년)에는 북악산 기슭에 궁궐을 짓기도 했다.(박영규, 조선왕조 실록 81쪽.참고)

새로 자리잡은 한양에 궁궐을 짓기 시작하였는데(태조3년 8월 13일), 그 궁궐이 바로 경복궁이다. 경복궁이 완성되기 한양으로 수도를 옮겼다(태조3년 10월 25일). 궁궐이 완성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한양부의 객사(客舍)를 이궁(離宮_별궁)으로 삼았다.


▲ 광화문_경복궁 정문_http://blog.daum.net/nasaro1/3


경복궁은 공사를 시작한지 1년만에 완성되었다(태조4년 9월 29일). 태조 이성계는 정도전에게 궁궐의 이름을 짓게 하였다. 정도전은 “전하와 자손께서 만년 태평의 업(業)을 누리시옵고, 사방의 신민으로 하여금 길이 보고 느끼게 하옵니다.” 라고 하며 경복궁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더불어 강녕전, 근정전 등 모든 전각의 이름을 지었으며, 남쪽 정문 이름을 정문(正門)이라고 하였다. 광화문의 원래 이름이다. 정문이란 올바른 것이 들어오고 나감을 의미하는 것으로 명령등이 치우치지 않고 바라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광화문으로 바뀐 것은 세종때 인데, 국왕의 큰 덕이 백성을 비춘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완성된 경복궁에 태조 4년 12월 29일에 태조가 들어갔다.

 

1차 왕자의 난(정도전의 난?)

 

이성계가 왕이 된 후 4년 동안 정치적으로 걸림돌이 되는 왕씨들을 제거하였고, 공신들에게 상을 주었다. 그리고 세자를 세웠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한양으로 수도를 옮기는 등 차츰 차츰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이 모든 일들이 수월하게 풀린 것은 하나도 없었다.


개국때부터 조선과 명나라는 갈등이 있었다. 명나라는 조선이 개국했지만 인장을 보내주지 않았다(인장은 태종3년 4월 8일 도착함). 명나라에서 사신으로간 이염을 구타하는 사건이 발생하였으며, 조선 사신은 명나라에 입국을 금지하였다(태조2년 8월 15일). 하지만 조선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고, 오히려 이염을 탄핵하였다(태조2년 12월 27일). 조선에서는 이를 해명하기 위해서 정안군(이방원)이 사신으로 갔는데(태조3년 6월7일), 이때부터 이방원이 명나라 황제와 가까워졌을 것으로 예상된다. 조선 사신 입국 금지령이 내려졌지만 정안군은 무사히 조선으로 돌아왔다.


몇 년 후 신덕왕후 강씨가 죽었다(태조5년 8월 13일). 세자의 든든한 버팀목이 사라진 것이었다. 하지만 세자 방석의 곁에는 공신들이 버티고 있었다. 하지만 가장큰 버팀목이었던 정도전은 명나라에서도 경계를 하고 있었다.

도선무순찰사를 하고 있던 정도전은 여진족을 경계하기 위해서 성벽을 쌓았으며, 군사 훈련하는 진법도 연구하여 훈련을 시키곤 하였는데 이를 명나라에서는 곱게 보지 않았다. 신년하례에 보내는 표문에 황제를 업신여기는 글을 썼다며 정도전을 압송하라는 답신을 보내기도 할 정도였다(태조5년 6월11일). 사사건건 조선에 딴지를 거는 명나라에 대해 정도전은 요동을 공격하고자 하였으나 조준 등이 반대를 하였다(태조5년6월14일). 정도전은 군사훈련을 시키면서 대신이 훈련을 시키는 사병들을 모두 관군에 편입키고자 하였다.

 

사병들을 관군으로 편입하는 일은 혁명을 통해 왕권을 잡았을 때 흔히 일어나는 일이다. 자신들이 사병을 통해서 왕권을 잡았듯이 각 개인이 데리고 있는 사병들은 늘 위협이 될 수 있었다. 명나라와 갈등이 있는 가운데 왕권강화와 국경을 지키기 위해서 사병을 관군으로 편입한다는 것은 확실한 명분이 되었다. 하지만 정안군(방원)입장에서는 이를 곱게 볼 리 없었다. 정도전이 왕자들이 견제한다는생각이 더 많이 들었을 것이다. 이제 정안군은 최후의 칼을 뽑아 든다.

 

태조 7년 8월 26일 정도전, 남은, 심효생 등이 처형을 당했다. 죄명은 여러 왕자들을 해치려고 모의를 하려다 발각된 것이었다. 태조 이성계의 병을 핑계로 왕자들을 불러들여 죽이고자 했지만 이를 미리 알아차린 정안군(방언)이 먼저 공격을 한 것이다. 라고 실록은 기록하고 있다. 특히 정도전은 서자 방석을 꼭세자로 삼은 사람으로 기록을 할 정도로 악한 사람으로 기록이 되어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역사는 강자가 남은자가 기록한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당시 정황을 보면 정도전은 왕자들을 죽이고자 하는 계획 같은 것은 없었다. 개국에 공을 세웠음에도 인정받지 못한 정안군 이방원의 섭섭함과 왕이 되고자 하는 야심이 합쳐서 정도전은 무고하게 처형을 받은 것으로 보여진다. 정도전과 남은 심효생을 비롯해서 신덕왕후 강씨의 아들이었던 세자 방석과 방번 역시 죽임을 당하였다. 뿐만 아니라 수많은 정치적 정적들은 모두 제거되었다. 정도전은 억울한 죽임을 당한 것으로 보인다.

 

혁명에 성공한 정안군 방원은 자신이 세자가 되지 않고 형 방과에게 양보하였다. 태조 이성계는 병으로 누워 있었고, 많은 이들이 죽임을 당한 것에 대해서 상심이 컸던 것일까? 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난지 며칠 후 세자에게 왕위를 양위하고 자신은 상왕으로 물러났다(태조7년 9월 5일).

 

이후 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났다(정조실록), 이성계는 왕자들끼리 다툼으로 인해 상실감이 컸다. 내가 이러려고 역성혁명을 일으켰나. 하는 좌괴감도 들었을 것이다. 이성계는 함흥으로 가서 시간을 보낸다. 아들 방언에게 큰 실망감이 있었던 것 같다. 방언은 왕이 된 후 아버지에게 용서를 구하며 차사를 함흥으로 보냈다. 그러나 방언이 보낸 차사들을 태조는 활로 쏴서 죽였다. 이때 생겨난 말이 함흥차사(咸興差使)라고 한다. 함흥에 가서 돌아오지 않았기에, 심부름을 시켰을 때 늦게 하거나 하지 않는 이들을 두고 하는 말이 되었다. 하지만 이는 전해지는 이야기일 뿐이다. 실제로는 태종2년(1402년) 일어난 조사의의 난이 함흥에서 일어났는데, 이는 신덕왕후 강씨에 대한 복수와 태상왕(이성계) 복위를 위한 난이었다. 함흥에서 군사의 움직임이 보이자 태종이 함흥에 사람을 보내는데 조사의 군대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게 되는데, 이 일로 함흥차사라는 말이 나오게 된 것이다. 

[링크 태종실록 참고 (http://blog.daum.net/nasaro1/236)]


그 후 평양으로 거처를 옮겼는데, 무학대사의 간곡한 청으로 다시 한양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그리고 태종8년 5월 24일 창덕궁 광연루 별전에서 승하한다.


                       ▲ 태조 건원릉_문화재청사진_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동구릉


[왕릉]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은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동구릉에 있다. 신의왕후 한씨의 제릉은 조선이 개국전에 승하 했기 때문에 개성에 자리 잡고 있다.


신덕왕후 강씨의 정릉는 현, 영국대사관쪽에 자리 잡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 했으나, 구미대사관에서 문무인석등이 나오면서 초기 위치는 구미공사관쪽으로 보고 있다. 

정릉은 태종이 왕이 되면서 푸대접을 받았다. 왕릉근처에 집을 지을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성북구로 천장(이장)하면서 릉이 아니라 묘로 격하시켰으여, 홍수로 광통교가 무너지자 릉의 병풍석 등으로 다리공사 자제로 쓰게 했다. 심지어 태조사후 신위가 종묘에 안치되지도 못했다.  그 후 현종10년(1669년)에 송시열등에 의해서 왕후의 릉으로서 대접을 받게 되었고, 종묘에 신위가 안치되었다.


[태조 이성계와 신덕왕후 강씨의 사랑이야기]

이 둘의 사랑이야기는 많은이들에게 알려져 있다.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기 전 사냥을하다 목이 말라 우물을 찾아 갔다. 한 여인이 물을 긷고 있었는데, 이성게가 물을 달라고 하였다. 그 여자는 물을 떠 주면서 버들잎을하나 띄워 주었고, 이성게가 그 이유를 묻자, "물을 급하게 마시면 채할까 해서..."라고 말을 하였다. 태조는 그 마음에 반해 훗날 결혼을 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