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수업/지니의 조선왕조실록

지니의 조선왕조실록_정종대왕실록(2)

지니쌤 동진이 2018. 12. 28. 16:03

지니의 조선왕조 실록

정종실록(2)

    

방간의 난/박포의 난_(제 2차 왕자의 난)_정종2년1월29일_1400년

 

남재가 정안군을 세자로 삼아야 한다고 말을 한 날, 태조의 넷째 아들 회안군(방간)을 토산으로 추방한 일이 벌어진다. 제 2차 왕자의 난의 주범으로 지적되어 쫓겨난 것이다.

 

위에서 말을 했듯이 정종은 후사가 없으므로 동생들 중에서 세자를 삼아야 했다. 실록은 정종의 동생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익안공 방의: 성품이 어질고 순하고, 왕이 되고자 하는 마음이 없었다.

회안공 방간: 자신이 후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으나 어리석음.

정안공 방원: 모든 경서와 이치에 통달하며, 개국이 그의 공이었다.

 

정종이 후사가 없어서 동생들 중에 세자를 삼아야 하는데, 방간은 자신이 후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동생 방원이 자신을 시기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이 공격을 받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먼저 정안공(방원)을 공격하려 하였다. 이런 속내를 이내 말하였는데 그는 좋아하지 않았다. 이내는 이 모든 것을 정안공에게 가서 말 하였다. 거사일은 그믐쯤이라고 날짜가지 전달하였다.

 

방간은 수시로 동생 정안군을 노렸다. 한번은 자신의 집으로 초청을 했지만 정안군이 몸이 아파 가지 못했고, 또 한 번은 정안군이 사냥을 가는 날 같은 장소로 가서 해치고자 하였다.

 

이에 정안군을 따르는 사람들이 먼저 공격하기를 청하였으나 그는 "골육을 해치는 것은 불의한 것이다."라고 말하며 따르지 않았다. 이화는 정안공을 억지로 끌고나와 갑옷을 입히고 비상사태에 대비를 해야한다고 하였다.

 

사람들은 방간에게도 하고자 하는 일을 멈추게 하려 하였다. 하지만 그는 사람들의 말을 듣지 않고, "내 뜻은 이미 정해 졌다."고 말을 하였다.

 

방간은 정종에게 가서 "정안공이 자신을 해치려 하므로 내가 군사를 일으키려 합니다."라고 말을 하였다. 이 말을들은 정종은 크게 화를 내며 타일렀다. "모든 일을 멈추면 내가 너를 살려주겠다."라고 하였다.

 

방간은 태상전에 사람을 보내어 정안공이 방간을 해치려 하기 때문에 먼저 군사를 일으키려 한다는 말을 전하게 하였다. 태조 이성게 역시 방간에게 화를 내며 "네가 정안(방원)과 아비가 다르냐 어미가 다느냐?" 하면서 멈추게 하였다. 하지만 방간은 멈추지 않았다.


▲ 박시백의 조선왕조 실록 2권 189쪽.

 

방간은 정안공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정종은 사람을 보내어 방간을 보내어 멈추게 하려 했으나 화살이 너무 많이 날아와 가지도 못했다. 이에 정종은 교지를 내리면서 "네가 무뢰한 무리의 꾀에 넘어간것이 분명하다. 골육을 해치고자 하는 일을 멈추어라. 멈추지 않으면 군법으로 처단하겠다."라는 교지를 내리며 방간을 막아보고자 하였으나 소용이 없었다.

 

방간과 맞서고 있는 정안공은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말 하였다. "만일 우리 형을 보거든 화살을 쏘지 말라. 어기는 자는 베겠다."

 

정안공은 난을 제압하였다. 정안공은 이숙번을 방번에게 보냈다. "형은 분명히 누군가의 꾀에 넘어간 것일 테니 난을 일으킨 이유를 물어보라." 이숙번은 방간에게 가서 이유를 물어 보았으나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거듭 물어보니 방간은 비로소 입을 열었다.

"작년 동지에 박포가 와서 정안공이 나를 보는 눈초리가 수상하다 하여 난을 일으킨 것입니다."

 

난은 제압되었다. 박포는 국문을 받고 유배를 가게 되었다. 공이 크기 때문에 죽임을 면한것이었다. 하지만 태조 이성계는 박포를 죽여야 한다고 끈임 없이 말하였고, 정종에게 왜 죽이지 않느냐고 계속해서 말하였다. 결국 박포는 사형을 받았다.

정종은 방간을 죽이지 않았으며 인산군으로 유배를 보냈다. 방원역시 마찬가지였다. 왕이 된 후에도 왕간을 죽이고자 하는 마음이 없었다. 왕의 자리를 놓고 서로 싸운 처지에 있었지만 한 아버지와 어머니의 형제라는 이유로 죽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잠깐? 박포는 왜 이런 일을 저질렀을까? 박포는 제 1차 왕자의 난때 공을 세웠는데 자신이 생각하는거 만큼 상을 받지 못한 것에 대한 서운함이 정안공에게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로인해 정안공의 경쟁자였던 방간에게 가서 거사를 준비하도록 한것이었다.

 

정안공에게 왕위를 선위하다

 

제 2차 왕자의 난이 끝나고 며칠 후 정안공은 세자로 책봉되었다(정종2년2월1일). 하윤등이 정종에게 가서 “정몽주의 난과 정도전의 난(1차왕자의 난)때 정안공이 없었다면 어찌 오늘이 있겠습니까? 정안공을 세자로 삼으로서”라고 말하였다. 정종은 이 말을 듣고 세자로 책봉하였다.

 

그해 11월 11일 세자에게 왕위를 선위한다는 교서를 내렸다. 하지만 세자(정안공)는 이를 받지 않았다. 다음날 의정부는 다시 세자를 찾아 청하였고, 11월 13일 교지를 받고 수창궁에서 즉위하였다.


▲ 수창궁에서 즉위한 태종_조선 3대왕_SBS드라마 육룡이나르사

 

정종은 2년 2개월 이라는 짧은 기간을 왕으로 있었다. 앞에서 말 했듯이 실록은 정종에 대해서 “타고난 자질이 온화하고 인자하여 공손하며 용맹과 지략이 남보다 뛰어났다. 항상 태조를 따라 출정하여 공을 세웠다.”라고 평가하고 있다. 그런데 뒷부분이 좀 찝찝하다. 왕위에 있은지 3년이고 한가하게 지내면서 봉양 받은 것이 20년이었다. 63세에 승하였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는 공정왕이라는 왕호를 받았고, 정종이라는 묘호를 받은 것은 숙종때 가서였다.

 

정종의 묘는 후릉(厚陵)이며 개성에 있다.


                      ▲ 후릉(개성)_쌍릉으로 정안왕후 김씨와 한자리에 있다.

참고: 쌍릉으로 되어 있는 묘는, 능침을 등지고 앞을 바라 보았을때, 서쪽이 왕이며, 동쪽이 왕후이다.


비하인드 실록!


정종의 아들?_(불노)

 

정종이 잠저에 있을 때 유씨(가의궁주)를 첩으로 들였다. 유씨는 대사헌 조박의 가까운친척인데 결혼을 한번 했으며, 불노라는 아들이 있었다. 조박은 유씨를 궁으로 들이고 가의옹주로 삼고 불노를 원자로 삼고자한 것이다(태조7년 11월 7일_정종의 즉위년이다.).

 

정안왕후김씨가 아들이 없기 때문에 궁인의 아들을 정종의 아들로 삼고 원자로 삼는다는 것은 불노를 세자로까지 책봉할 생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던 어느 날 불노가 도성에 나타나서 자신이 상왕(정종)의 아들이라 말 하며 다닌다. 불노는 체포 되었고 정종은 자기 아들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내 자식이 아니기 때문에 오래전 내쫓아 죽주에서 외할머니와 지내게 했다는 것이다. 불노의 외할머니는 셋째딸이(가의궁주) 반복해에게 시집을 갔고 무진년 정월에 주살을 당했는데 그해 8월에 불노가 태어났으니 상왕의 아들이 아닙니다. 그러나 유씨(柳氏)의 아우의 남편 박종주는 신년(申年)에 불노가 태어났다 했다. 두 사람의 말이 달랐다. 좌우간 이 사건은 불노를 공주에 안치하는 것으로 마무리를 지었다(1409년 태종9년10월27일).

조박은 자신의 친척을 정종의 아들이라 한 혐의로 사헌부의 건의를 받아 탄핵되었다.(1409년 태종9년 12월 1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