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수업/지니의 조선왕조실록

지니의 조선왕조실록_태종대왕실록(1)

지니쌤 동진이 2019. 12. 16. 19:11

지니의 조선왕조 실록

태종실록

 

소개

본명: 이방원(芳遠), (1367년5월16일_공민왕16년~1422년5월10일_세종4년)

자: 유덕(遺德)

재위: 1400년~1418년

시호: 성덕신공문무광효대왕(聖德神功文武光孝大王)

묘호: 태종(廟號)

능묘: 헌릉獻陵(태종과 원경왕후)쌍릉_서울 서초구 헌인릉길 36-10

링크_헌릉

http://blog.daum.net/nasaro1/239



태종 이방원의 즉위(1400년 11월)

 

정조2년 11월 11일(1400) 정조는 세자 이방원에게 선위할 뜻을 밝혔다. 판삼군부사 이무는 교서를 받들고 도승지 박성명은 국보(國寶:임금의 도장)를 받들고 인수부에 가서 올렸으나 세자(이방원)는 울면서 받지 않았다. 이방원 왕이 되고자 하는 야심이 가득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바로 받을 수 없었다. 왕이 선위를 하고자 할 때 바로 응답하지 않고 몇 번 거절 하는 것이 예의였다.

 

정조는 “내가 어려서부터 말 달리고 활 잡기를 좋아하여, 일찍이 학문을 하지 않았는데, 즉위한 이래로 혜택이 백성에게 미치지 못하고, 재앙과 변괴가 거듭 이르니, 내가 비록 조심하고 두려워하나 어찌할 수 없다. 세자는 어려서부터 배우기를 좋아하여 이치에 통달하고, 크게 공덕이 있으니, 마땅히 나를 대신하도록 하라.” 하며 교서를 내렸다.

 

좌승지 이원을 태상왕(태조 이성계)에게 보내 이방원에게 선위할 뜻을 밝혔다. 이성계의 말을 들어보면 모든 것을 체념한 듯한 느낌을 받는다.

“하라고도 할 수 없고, 하지 말라고도 할 수 없다. 이제 이미 선위하였으니 다시 무슨 말을 하겠는가!”


조선이라는 나라를 세웠지만 얼마가지 않아 왕자의 난으로 아들들이 죽임을 당했고, 서로 왕위를 놓고 다투었다. 아들들중 권력욕이 가장 컸던 이방원이 드디어 왕이 된 것이었다. 태종 이방원은 수창궁에서 즉위하였다.(1400년 11월 13일)

 

태종과 원경왕후민씨

 

태종은 중궁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실록에서는 원경왕후민씨의 투기를 문제 삼고 있다(12월19일). 투기는 후궁에 대한 문제이다. 원경왕후민씨를 왕후로 봉한 날이 태종1년 1월 11일이었다. 여기서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원경왕후가 왕후로 봉해지기도 전에 후궁을 들이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원경왕후민씨는 투기를 하였고 태종이 경연청에서 10일간 지냈다(즉위년 12월 19일). 실록에서는 중전에 대해서 굉장히 부정적이다. 태종실록을 보면 태종과 중전의 집안 사이가 좋지 않음을 볼 수 있는데, 그 때문에 중전에 대한 기록도 부정적으로 쓰여졌을 것으로 보인다. 원경왕후는 1, 2차 왕자의 난 때 도움을 주면서 남편이 왕이 되는데 큰 공을 세운 사람이다. 그리고 이때는 조선초기이다. 원경왕후민씨와 태종은 고려말에 태어난 사람들이며, 고려의 결혼 풍습이 아직 남아있을 때이다.


고려의 결혼 풍습은 남자가 여자의 집에 들어가서 살았다. 자녀가 어느 정도 클 때까지 여자의 집에서 지내는 풍습이 있었다. 이런 풍습을 보았을 때 집안에서 만큼은 여자들도 어느 정도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구조였다. 그런 것이 몸에 베어 있는 고려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왕이 되는데 힘을 보태준 자신을 멀리하고 왕이 되자마자 다른 데로 눈을 돌리다니 화가날만하다.


실제로 원경왕후는 태종이 궁인들과 가까이 하는 모습을 보고 화를 참지 못했다. 태종이 가까이한 궁인의 처소에 있는 시녀와 환관 20여명을 내치기도 했다(1년6월18일). 하지만 우리는 잘 생각해 보아야 한다. 조선시대 칠거지악중 하나로 여성의 투기가 들어있는데, 이 원인제공을 누가 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정비전(靜妃殿)의 시녀(侍女)·환관(宦官) 등 20여 인을 내쳤다. 정비(靜妃)가, 임금이 궁인(宮人)을 가까이 하므로 분개하고 노하여, 가까이 한 궁인을 힐문(詰問)하니, 임금이 노하여 내치었다.(1401년, 태종1년 6월18일)"


어쨌든 태종은 하윤, 권근등에게 명하여 3대(중국의 하, 은 주나라)이하 역대 임금의 비빈수를 조사하라 했다. 이에 그들은 태종에게 “제후(諸侯)는 한번 장가드는 데 9녀를 얻고, 경대부는 1처2첩이며, 선비는 1처1첩이니, 후계(後繼)의 자손을 넓히고 음란함을 막는 까닭입니다” 라고 보고를 했다(태종2년1월8일).


태종은 왕비를 포함해서 10명의 아내를 두었으며 12남 17녀의 자녀를 두었다.

 

[태종의 가계도]

   


태종가계도

 

공신들에게 상을 내리고 정적을 쳐내다.

 

태종의 공신들_태종1년 1월 15일(1401년)

 

태종은 공신들에게 상을 내렸다. 1등은 9명, 2등은 3명, 3등은 12명 4등은 22명이었다. 송거신을 포함하면 23명이다.

 

(1등 9명)

이저, 이거이, 하륜, 이무, 조영무, 이숙번, 민무구, 신극례, 민무질

(2등 3명)

이애(이저), 이화, 이천우

(3등 12명)

성석린, 숙, 이지란, 황거정, 윤저, 김영렬, 윤곤, 박은, 박석명, 마천목, 조희민, 유기

(4등 22명+1명)

조박, 조온, 권근, 이직, 유양, 조경, 김승주, 서익, 홍서, 윤자당, 이원, 이승상, 김정경, 서유, 이종무, 이응, 심귀령, 연사종, 한규, 김우, 문빈, 윤목, +1명 송거신

 

정종의 신하 26명을 귀양보내거나 외직으로 보냄


"상왕(정종)전하께서 전하(태종)를 세자로 삼으셨고, 작은 병이 있으셔서 전하께 왕위를 선위하셨습니다. 전하께서 천명과 민심을 어길 수 없어 왕위를 이어받으셨습니다. 상왕의 신하 김인귀등은 사사로이 이간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의 직첩(벼슬)을 거두고 먼 지방에 귀양을 보내 난의 싹을 막으소서" 라고 하였다(1401년, 태종1년2월2일).

태종은 정남진, 조진, 노필, 지청, 이지실을 제외하고 정종을 따르던 신하를 귀양을 보냈다. 귀양을 가지 않은 5인 중 지청을 제외하고 모두 외직으로 보냈다.


태종이 정종에게 양위를 받은 것이긴 하나 반강제성이 있던 것이었다. 이에 정종을 따르던 자들이상왕의 복위를 위해 난을 일으킬 수 있었기 때문에 그 전에 손을 쓴 것이다.

      

태상왕 이성계의 행보; 태종 이방원에게 섭섭한 마음을 비추다.


명나라 사신들을 만나다 

명나라 사신이 온다는 소식을 전함(1년1월21일). 사신 육옹과 임사영이 도착했다(2월 6일). 태종이 태평관에서 잔치를 베풀고 환궁하였다. 이에 사신들은 잔치에 사례를 하였다(2월 8일). 태상왕이 덕수궁(개경에 있는 궁으로 태상왕을 위해 지은 궁)에서 사신을 위해 잔치를 베풀었다.

태상왕 이성계가 사신을 따로 만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권력을 빼앗겨 힘이 없는 가운데 사신을 따로 만나 힘을 키워보려는 속셈은 아니었을까? 9일날 덕수궁에서 잔치를 베풀었던 이성계는 10일(태평관) 27일(덕수궁)에 계속해서 잔치를 베풀어 주었다.

 

이성계는 자주 외출을 했다. 금강산 소요산 오대산 보개산 등을 다녔는데, 절에서 자주 기도를 하곤 했다. 조선은 유교의 국가였으며, 정도전은 불씨잡변이라는 책을 쓰기도 했다. 조선은 불교를 탄압하며 없애려 했지만 불가능 하였다. 왕실 사람들이 불교를 가까이 했으며, 태종의 아들 효령대군은 불교를 옹호하였다. 불교를 완전히 없애지는 못했지만 이성계가 자주 외출을 하고, 절에서 기도하는 것이 좋아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태종은 이복형제들을 죽이고, 왕이 되었기 때문에 정통성을 인정받기 위해서 늘 노력하였다. 그런데 태상왕 이성계가 도성을 너무 자주 떠나 있었으니 마음이 불편했던 것이다.


회안군을 불러들이라 명하다.

태상왕 이성계는 태종에게 회간(2차왕자의 난으로 쫓겨난 이성계의 아들)을 도성으로 불러들이라 명령하다(1402년 태종2년 5월 28일). 이성계는 아버지의 명령을 어길 수 없어 화간을 불러 들이려 하지만 문부백관들이 반대한다(1402년 태종1년 5월28일). 


"회안군(懷安君)의 경진년 일은 그 본심(本心)이 아니고, 다만 박포(朴苞)에게 현혹된 것이었다. 이제 황제께서 고명(誥命)과 인신(印信)을 주시어 군신(君臣)의 분수가 이미 정하여졌으니, 무엇을 혐의할 것이 있는가? 사람을 보내어 소환하라.(태종1년 6월4일)" 라고 태종이 말 하였으나 모두 반대하였다.


그 이유는 한번 난을 일으킨 적이 있는 자가 도성에 있으면 민심이 두려워 할 것이며, 회안군은 난을 일으킬 마음이 없다 해도 그를 따르는 도당이 불의한 마음을 일으킬 수 있으니 안된다는 것이었다. 태종은 아버지 이성계의 명령을 어길 수 없었기 때문에 형제 회안군을 불러 들이려고 했으나 반대를 하였기 때문에 불러들이지 못했다.


두 아들은 죽고, 또 다른 아들은 멀리 쫓겨나 있으니 아들을 보고 싶어 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알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아버지의 명령에 따라 형 회안군을 부르고 싶은 마음을 실록에서 볼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사람들이 그들의 마음의 소리를 추측하기도 한다. 즉, 태상왕 자리로 쫓겨나 힘이하나도 없었던 이성계가 아들 태종 이방원에게 가지고 있는 불편한 마음을 표현하는 것으로 보이도 하는 것이다. 태종 역시 끊임없이 이성계에게 효를 베푸는 모습이, 아버지를 밀어내고, 이복형제를 죽인 후 왕이 되었기 때문에 정통성을 인정 받고 싶어 했다.


이성계의 마음의 소리


이성계가 소요산에 있을 때였다(1402년, 태종 2년).


태종은 박성명을 대신하여 아버지에게 인사를 드리러 보냈고(2년 1월 8일), 같은 달 28일 태종이 직접 찾아가 환궁을 요청한다.


"염불하고 불경을 읽음에 어찌 꼭 소요산이라야만 되겠습니까?"

하니, 태상왕이 말하기를,

"그대들의 뜻은 내가 이미 알고 있다. 내가 부처를 좋아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다만 두 아들과 한 사람의 사위를 위함이다."

하고, 공중에다 큰 소리로 말하기를,

"우리들도 이미 서방 정토(西方淨土)로 향하여 있다."고 하였다.

태상왕은 무인년에 병이 든 뒤로부터 마음이 항상 답답하여 즐겁지 아니하기 때문에, 유행(遊幸)이 점점 잦아졌다.(태종2년 1월 28일)


이성계가 아들 태종에 대한 마음의 소리였던 것으로 보인다. 내가 부처를 좋아하는 것을 말 하며, 두 아들과 한 사람의 사위, 즉 1차 왕자의 난 때 죽은 신덕왕후의 아들 방번과 방석 그리고 사위를 말 하고 있다. 이들을 죽인 사람이 바로 태종이었고, 태종의 앞에서 이 말을 한 것이었다. 이 말을 들은 태종은 어땠을까?



조사의의 난(1402년)




이성계는 동북면(함흥)으로 향한다(1402년, 태종2년 11월 1일). 그곳은 이성계의 고향이며 정치적인 기반이 되었던 곳이었다. 지금말로 표현하면 이성계의 표밭이었었던 곳으로 향하고 있는 것이다. 함흥으로 향하는 이성계의 행보를 알아보기 위해 태종은 환관 김완을 보냈다(11월3일). 김완은 돌아온후 이성계가 선조의 능에 참배하러 가고 계신다고 보고를 하였다. "태상 전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즉위한 이래로 조종의 능에 한번도 참배하지 못하여 일찍이 생각하고 있었는데, 지금 다행히 한가한 몸이 되었으니, 동북면에 가서 선릉에 참배한 뒤에 금강산을 유람코자 한다. 이후 도성에 들어가면 잠시도 문밖을 나서지 않겠다.(11월5일)"


그런데 바로 그날, 함흥에서 안변부사 조사의가 현비강씨(신덕왕후)의 원수를 갚기 위함이었다. 조사의는 현비강씨의 친척이었다.




우연의 일치였을까? 이성계가 오랬동안 조상의 묘에 참배하러 갈 때에, 조사의가 이성계의 계비 형비강씨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 난을 일으킨 것이다. 우연은 아니라고 본다. 함흥은 이성계의 고향이며 아직까지 이성계를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이 남아있는 곳이다.




<조사의의 난 타임라인>


11월 8일_태종이 상호군 박순을 보냈지만 피살당했다. 박순이 도순문사 박만과 주군 수령에게 ‘조사의를 따르지 말라’고 교유하다가, 마침내 저쪽 군중에 피살되었다.

11월 8일_이때 도성에서는 회안군을 제주로 유배시키자는 건의가 계속해서 올라왔다. 함흥에서의 반란에 대비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11월 9일_태종은 무학대사를 함흥으로 보내 이성계의 환궁을 요청하려 하였다.

11월10일_전 전서(판서) 이화영이 동북면에서 가족을 데리고 도망쳤다.

11월11일_김옥겸은 조사의에게 붙잡혔다 도망쳤으나, 송유는 반란군에게 피살당했다.

11월13일_조영무·이천우·김영열·이귀철 등이 출병하였다.

11월15일_권충을 경도좌우절제사로 삼아 김영열을 돕게 하였다.

11월15일_안평 부원군 이서와 중 익륜과 설오를 태상왕의 행재소에 보내다. 이들은 모두 태상왕이 좋아하던 사람들이었다. 태상왕이 보고 기뻐하기를 바란 것이다.

11월17일_민무질과 신극례가 군사를 거느리고 동북면으로 향했다.

11월18일_태상왕의 거가가 서북면 옛맹주로 향하였다. 조사의의 난이 동북을 비롯 서북면까지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11월19일_이천우가 옛 맹주로 기마유격대를 보냈으나 조사의에게 붙잡혔다.

11월20일_이천우가 탈출하였다.

11월21일_태종이 민제, 성석린, 우인렬, 최유경 등에게 도성을 지키게 하고 출병하였다.

11월24일_태종에게 보냈던 이서, 익륜, 설오가 반란군에 막혀 가지 못하고 돌아왔다.

11월25일_은주지사 송전이 이천우의 패전을 알리며, 반란군 규모을 알리다. 만명쯤 되보임. 도망하다 보니 40, 30, 20명씩 떼지어 도망하는 자가 많았다.고 알려주었다.

11월27일_반란군이 자멸하멸하였다. 조사의의 군사가 안주에 있을 때 진압군의 수에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스스로 궤멸되어 물을 건너다 얼음이 깨져 수백명이 죽었다.


김천우가 조사의에게 붙잡혔을 때 한 말로 인해서 반란군이 궤멸했다. 실록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김천우가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고 한다.

“조영무(趙英茂)는 동북면으로 향하였고, 이천우, 이빈, 김영렬, 최운해 등은 맹주에 이르렀고, 또 황주, 봉주 사이로 군사 4만여 명이 나왔는데, 여러분들은 어떻게 이를 당하려는가?”하였다. 군사들이 이 말을 듣고 모두 두려워서 얼굴빛이 변하였다. 조화가 군중에서 도망하려고 꾀하여, 밤에 군막에 불을 지르고 크게 소리치니, 군사들이 모두 놀라서 사방으로 흩어졌다.(태종2년11월27일)

 

11월 27일_같은 날 태종은 내관 노희봉을 태상왕의 행재소에 보내어 문안하였다.

11월 28일_임금이 안평 부원군 이서와 중[釋]설오에게 궁온(宮醞:술)을 가지고 태상왕의 행재소에 가서 문안하게 하였다. 태상왕 이성계가 도성으로 돌아가겠다는 뜻을 밝혔다. 12월 8일 도성으로 돌아왔다.

 

12월 2일_태종은 형 방간에게 안전을 약속하는 편지를 썼다. 조사의가 난을 일으켰을 때, 방간을 제주로 보내자는 상소가 있었지만 태종은 들어주지 않았다. 조사의의 난이 진압되었고, 방간은 자신에게도 불똥이 튈 것을 우려하고 있었을 것이다. 태종은 형 방간에게 걱정하지 말는 편지를 쓴 것이다.

 

12월 18일 난을 일으켰던 조사의, 강현, 조홍, 홍순, 김자량, 박양, 이자분, 김승, 임서균, 문중첨, 한정 등 11명이 사형을 당했다.

 

이렇게 조사의의 난은 끝이 났다.



함흥차사: "한 번 간 사람이 돌아오지 않거나 소식이 없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함흥차사는 이때 나온 것이다. 전해지는 이야기에는 이성계가 섭섭한 마음에 도성을 떠나 함흥에 가 있었는데, 이방원이 아버지의 마음을 풀어주기 위해서 차사를 보냈지만 이성계에게 죽임을 당해 돌아오지 않았다. 여러차례 반복되다가 무학대사를 보낸 수 도성으로 돌아왔다. 라고 전해진다. 그 뜻은 "한 번 간 사람이 돌아오지 않거나 소식이 없다"는 뜻으로 사용이 된다.

그러나 실제로는 조사의의 난때 한달여간 일어난 사건속에서 나온 말이다. 이성계가 함흥으로 갔고, 조사의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태종이 박순을 보냈지만 반란군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그리고 반란이 진압된 후 이서, 설오 등이 찾아가 문안을 드리고 도성으로 돌아온다.

 

수도를 한양으로 다시 옮기다

 


한양환도는 태종1년 홍길민의 건의로 시작되었다. 그는 “태상왕께서 개국때 한양으로 도읍을 정하였는데, 다시 개경으로 왔고, 종묘재향때 왕래하는 폐단도 적지 않으니 이것은 효도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전하께서는 태상왕의 뜻을 잘 이으시어 만세를 이루소서(1401년태종1년 1월14일). ”라고 간언하였다.


이성계는 조선을 건국하고 경복궁이 완성되기 전에 한양으로 수도를 옮겼다(1394년, 태조3년 10월 25일). 개경은 고려의 도읍지였기 때문에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나라를 시작하고자 한 것이었다. 그러나 정종은 수도를 다시 개경으로 옮겼다(1399년, 정종1년 2월 29일).

그후 태종은 다시 수도를 한양으로 옮기고자 논의를 하였다.(1402년, 태종2년 7월 11일). 하지만 수도를 옮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논의 끝에 세가지로 정리가 되었는데 첫째 개경에 남자. 둘째 한양으로 가자. 셋째 무악(서대문 안산쪽)으로 가자. 하윤, 김사형, 이무, 조영무 등이 도읍을 정하는 일에 대하여 의논하였는데, 해가 반나절이 되어도 결정하지 못하고 파하였다.

 

한양환도는 쉽게 결정되지 않았다. 태상왕은 한양으로 다시 돌아가기를 원하였고 그쪽에 힘을 실어 주기 위해 박석명을 불러 한양환도를 건의한다.


“처음으로 내가 한양(漢陽)에 천도(遷都)하였으니, 천사(遷徙)하는 번거로움을 내가 어찌 모르겠는가마는, 그러나 송도(松都)는 왕씨(王氏)의 구도(舊都)이니, 그대로 거주(居住)할 수는 없다. 지금 왕이 다시 이곳에 도읍(都邑)하는 것은 시조(始祖)의 뜻에 움직여 따르는 것이 아니다.(1404년 태종4년9월1일)”


이에 태종은 의정부에 “한성(漢城)은 우리 태상왕이 창건한 땅이고, 사직과 종묘가 있으니, 오래 비워 두고 거주하지 않으면, 선조의 뜻을 계승하는 효도가 아닐까 한다. 명년 겨울에는 내가 마땅히 옮겨 거주할 터이니, 응당 궁실을 수즙(修葺)하게 해야 할 것이다.”라고 명하였다(태종4년 9월1일).


하지만 경복궁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그곳은 1차 왕자의 난 때 이복 형제들을 죽인 곳이었기 때문에 피하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태종은 유한우 등에게 이궁지를 자리를 잡도록 하였다(태종4년 9월9일).

 

수도를 옮기는 것으로 결정이 난 것이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이 난 것이 아니었다. 태종의 총애를 받고 있었던 하륜은 무악으로 옮길것으로 청하였기 때문이다(1404년, 4년9월19일). 태종은 한양과 무악 중 어디로 옮길 것인지를 논의하도록 하였다(4년10월4일).

결론이 나지 않자 태종은 점을 쳐서 개경과 한양 그리고 무악 중 한군데로 가자고 했다. 태종은 척전(擲錢; 동전)을 통해서 점을 쳤다. 태종이 여러 신하들과 함께 묘당에 들어가 꿇어 앉아 이천우에게 명하여 척전하게 하였다. 결과는 신도는 2길1흉, 개경과 무악은 2흉1길이었다. 이로서 한양으로 옮기기로 결정 되었고, 태종은 “향교동(鄕校洞) 동쪽 가를 상지(相地)하여 이궁(離宮)을 짓도록”(태종4년 10월6일) 명하였다.

 

이듬해(태종5년 9월 28일) 태종은 한양환도를 하기 전 제릉(태종의 어머니 신의왕후릉)에 참배를하였다. 태상왕에게 한양 환도를 고하니, 이성계는 좋아하며 술자리를 베풀었다(10월 5일). 모두가 한양환도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사간원에서 한양으로 갈 때 백성들에게 피해가 없도록 해야한다고 하였다. 준비가 이제 다 끝이 났다. 태종을 비롯해 문무백관들은 모두 한양으로 향했다. 한양에 도착하자 제일 먼저 종묘에 들어가 참배하고 조준의 집으로 갔다. 아직 이궁이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잠시 조준의 집에서 머물기로 한 것이다(5년 10월 11일).

 

한양으로 돌아온지 얼마 되지 않다 문제가 발생하였다. 대신들이 힘없는 백성들의 집을 빼앗거나 점거하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개경에서 살다온 사람들이기 때문에 한양에는 집이 없었다. 곧 추운 겨울이 다가오고 있기 때문에 임시로 집을 빌려주기로 한 것인데 빼앗은 것이다. 사헌부에서 남의 집을 빼앗는 것을 금지하지하였다(10월 16일).

 

새 궁궐이 완성되었다(10월19일). 이궁(離宮)을 창덕궁(昌德宮)이라 하였다(10월25일).




창덛궁 인정전



참고: 창덕궁 링크

http://blog.daum.net/nasaro1/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