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궐/박물관 탐방

[서울역사박물관] 한강의 다리 사진전_나루에서 다리로

지니쌤 동진이 2018. 12. 29. 18:46

서울역사박물관

주제: 한강다리사진전_나루에서 다리로

2018년 12월 25일(화) ~ 2019년 2월 10일(일)



우리나라 수도를 가로질러 흐르는 한강은 그 폭이 1Km가 넘는다. 그 넓은 강에 다리가 없다면 정말로 불편할 것이다. 한강은 금강산 철령에서 발원한 북한강과 오대산, 속리산에서 발원한 남한강이 양수리에서 만나 서해로 흘러가는 거대한 강이다. 그 길이가 무려 약 514Km이다. 한강은 오래전부터 교통로였다. 교통로였기 때문에 많은 상인들이 오고가는 상업의 중심지였다.

한강의 남과 북을 이어주고 있는 다시는 모두 28개이다. 서울역사박물관은 이번 전시회를 통해서 한강다리에 있는 다양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서울역사박물관 기획전시관에서는 <경강 “광나루에서 양화진까지”> 라는 주제로 한강의 역사에 대해서 전시를 하고 있어서 함께 둘러보면 더 유익하리라 생각한다. (경강 전시회는 2018년 11월 9일~2019년 1월 27일까지 이다.)

http://blog.daum.net/nasaro1/202 링크를 클릭하면 연결됩니다.]

 

한강의 다리

서울에 위치한 한강의 다리는 모두 28개이다. 가장 먼저 세워진 노량진의 한강철교는 1900년대 세워진 다리이며, 28번째 다리는 강동구 암사동의 구리암사대교는 2014년에 설치가 되었다. 노량진의 한강철교와 한강인도교(1917년)가 있었다.


 한강인도교는 제 1 한강교로 불리다가 1984년 한강대교로 변경되었다. 이 곳은 정조대왕이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열기 위해서 수원화성으로 갈 때 배다리가 놓여진 곳이기도 하다. 이 지역에 설치된 노량진 기차역은 한강철교를 지나 서울로 들어오는 관문역할을 하였다.



한강철교

한강철교는 미국인 모리스에 의해서 공사가 시작되었으나(1897년 3월) 자금이 부족해 중단되었던 것을 일본에 의해 완공되었다. 원래 이 다리에는 보행로가 포함되어 있었으나 일본은 공사비 절감을 이유로 보행로를 만들지 않았다.


       ▲ 한강철교


이후 한강인도교가 세워졌는데 이 다리가 현재의 한강대교이다. 처음에는 대교[노량진-중지도(노들섬)]와 소교[중지도(노들섬)-한강로]로 나누어져 있었다. 해방이후에 제1한강교로, 1984년이후에는 한강대교로 이름이 바뀌었다.

 

한강철교와 인도교는 두 번의 수난을 당했다. 첫 번째는 1925년 7월 홍수로 인해서 인도교중 소교가 완전히 소실되었고, 한강철교역시 손상되었다. 이때 손상된 것은 1929년에 재건되었다. 그런데 다음의 수난은 가슴이 아픈 사건이다. 6.25전쟁 당시 북한군의 남하를 저지한다는 이유로 다리를 폭파시킨 것이다. 이것은 한강철교의 수난일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현대사의 비극이기도 하다. 당시 육군참모총장이었던 채병덕 폭파에 반대하자 강제로 한강너머로 보내졌으며, 그의 대리인이었던 김백일 장군이 폭파에 동의하였다. 이때 폭파로 인해 약 500-800명의 민간이과 군인이 죽고 말았다.


      ▲ 한강철교 폭파_1950년 6월 28일_정부기록사진집_북한군의 남침을 저지하기 위해 정부와 국군이 한강철교를 폭파하였다.


한강철교는 1952년에는 임시로 복구가 되었고, 1969년 6월 완전복구가 되었으며, 인도교는 1954년 미국의 원조를 받아 복구하였다.

 

광나루에서 광진교로

광나루는 서울-(경기도)광주의 교통요지이며 한양에서 남부지역으로 가는 주요교통지중 하나였다. 광나루는 강폭이 넓은 곳에 나루가 있다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곡류, 목재등의 운동로였다. 광진교(1939년)와 천호대교(1976년)이 세워진 이후로 나루터는 사라졌다.


         ▲ 광진교_1974년9월10일_천호대교 기공당시 촬용된 광진교 사진. 천호동 방면에서 광장동을 찍은 사진으로 한강종합개발사업 전에 있었던 한강 백사장이 눈에 띈다.

 

양화진에서 양화대교로

버들꽃나루, 양화도 등으로 불렸던 양화나루는 마포구 합정동 부근의 한강 북안에 있었다. 한양에서 가장 서쪽에 위치한 곳으로 강화도로 이어주는 교통요지였다. 교통량이 갈수록 많아졌고 한강대교만으로는 교통량을 수용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제2한강교(1965년_양화대교)가 세워졌다. 양화대교는 김포국제공항을 연결하는 관문의 역할을 했다. 1979년에는 8차선으로 확장 공사를 하였고, 1982년 2월에 교량상류측의 신교를 준공하였다. 그리고 그해 양화대교로 이름이 바뀌었다.


                   ▲ 한늘에서본 양화대교_1976년_광복후 우리나라 기술진에 의해 세워진 최초의 한강다리이다. 양화대교 아래쪽에 선유도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_국가기록원

 

선유도

선유도의 원래 이름은 선유봉이었다. 작은 봉우리가 있는 곳이었지만 일제강점기때 암석채위를 하면서 지금 모습이 되었다. 선유도는 서울 서남부지역에 수독물을 공급하는 정수장으로 사용되다가 2002년 4월 26일 선유도근린공원으로 문을 열면서 시민들에게 개방되었다.

 

한강진에서 한남대교로

한강진은 도성 정남에 위치해 한남동과 사평나루(신사동)을 이어주었다. 뿐만 아니라 광주를 거쳐 삼남지역으로 나가는 교통의 중심이지기도 했다. 한강 상류에서 내려오는 고추, 마늘, 감자, 고구마 등의 농산물과 목재 장작 등이 유통되었다. 이곳에 1966년 1월 19일 제3한강교(1969년 준공_한남대교)의 착공이 시작되었다.


▲ 한남대교_1971년_1970년 7월 완공된 경부고속도로와 맞물려 개통되어 고속도로와 강남 신시가지의 진입로가 되었다.


1970년 7월 7일 개통된 경부고속도로와 연결되었다. 당시에는 6차선이었지만 몇 번의 확장공사를 하였고, 현재 왕복 12차로 한강에서 가장 넓은다리로 자리 잡고 있다. 한남대교가 세워지면서 강남개발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 한남대교_1969년_교각아래 나룻베를 타고 가는 장면을 촬영한 사진이다. 이 나룻배는 한남대교가 건설되기 전까지 한남동과 신사동을 이어주었다. 


마포나루에서 마포대교로

용산강(한강과 만초천이 만나는 곳)과 한강이 합류하는 곳에 위치한 마포나루는 수상교통의 요충지로서 삼남지역에서 오는 물품들이 모이는 곳이였다. 서강과 용산이 세곡중심지였다면 마포는 어물과 상품의 중심지였다. 그러나 철도가 만들어지면서 마포의 기능은 점차 줄어들었고, 6.25전쟁이후 강화만이 막히면서 배들의 출입까지 막히게 되었다. 이로서 마포나루는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 마포대교상량식_1970년3월11일_마포와 여의도를 연결하는 마포대교 상량식이 진행되고 있는 상황을 찍은 사진이다. 1968년 2월 29일 착공해 2년 3개월 만에 완공했다.


서울대교(1970년 5월_마포대교)는 마포구 용강동-영등포구 여의도동을 잇는 다리이다. 1984년 마포대교로 이름이 바뀌었다. 올림픽대로가 개통되면서 교통량이 늘어나 1996년 왕복8차로 확장공사를 하였다.

 

여의도

여의도는 일제강점기때 비행장만 있었을 뿐 황무지였다. 1967년 개발로 인공섬이 조성되었고 섬한 가운데 국회의사당이 들어서는 등 개발이 되었다. 여의도에 서울대교(1970_마포대교), 원교대교(1981년), 서강대교(1999년)가 시워지면서 더욱더 성장하였다.

 

송파나루에서 잠실교로

송파나루는 삼전도(삼밭나루)와 함께 서울과 광주를 잇는 나루터였다. 이곳에 있었던 송파장은 한성부 소속이 아니고 광주부 소속이었기 때문에 금난전권이 미치지 않아 자유롭게 영업을 할 수 있었다. 시장 상인들에게 신고하지 않고 장사를 하는 난전을 단속할 수 있게 하는 권한을 준 것이 금난전권이다. 이는 도성 밖 10리(약4km)까지만 적용이 되었기 때문에 자유롭게 장사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 잠실대교 교각기초공사_1970년 10월 9일_잠실대교 교각은 우물통기초, 교대는 파일기초로 시공하였다.


송파나루는 1960년대 까지 송파-뚝섬을 오갈 수 있는 배가 운행되었다. 이후 강남을 개발로인해 한강을 매립하고 샛강을 정비하면서 송파나루는 사라졌다. 현재 한강 물길의 흔적은 한강을 매우가 남긴 석촌호수에서 찾아 볼 수 있고 내륙 지방에서 이어진 옛길은 잠실대교, 천호대교로 연결된다. 잠실대교(1972년7월1일)의 개통으로 잠실에 거수지역과 상업지역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잠실수중보(한강의 수위를일정하게 유지시키는 기능)도 건설되었다.

 

참고:

-잠실: 잠실 누에를치는 방이라는 의미로 지어진 이름이다. 누에를 통해서 실을 얻고, 또 옷을만들 수 있었다.

-삼전도는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 피해있던 인조대왕이 청나라 황제에게 삼배구고두례를 했던 굴욕의 역사가 있었던 곳이다. 석촌호수 옆에 삼전도비가 세워져있다.

 

뚝섬나루에서 영동대교로

뚝섬나루는 경기도 양주목에 속해 있던 곳으로 한양으로 길목이었다. 호조의 수세소(收稅所_세금을 걷는 곳)가 이곳에 있었다. 뿐만 아니라 상류에서 운송되는 목재의 집산지였고, 숯도 많이 판매가 되어 ‘숯광골’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1973년 영동대교가 들어서면서 나루의 기능을 사라졌다. 영동대교로 인해서 청담동, 삼성동에 상업중심지역과 주거지역이 발전하게 되었다.


▲ 완공된 영동대교_1973년 11월 3일_남부순환도로와 동시에 완공된 영동대교의 모습이다. 아래쪽이 남부순환도로로 이어지는 교차로이다. 


서빙고나루에서 잠수교, 반포대교로

서빙고나루는 용인으로 통하는 길이기도 했다. 빙고는 경강(한강)에서 얼음을 채위하여 보관하던 창고로 서빙고, 동빙고가 있었고, 궁월안에 내빙고(두곳)가 있었다. 서빙고와 동빙고가 있던 자리 부근에 1층 잠수교(1976년)와 2층 반포대교(1982년)가 세워졌다. 잠수교는 비가 많이와 한강이 범람하면 물에 잠기게 설계된 것이 특지이다.


▲ 준공당시 잠수교_1976년


잠수교는 ‘안보교’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 이유는 유사시 복구를 빨리 할 수 있도록 높이를 한강 둔치와 수평이 되게 만들고 다리 중간 교각도 15m로 짧게 만들었다. 개통당시에는 바지선이 다닐 수 있도록 중간 교각을 들어 올릴 수 있도록 설계되었었다. 그 후로 한강종합개발(1986년)에 따라 유람선이 다닐 수 있도록 중간부분을 아치형으로 올려 개조했다.


▲ 잠수교통제_1976년 8월 19일_서울에 내린 집중호우로 인해 잠수교가 개통이후 처음으로 침수되자 경찰이 잠수교의 차량 통행을 금지시키고 있다.


반포대교는 잠수교 위에 부설된 다리이다. 강남과 강북을 잇는 주요 교통로로 세워졌으며, 남산 3호터널을 통해 강북 도심에서 강남으로의 진입이 수월해 졌다. 뿐만 아니라 한강대교와 한남대교의 교통을 분산시켜 강남지구 개발을 촉진시켰다.

 

▲ 반포대교와 반포 주공아파트_반포대교의 건설로 도심 접근성이 향상되면서 강남 개발은 활기를 띠게 되어, 사진에서 조이는 반포 주공아파트와 같은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건설되었다._1982년.    

 

용산포구에서 원효대교로

용산은 경상도, 강원도, 경기도 지방의 조운선이 모이는 세곡의 중심지였다. 한강대교(1970년_한강철교)가 완공되어철도가 주요 교통수단으로 자리를 잡았다. 이후 포구는 사라졌다. 마포대교와 원효대교가 건설되자 교통량도 분산되면서 용산을 크게 변하게 되었다.


▲ 무료화된 원효대교_1985년2월2일_사진아래 톨게이트가 철거된 모습과 멀리 1977년 입주한 원효산호아파트를 볼 수 있다.


원효대교(1981년)는 민간투자 방식으로 세워졌으며(동아건설) 2001년까지 통행료를 받을 계획이었으나 반응이 좋지 않아 1984년 무료로 전환하였다. 성수대교 사고 이후 1997년 9월부터 공사를 하여 1998년 12월에 완료했다.

 

두모포에서 동호대교로

두모포는 동쪽에서 흘러오는 한강의 본류와 중량천이 합류되는 지점이다. 두 물이 서로 어울러진다는 의미로 ‘두못개’라고 부르기도 했다. 동빙고가 위치했던 곳이기도 한데, 이 곳에 옥수동과 압구정을 연결하는 금호대교(1984년_동호대교로 바뀜)가 세워졌다. 다리 가운데로 지하철 3호선 전철교가 지나는 복합교량이다. 나루터에는 옥수동 하이츠 아파트가 들어졌다.


▲ 동호대교와 동호로_개통직전 동호대교와 동호로 전경을 담은 사진이다. 왼쪽 상단에 보이는 아파트가 우리나라최초의 외국인 전용 공동주택인 힐탑 아파트이다._1985년 1월 1일.

 

동작진에서 동작대교로

한강남안에 있는 동작나루는 과천으로 통하는 길이었다. 이 인근의 한강을 동작강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교통의 요충지였던 동작진의 위치에 놓여진 다리가 동작대교(1984년)이다. 지하철 4호전 전철교의 복합교량이다. 한강대교와 반포대교의 교통량분산교화를 기대하며 세워졌다.

▲ 개통을 앞둔 동작대교_동작대교는 국내에서 처음으로 차량과 지하철 4호선의 이동을 고려한 병용교로 설계되었다. 전철교는 국내 최초의 랭거아치 형태를 갖추고 있으며, 아래쪽에는 강변북로가 지나가고 있다._1983년 11월 30일.


▲ 흑석동 한강변_흑석동 한강변에 정박해 있는 어선을 찍은 사진이다. 흑석동 나루터는 '동재기나루터' 라고 불렀는데 1970년까지 존재했다. '동재기'는 흑석동에서 국립현충원으로 넘어가는 강변 일대에 구릿빛이 돌고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_1969년_한치규 촬영

 

서강포구에서 서강대교로

마포에서 양화진으로 이르는 사이의 한강을 서강이라고 하였다. 서강은 용산과 더불이 황해, 전라, 충청도의 조섹곡과 경기 하류지역에서 물자를수송하는 배가 모이는 세곡운송의 중심지였다. 또한 인천으로 통하는 인천간로가 지나는 길목이었다. 그 자리에 서강대교가 세워졌다. 서강대교(1999년)는 마포대교와 원효대교의 상습적인 교통정체를 해소하고 여의도에서 신촌 및 서울도심 방향으로 진출을 쉽게 하기 위해 세워졌다. 그리고 수원 인천방향으로 이어지는 경인고속도로와도 연결이 된다.


▲ 서강대교와 국회의사당_서강대교 공사 전 현장을 담은 사진이다. 멀리 여의도에 국회의사당이 보이며 당시 아직 개발되지 않은 여의도의 모습이 담겨있다. 1980년 6월.

 

밤섬

서강대교가 관통하는 지점에 있는 섬이다. 섬 모양이 밤처럼 생겨서 붙여진 이름이다. 1967년까지 62세대가 거주하며 고기잡이와 조선업 등에 종사하였으나 여의도를 개발할 때 마포구 창천동으로 이주했다.


▲ 폭파전 밤섬 전경_1968년 2월 10일


여의도 개발당시 한강의 흐름을 좋게 하고 여의도 제방을 쌓는데 필요한 잡석 채취를 위해 1968년 2월 섬을 폭파 해체하였다. 그 결과 밤섬의 대부분은 없어지고 ‘윗 밤섬’과 ‘아랫 밤섬’으로 나누어졌다. 이후 한강 퇴적물에 의하여 나무와 풀이 우거지고 새들이 모이면서 도심속의 철새 도래지로 알려지게 되었다.


▲ 한강철교_여의도 개발당시 밤섬_1968년 3월 18일



좁은 공간에 전시가 된 사진전이지만 한강 다리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정말 짧은 시간동안 급속도로 벌전된 서울이라는 것을 다시한번 보게 된다. 불과 몇십년 전에 한강에서 고기잡이를 하였고(흑석동 고깃배), 나룻배를 타고 강남과 강북을 오고 갔다는 것(한남대교 나룻배)은 생각해보지 못한 것이었다. 전시회에서 본 사진은 아니지만 여름이면 백사장에서 뛰어놀고 수영도 즐길수 있는 곳이라 들었다(광진교 백사장).


한강을 옆에 두고 봐서 그런지 한강의 아름다움을 잘 느끼지 못하는것 같다. 특히 한강의 크기이다. 어릴적 자주 본 강이기 때문에 강이라면 당연히 한강처럼 규모가 큰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우리나라 지방만 가보더라도 한강의 규모가 얼마나 큰지 느낄 수 있고, 해외를 나라도 한강처럼 큰강은 많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전시회를 보고난 후 기획전시실에서 하고 있는 경강도 꼭 둘러보기를 바란다. 경강(한강)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좋은 자리가 될 것이다.


사진전을 보면서 발전된 서울을 모습을 보고 한가지 아쉬운 점이 있었다. 그 아쉬움은 전시회에 대한 아쉬움이 아니다. 한강개발로 인해서 살기 좋아진 것, 그리고 편리해진 것은 있지만 자연이 많이 파괴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여의도 개발을 위해 밤섬 주민들을 이주시키고 폭파를 했다는 것은 아쉬움이 남는다.


그리고 문득 우리나라 부동산문제가 생뚱맞게 떠오른다. 한강다리 건설로 인해서 강남은 발전되기 시작하였고, 강남의 땅값은 오늘날까지 하늘높은지 모르게 뛰어 오르게 되었다. 땅값이 오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다리건설등과 같은 이유로 오르는 것이다. 땅주인이 노력한 것은 없다. 도로가 생기고, 교통이 편리해지고 관공서가 생기고, 편의시설이 생기면서 땅값은 폭등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오른 땅값을 땅주인이 소유하는 것이 옳을까? 국민의 세금으로 인해서 땅값이 올랐다면 그 오른 땅값은 다시 국가를 위해 모두를 위해 사용하는 것이 옳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