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궐/박물관 탐방

[서울역사박물관]경강_광나루에서 양화진까지

지니쌤 동진이 2019. 1. 4. 19:52

[서울역사박물관] 경강(京江)_광나루에서 양화진까지

일시: 2018년 11월 9일(금) ~ 2019년 1월 17일

장소: 서울역사박물관 기획전시실


경강은 한강을 말 하는 것이다. 경강은 금강산 철령에서 시작한 북한강 물줄기와, 오대산 우수통에서 그 물줄기가 시작한 남한강 물줄기로 두물머리에서 만난다. 그 거대한 물줄기는 현재는 우리나라 수도 서울을 가로지르고 있지만 옛날에는 수도, 즉 한양의 경계였다. 한양의 남쪽에서 흐르는 경강은 서쪽으로 흘러 임진강과 만나 조강이 되고, 다시 흘러 서해바다로 나간다. 바다로 이어지는 경강은 다시 전국을 잇는 물줄기로서 뱃길의 중심지였고, 상업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뿐만 아니라 국가에 세금을 걷어 옮기는 길목이기도 했다.

본 전시회는 광나루에서 뚝섬, 한강진, 서빙고, 용산, 마포, 서강을 지나 양화진에 이르기까지.... 역사속의 경강에 대한 전시이다.


한강의 발원지와 흐름

 

조선시대 지리지에서 한강은 남한강을 일컫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한강의 발원지 역시 남한강의 발원지인 오대산 우통수로기록하고 있다.


한강, 우리나라 방언에 크다(大)를 한(漢) 이라고 하니

큰 강이라고 말 하는 것과 같은 뜻이다.

도성과 남쪽으로 10리 떨어져 있다.

강원도 10읍, 총청도 12읍, 경기 16읍의물과 만나서

경도를 두르고 서쪽으로흐러 바다로 들어간다.

[대동여지도].


           ▲한강의 발원지_금강산과 오대산, 속리산이 한강의 발원지라고 보고 있다.


또한 남한강의 물은 속리산에서도 나온다고 보았다. 속리산을 기준으로 한강과 낙동강이 나뉘는데 남쪽에서 북쪽으로 흐르는 줄기를 한강의 상류로 본것이다. 또한 금강산도 한강의 발원지로 명시하는 기록도 있다.

조선도성에서 남쪽으로 10리 되는 거리에

물이 있는데 한강이라 한다.

금강 오대 두 산에서 부터 근원을 발한 물이 합류하여

바다로 들어간다.

[신증동국여지승람].


한강의 명칭

 

삼국시대에는 아리수, 고려때는 열수 라고 불렀다. 한강 상류층인 춘천지역을 흐르는 강을 소양강, 평창을 지나는 물길은 평창강, 영월을 지나는 물길은 동강, 여주 땅을 흐르는 물길은 여강이라고 불렀다.

한양남쪽을 지나던 강은 통틀어서 경강이라고 불렀는데, 지역에 따라서 이름을 달리했었다. 용산 지역을 용산강, 마포 지역을 흐르는 강을 서강, 그리고 김포와 동진 일대를 흐르는 강을 조강이라고 불렀다. 목멱산(남산)을 끼고 도는 곳을 한강이라고 불렀었다.


경강은 수도 한양과 지방을 연결하는 교통로의 중심였다. 그 때문에 광진, 한강진, 동작진, 노량진, 양화진 등의 나루와 더불어 마포, 용산, 서강 등지의 포구도 발달했다.


경강을 '삼강'이라고 부르기도 했다(한강, 용산강, 서강). 경강 주번 상업공간이 확장되면서 '오강' '팔강' 등으로 불리기도 했다.

삼강: 한강진, 용산강, 서강

    오강: 한강진, 용산강, 서강, 마포, 망원정(양화진)

    팔강: 한강진, 용산강, 서강, 마포, 망원정(양화진), 두포모, 서빙고, 뚝섬


한양도_조선후기 실학자 위백규(1727-1798)가 저술한 <환영지>에수록된 지도이다. 경강의 각 지점의 명칭을 자세히 적어 놓았다.(오른쪽부터 도마진, 광진, 한강, 동작, 노량, 용산, 서강, 양화) 당시 한강은 도성의 남쪽인 한강진과 주변의 강을 의미하였음을 알 수 있다.



경강 주변은 풍광이 뛰어났다.  사대부들은 압구정, 소요정, 이수정 등에 별서와 정자를 세워 풍류를 즐겼다.


                          가고중료도_김석신_18세기


도성 안 사람들에게도 한강의 뱃놀이는 풍경과 풍류를 즐기는 유흥이었다.


▲정선_양화답설_눈이 내린 양화나루를 그린 것으로 예부터 절승으로 이름 높았던 양화나루의 아름다운 경치를 짐작할 수 있다.


한강은 경치가 좋기로 소문이 나서 조선을 방문한 명나라 사신들도 보고 싶어 했었다. 그렇기 때문에 명나라 사신이 오면 한강 유람을 시켜 주었다. 코스는 제정천(한강루)~양화진 잠두봉 일대였다. 왕실 코스의 제정천에서 연회를 연후 배를 타고 양화진과 잠두봉 일대를 거쳐 왕실 소요인 희우정에서 마무리 연회를 하는 것이었다.


동호와 서호

동호의 명소_독서당과 압구정 

1517년(중종12) 동호의 북단에 호당이라는 독서당이 세워졌다. 독서당은 문신들의 독서와 휴식은 물론 문예공간으로 활용되었다. 주변의 풍광과 더불어 경강의 빼어난 명소로 이름을 얻었다. 동호의 독서당은 압구정과 마주 하고 있었다. 압구정은 원래 여도도에 있었으나 한명회가 지금의 압구정으로 옮겼다(압구정은 한명회의 호이다.).

    

서호의 절경_양화진과 잠두봉

서호 일대는 잠두봉, 선유도, 양화진 등 한강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었다. 양화진의 광활한 백사장과 호수처럼 너른 강물이 이어지는 장쾌한 풍광을 만찍할 수 있어 예로부터 절경으로 손꼽혀 오던 곳이다. 잠두봉선유도는 조선초기부터 관료들이 즐겨 찾던 유연의 명소였다.

잠두봉은 현재 절두산순교기념관이 위치한 합정동의 20미터 높이의 암벽이다. 절벽위에 평탄한 공간이 있어 경치를 즐기기 안성맞춤이었다. 사대부들과 중국 사신들이 배를 타고 유람하던 장소이며 계회도 의 주요 배경 중 하나였다.



계회도: 관료들의 모임을 그린 그림


경강, 상업지역으로 성장

 

경강은 전국을 연결하는 뱃길의 중심지로서 국가 조세곡 운송의 종착지였다. 수로와 육로가 만나는 경강의 여러 나루들은 자연스럽게 상품 교육의 중심지로 떠올랐다.

17세기 후반 대동법이 삼남지역까지 확대시행되자 한양의 상업체계는 크게 변모했다. 경강은 최대의 소비도시였던 한양을 끼고 있었기 때문에 상업지역으로 성장했다.

 

돌아보건데 지금 생성과 미곡을 싣고 경강에 모여드는

러 지역의 상선이  1년에 1만척을 해아릴정도였다.

비변사 등록 206책_순조 17년 3월 25


                  ▲세곡을 운반하는 배_유운홍(조선후기 도화서 화원)


19세기 초 전국 각지에서 경강에 모여드는 상선의 수는 한 해에 1만척 이상이었다. 겨울철 강이 얼어 선박이 운항하지 못할 때를 제외한다면 매일 50척 내외가 경강을 오르내린 것이다.


한강으로 모이는 조운과 조창

 

조운이란 지방의 군현에서 거두어 들인 세곡을 국가가 설치한 조창에 모아 두었다가 해로나 수로를 통하여 수도에 있는 경창으로 운송하는 체제를 발한다.

지방의 세곡을 모아두는 창고를 조창이라고 한다. 조창은 그 지방의 유통 중심지에 설치되었다. 북한강, 남한강의 물줄기를 포함여 해안 지역에도 한양으로 연결되는 조창이 있었다.

한강 연안에는 충주의 가흥창, 원주의 흥원창, 춘천의 소양강창 등 3개소가 있어서 한강을 경유하여 경창으로 수송하였다.

 

조운하는 배가 통하고 사방의 이수가 균등하니

백성들에게도 편리할 것이다.

태조실록 태조3년 8월 13일


조선시대의 교통은 한양을 중심으로 도로가 연결되는 체계였다. 한양의 성문에서 전국의 교통로라 시작되고, 한양 남쪽 지방으로 향하는 길은 한강을 건너야 했다. 도로의 최종 종착지는 서북쪽은 의주, 동북쪽은 함북 경흥 서수라, 동해안의 평해, 남해안의 동래, 통영, 제주, 서해안의 충청수영, 강화 등이 었다.


경강상인의 활동


경강상업을 주도한 경강상인은 다양한 모습으로 활동했다.

경강여객주인_지방에서 올라온 선상들에게 숙박, 음식을 제공하고 상품의 매매까지 중개.

경강선상층_지역적 가격 차이를 이용하여 유통을 전개.

조선업자_조세곡 운송을 담당하는 경강선인 선박 건조를 담당.

장빙업자_경강주변에서 하역운수업을 하거나 사빙고에 얼음을 저장했다가 판매.


이들의 활동을 통해 경강은 전국적 시장의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경강 상업의 발전은 한양을 상업도시로 변화시킨 가장 중요한 동력이었다.


경상상인의 성장

 

경강 여객주인은 여객주인권을 기반으로 각 지역의 선상들이 싣고 오는 상품들에 대한 독점적 판매권을 장악하여 막대한 이익을 취했다. 여객주인들이 물건을 대신 팔아 주는 거간 역할을 겸하여 수수료(구문)을 받았기 때문이다. 19세기 이후 역개 주인층은 봉건 권력과 결탁을 하면서 상품의 유통 시기와 양, 가격까지 조정할 수 있는 도고상인으로 성장하였다.


또한 경강의 뱃사람들은 조선술과 항해술의 발전도 주도하였다. 대동법의 시행으로 운송량이 늘어나만서 많은 이익을 남길 수 있었다.


 ▲상인들이 사용한 물건_주판, 산가지, 산통


쌀값의 폭등

경강상인들이 상품의 유통을 장악하면서 가격을 조정하는 위치로 성장하였다. 쌀이 전국에서 몰려왔기 때문에 쌀값이 떨어졌다. 마포의 한 여객 주인은 쌀을 감추고 유통시키지 않았다. 심지어 쌀집에 장사를 하지 못하도록 문을 닫게 하기도 했다.  쌀이 유통되지 않자 쌀값은 폭등하게 되었다.

이로인해 폭동이 일어났다. 경강으로 달려간 사람들은 쌀읍 감추어둔 집에 불을 질렀다(15채가 불탐).  조정에서는 근본원인이 근본원인이 매점행위에 있다고 보고 동막 여객주인 김재순 미전인 정종근 등을 노량진 백사장에서 효수 하였다.


효수(梟首)_예전에, 죄인의 목을 베어 높은 곳에 매달아 놓는 형벌을 이르던 말

 


경강상인들은 상품 유통을 장악함으로써 서울에서 소비되는 각종 품의 출하 시기와 가격을 조정하는 위치로 성장하였다. 전국의 상권으로 활동했던 경강상인들은 시세 차익을통해 이익을 얻었다.

여액주인이 사상도고로 성장하여 시전상인을 능가하는 자본력과 조직력을 가졌음을 보여주는 사례가 바로 1833년(순조33) 서울의 '쌀 폭등'이었다. 마포의 한 여객 주인이 시장에 쌀이 유통되지 않게 하지 쌀값이 폭등하였고,. 빈민층이 대규모 폭동을 일으킨 사건이었다.

 

도성민의 휴척은 오로지 쌀값의 귀천에 달려있다.

비변사등록_정조2년12월28일


 휴척(休戚)_기뻐하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하는 일  더보기


경강상인들은 전국의 곡물가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차이를 이용해서 무려 10배가 넘는 이익을 보기도 하였다. 이로인한 모든 피해는 하층민 사람들이었다.


경강의 사람들

강민

조선후기 한성부 경강 사람들의 부르는 방식을 보면 사회적으로 무시를 받았던 흔적이 보인다. 한양의 사람과 지방의 사람을 부를 때, 한양사람은 경민, 시골사람은 향민으로 불렀었다. 그런데 경민이라는 말은 강가에 살고 있는 강민과 구분을 할 때 사용하기도 했다.


강민들은 자신의 경제권이 침탈받지 않도록 소송을 자주 걸었는데 소송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모리배 라는 인식을 주었다. 이들은 경제권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강사람으로서의 대우를 받는 것이 아니라 '강가에 사는 놈'이라는 천시를 받았다.

 

경강지역의 경제와 소비생활

경강지역은 유교적 명분과 신분적 질서가 지배하는 도성 안과 달이 근대적인 경제원리가 작동하는 공간이었다. 경강에 거주하던 사람들들은 주로 어부이거나 선운업자, 여객주인업으로 막대한 부를 축척하여, 상당한 위세를 가지고 경강 지역을 지배했다.


반면에 지방에서 이주한 빈민들은 주로 세곡의 하역운송업을 통해 생계를 유지했다 .이들은 화물을 내리고 창고까지 옮기는 댓가로 한바리당 2전씩 받았다. 이들 대부분은 '하루 일하지 않으면 사흘 먹을 것을 잃어버리는'품팔이 노동자였다.


서울은 장인바치와 장시치들이 모이는 곳이다.

뭇 거리할수 있는 물품은 그가게들이 별처럼 벌여 있고 바둑판처럼 펼쳐 있다.

남에게 손과 손가락을 파는 사람이 있고,

어깨와 등을 파는 사람도 있고,

뒷간 치는 사람도 있고,

칼을 갈아서 소 잡는 사람도 있고,

얼굴을 꾸며 몸을 파는 사람도 있으니

세상에서 사고 파는 것이 이처럼 극도에 달하고 있다.

(담정총서)



▲상인들이 사용한 물건_추와 저울


▲상인들이 사용한 물건_영조척, 표백척


▲상인들이 사용한 물건_양을 재는 단위_되, 말, 홉


상업과 생활을 중심

경강에는 포구와 나루, 섬을 중심으로 마을이 생겨났고, 각 마을 주민들은 서로 다른 영업을 통해 생계를 이어갔다.


한양으로 들어오는 입구

광나루, 송파진, 삼전도


광나루와 송파진은 항강 상류에서 한양으로 들어오는 입구였다. 광나루(광진)는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강폭이 넓은 나루였으며, 경강의 상류이자 동쪽에 위치했기 때문에 한양과 지방을 왕래하는 요지였다.


▲광진, 송파진, 삼전도 위치


병자호란 이후 왕래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특히 송파장은 18세기 후반 유통의 거점으로 성장했다. 특히 이곳은 한성부 소속이 아니라 광주부 소속이었기 때문에 난전이 미치지 않았으므로 사상들이 자유롭게 영업을 할 수 있었다.


금난전권_시장 상인들에게 신고하지 않고 장사를 하는 난전을 단속할 수 있게 하는 권한을 준것이 금난전권이다. 이는 도성 밖 10리(약4km)까지만 적용이 되었기 때문에 자유롭게 장사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송파나루에서 강을 따라 서쪽으로 가다보면 삼밭나루인 삼전도가 나온다. 삼전도에서는 게가 많이 잡혀서 어공으로 해마다 5천마리를바치기도 했다.


송파장_산대놀이

송파장은 조선후기 전국에서 가장 큰 15곳의 장 중 하나였다. 당시 객주 270여개가 있었고 임금님에게 진상하는 꿀단지도 송파장을 거친다"라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번성했다. 송파장은 18세기 후반 시전상인 체제를 흔드는 유통거점으로 성장하였다.


                      ▲산대놀이


송파장은 산대놀이도 유명했다. 이 지역 산대놀이의 후원자들은 대부분 광주와 송파와 양주 누원의 부상대고인들이었다. 송파사내놀이와 줄광대놀이는 여러 사람들이 볼 수 있는 놀이로 손님을끌어 모으는 기능을 하였다. 유흥이 상업화 되면서 번성한 시장에서 활동되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부상대고(富商大賈)_큰 자본을 가지고 대규모로 장사를 하는 상인


목재 상업의 중심지

똑섬 두모포

 

뚝섬은 두모포의 상류에 있었고, 한자로는 독도라고 쓴다. 두모포는 한성부 관할안에서 가장 동쪽에 있던 나루였다. 한강과 중량천, 두 물이 만나는 곳이므로 '두물개', '두뭇개' 라고도 불리었다. 뚝섬은 한상 상류에서 내려오는 목재의 집산지였으며, 숯의 판매도 활발하여 '숯광골'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독도, 두모포 위치


도성에서는 산림벌채가 금지되었기 때문에 집을 짓거나 가구를 만드는데 사용하는 목재들은 강원도 등지에서 벌목하여 한양으로 운반해 왔다.



독도 혹은 독백이라고 하는데 두모포의 상류이다.

강변에 예전에는 호조의 수세소가 있었다.

효종 병신년에 설치하였는데 무릇 각종 목물이 물 상류에서 내려오는 것은

공사를 막론하는 10분의 1의 세를 받았다.

(대동여지비고 2권 한성부.)

 

가래나무판과 피나무판을 도내(강원도) 인재 땅에서 사들여서

작벌하여 얼음이 얼기 전에 경강에 도착하도록 한다.

(영건일감 을축 9월 강원도.)


이 지역 사람들은 사회 모순에 대해 연대의식을 가지고 집단 대응을 하기도 했다. 철종대에 뚝섬 거주민 수백명과 포교의 횡포에 항거한 기록이 있다. 포교들은 치안을 위해 순찰을 한다고 라면서 강민 하층민들을 도둑으로 몰아세우거나 능멸하였다. 1851년 고덕칠을 도둑으로 몰아세우자, 잡혀있는 고덕칠을 데리고 오기위해 강민 수백명이 포교에 항거하며 폭동을 일으켰었다.



삼남으로 가는 길

한강진, 동작진, 노량진

 

한강진은 광주(경기도)로 건너가는 나루터였다. 뿐만 아니라 서울의 물화가 삼남으로 나가는 중요한 통로였다.


                 ▲노량진, 동작진, 한강진 위치


동작진과 노량진은 과천과 시흥을 거쳐 수원으로 연결되었고, 수원을 지나 삼남(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방향으로 연결되는 교통의 요지였다.


한강_기우제가 행해지던 곳

한강은 용신이 머무는 곳이라 생각을 했었다. 그래서 국가적인 기우제가 행해지던 장소였다. 


기우제는 한강(한강진_, 요안강, 저자도 양진(광진)등 여러 곳에서 행해졌다. 비가 올 때 까지 총 12차례를 지냈는데, 1차에서 5차까지 제사를 지낸 후 비가 오지 않으면 12차에서 다섯방위에 흙으로 용의 형상을 만들고 제사를 지내는 오방토룡제를 지냈다.

저자도와 용산강에서는 주로 용의 그림을 그려 놓고 기우제를 지냈고(화룡제), 용산강에는 백룡, 저자도에는 청룡을 그렸다. 한강진과 양진에서 기우제를 지낼 때는 호랑이 머리를 강물에 던지는 침호두를 거행했다. '용호상박'이라는 말이 있듯이 용이 머물고 있는 한강에 호랑이를 던지면 용을 자극하고 흥분시킬 것이라는 신앙이 있었다.



                        ▲조선후기 국행 기우제 12제차의 장소

▲경강 기우제 제단_우사단_우단이라도고 하여 지우제를 위한 제단이다. 남단_풍우뇌우단이며, 풍백, 운사, 뇌사, 우사를 모시는 단이다.


노량진_정조가 배다리를 놓았던 곳

노량진은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가 묻힌 수원 화성으로 행차할 때 배다리(주교)가 놓인 곳이었다. 일년에 두 차례씩 수원화성에 갔다. 노량진은 양쪽 언덕이 높고 수심이 깊을 뿐만 아니라 유속이 빠르지 않고, 강폭이 좁아서 배다리를 놓기에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정조는 1789년 '주교사'를 설치하였다. 1795년 어머니혜경궁 홍시의 회갑을 기념하기 위한 대규모 화성행차를 거행하였다. 이때 노량진에 설치했던 주교의 구체적인 모습이 [원행을묘정리의궤]와 [화성원행도병]에 자세히 남겨져 있다.


      ▲원행을묘의괘


주교를 설치할 때에는 경강상인의 배를 사용하였다. 정조는 이때 참여한 상인들에게는 삼남의 세곡 운반과 해서의 소금을 운반하는 이권을 넘겨 주었다. 이를 통해 경강상인들은 세곡 운송권을 안정적으로 바장 받았고 이 과정에서 이익을 축적하였다.






노량진_군사훈련장

노량진 주변의 넓은 백사장은 1만 명 이상의 대규모 부대가 훈련을 할 수 있었다. 


훈련도감, 금위영, 이영청은 진법 훈련이 습진을 정기적으로 실시하였는데, 조선 후기에는 국왕의 참관 하에 훈련을 하는 의식을 자주 가졌다.


황포돛배
전통 한선 기법으로 제작된 황포 돛배

한선은 한반도에 정착한 모든 유형의 선박으로 크게 바닷배강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바닷배에는 세곡을 운반하는 조운선이 있고, 배의 형태는 유선형이머 깊이기 깊다.

이와 달리 강배는 밑바닥이 평평한 평저선으로 강에서는 여울이나 암초가 위협 요소였기 때문에 이와 충돌하지 않기 위해 뱃전이 낮다. 적제량이 적었기 때문에 배의 길이가 바닷배보다 길게 만들었다.


▲황포돛배_실제크기의 1:07로 축소하여, 9m의 길이로 제작한것이다.


황포돛배는 평지선으로 쌀, 뗄감, 소금 등을 싣고 경강의 물줄기를 오르내렸다. 배는 잘 건소된 소나무, 전나무, 낙엽송 으로 만들었고 옷칠로 내구성을 더했다. 황포 돛배의 크기는 큰것은 길이가 19미터, 너비가 3.5미터 정도 였고 50kg의소금을 100석까지 실을 수 있었다. 작은 황포돗배는 길이가 13~15미터 정도였다.


상품의 유통 중심지
마포


마포는 수심이 깊고 강물의 유속이 일정하기 때문에 상품 유통의 중심지로 번성할 수 있었다. 일몰때가 되면 서해에서 한강을 따라 오라온 바닷물이 마포부근까지 들어와 수심이 깊어졌다. 마포 남쪽의 밤섬은 바람을 막아주고 여울이 없어서 유속이 일정했다. 이런 이유로 큰 배가 정박하여 유통하는게 유리하였다.



         ▲마포 위치


뿐만 아니라 마포는 서해안과 한강 상류지역을 연결하는 교툥의 요지였다. 전국의 어물과 삼남 지역의 미곡, 한강 상류 지역의 나무 등을 실은배가 마포로 몰려들었다. 특히 서해의 어물이 들어와 생선, 건어물, 젓갈, 소금 등의 해산물이 집하되는 곳으로 유명했다.


조선후기에 많이 소배되었던 어류는 조기, 청어, 명태, 대구 멸치 등이었다. 서해안의 대표적인 어류는 조기였고, 동해안의 대표적인 어류는 명태였다. 조기는 전라도 영광과 황해도 연평 바다에서 많이 잡혔는데, 황해도에서 잡힌 조기의 경우 병어선을 통해 마포로 유통되었다. 동해안에서 많이 잡혔던 명태는 북어의 형태로 싼 가격에 전국으로 유통되었다. 전국의 어물선상들은 마포로 모였다.


선박에 실은 모든 어물은 어물전에만 판매해야 했는데 만약 그러지 못한 경우 난전율로 처벌을 받았다. 그러므로 흥정이 맞지 않더라도 다른 상인에게 판매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팔지 못하면 썩어서 큰 손해를 볼 수 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1754년 바른 생선과 절인생선의 경우 3일안에 생선은 1일안에 어물건과 거래가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선상이 임의로 판매해도 난전율로 처벌하지 않는 법을 제정하였다. 나아가 1794년에 어물전의 금난전권을 해제하였다.


넉넉한 객주
마포는 경강 여객주인의 최초 영업지였다. 여객 주인은 숙식제공뿐 아니라 상품 보관, 매매중계, 위탁매매, 금융업 등을 하면서 그 대가로 구문(수수료)를 받았다.

뿐만 아니라 뱃길의 안녕을 기원하는 당주, 유흥을 즐길 수 있는 색주가 들어서면서 활력과 부가 넘쳐났다. 그래서 마포 삼주(객주, 당주, 색주)라고 불렀다.


마포 염해전

소금과 젓갈의 판매는 조선초기부터 마포 일대 강민들의 생업이었다. 이 일대에는 소금 창고(염창)와 독을만드는 곳(동막)이 있어 소금과 독을 배에 싣고 서해로 가서 잡은 새우를 바로 절이기도 하고 마포에서 새우젓을 담그기도 하였다.

한양의 소금 수요량이 많아지면서 서울과 경강 일대에는 새로운 염전인 마포 염전, 경염전, 마포 염해전 등이 신설되었다.


소금 상인들의 유통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면서 17세기 중반 서울의 소금 유통을 둘러싸고 상권 및 운영권 경쟁이 벌어졌다.

 

마포염해전 운영권 소송

1769년 마포 염해전을 운영하던 마포 지역의 강민들은 3650냥의 빚을 갚기 위해 성균관 반인들에게 염해전의 독점 유통권을 팔았다. 그리고 12년이 지난 1781년 마포 강민들은 평시서에서 소장을 제출하여 염해전의 운영권을 돌려줄 것을 요청하였고 승소하게 된다. 그러나 반인들 역시 염해전에서 나오는 이익이 컸기 때문에 돌려줄 수 없다며 거부하였다. 1781년 부터 시작된 염해전 운영권을 둘러싼 분쟁은 판결이 번복되면서 명확하게 결론나지 못했다. 결국 1788년 형조에서 최후 판결을 통해 강민들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리고 호조와 균역철에서 6000냥을 성균관 반인들에게 먼저 지급하여 염해전을 돌려주도록 하고 마포 강민으로 하여금 매년 1200냥씩 상환하도록 하였다. 이를통해 당시 염해전의 이익이 1년에 1200냥 이상이었음을 파악할 수 있다.



조세곡의 집산지
용산


용산은 경상도 강원도 충청도 경기도 지방의 세곡선이 모이는 물류 중심지였다. 용산은 고개를 넘지 안호 도성을 갈 수 있는 최단거리에 위치 했기 때문에 지리적으로 좋은 위치였다. 뿐만 아니라 산줄기가 만초천을 따라 강변까지 이어져 있어 산자락에 창고를 지으면 홍수로 인한 범람에서 안전하였다. 군인에게 급료를 나누어 주는 별영창고, 호조와 원역의 급료를 보관하는 군자감별고, 선혜청에서 대동미를 수납하 만리창 등이 있었다. 


세곡선(稅穀船) _나라에 바치는 곡식을 실어나르던 배.



                   ▲용산 위치


용산에는 세곡을보관하는 창고가 많아서 물품을 운송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 많았다. 


▲한성전도_서울 도성안의 주변 지역을 그린 지도이다. 경강의 각 나루와 포구가 표시되어 있으며 경강을 따라 많은 배들이 오가고 있다. 용산과 서강에는 여러 척의 선박과 가옥이 그려져 있어 당시 큰 포구 였음을 알 수 있다.


용산 청암의 별영과 읍청루

용산 청암 언덕에는 별영과 그 누각인 읍청루가 있었다. 읍청루에서 바라보면 용산, 마포 그리고 행주 방면의 풍광까지 시야에 들왔는데 그 풍경이 아름다웠기 때문에 경강에서 제일가는 누각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청암의 별영은 용산과 마포의 경계에 있어서 마포로 인식하기도 하였다.

읍청루는 조선말기에 이르러 세관 감시소가 되었고, 그 후 총세무사이던 영국인 브라운의 별장이 되었다가 일제강검지에는 조선 총독부 정무총감의 별장으로 쓰이기도 했다.


별영은 마포에 있는데, 현종 14년에 세웠다.

선조 병신년에 훈련도감 군사들에게

급료를 주는 곳으로 설치했다고도 한다.

읍청루가 있는데 강을 임해 있어 명승지라고 칭한다.
동국여지비고 1권 무직공서





수하지역,
아랫강 상권의 번성


용산, 마포, 서강이 상업 포구로 번성한 까닭은 이들 포구가 조류가 미치는 최상류 지역에 위치했기 때문이다. 경강의 뱃길은 조류의 도달 지점을 기준으로 수상과 수하로 구분된다.


조선전기 수상 수하의 경계는 두모포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한강의 퇴적이 심화되어 18세기 중엽에는 한강진 이상으로 조류가 올라오지 못했다.

수하 지역의 주요 교역품은 미곡과 소금 젓갈 어물 등의 수산물이었다. 반면 수상 지역은 강원도 내륙지방의 물산이 공급되었다. 


수하지역(아랫강 상권)_용산, 서강, 마포, 합정_바다에서 조류가 올라오는 지역으로 밀물과 썰물이 주기적으로 반복됨. 밑바닥이 넓은 배를 이용하였다.

수상지역(윗상 상권)_서빙고, 두모포, 뚝섬, 조류가 통과하지 않는 지역으로 암초가 많고 물살이 샘. 밑바닥이 좁고 긴 배를 사용하였다.


얼음창고
동빙고, 서빙고


빙고는 경강에서 채취한 얼음을 보관하는 창고이다. 조선시대 관청에 소속된 빙고는 동빙고, 서빙고와 궁궐안의 내빙고 두 곳 등 총 네곳이었다. 동빙고는 두모포, 서빙고는 둔지산에 있었다.



                    ▲동빙고, 서빙고 위치


조선 후기 네 곳의 관영 빙고에서 저장한 얼음은 대체로 두계가 4촌 이상의 것으로 20만 정 내외(1정 18.75kg, 약 3750톤)정도였다. 한강은 1년에 80일 정도 얼었다.


저장현황(1808년)
내빙고: 4만정
동빙고: 1만 244정
서빙고: 134,974정
합계 185,218정


동빙고는 국가 제사용 얼음을 저장하는 곳이었기 때문에 그 품질이 서빙고보다 좋았다.

서빙고는 왕실 뿐만 아니라 문무백관 일반 백성들까지도 나누어 줄 얼음을 보관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규모는 동빙고보다 12배나 컸다.

얼음채취는 경강 주민에게 부역으로 부과하였다(장빙역). 얼음을 채취하는 채빙공과 빙고에 저장하는 저장공은 기술이 필요했기 때문에 숙련 노동자를 고용했지만, 운반은 품팔이 노동자가 하였다. 장빙업은 빈민들이 겨울철에도 살아갈 수 있는 일거리를 제공한 셈이다.


빙고에서 얼음을 저장하는 방법
빙고는 강기슭을 파서 지하실을 만든다. 그후 지상에 지붕만 설치한다. 얼음을 차례대로 배열하고 틈마다 얼음조각을삽입하여 조그마한 틈도 없게 한 다음 위에 빈 가마니 여러 장을 덮어 얼음이 녹는 것을 방지하였다.


얼음의 수요
얼음은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었다. 노인의 더위를 해결하고 병자들의 열을 식히는 약물, 상례 때 시신의 부패 방지를위한 빙반 설치용 그리고 목욕에도 사용되었다.


          ▲얼음크기_1정(45X21X30 Cm) 이라고 하며 무게는 대략 18.75kg


장빙이 끝난 후, 이듬해 춘분부터 궁궐 각사에 얼음을 분배하기 시작했다. 6월 1일 부터 9월 말까지는 정2품 이상의 문무관료, 삼사장관, 승지, 종친에게 이틀 간격으로 얼음을 배포하였다. 활인성의 병자들과 의금부 전옥서의 죄수들에게도 얼음을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그해 겨울철에 다시 장빙하기 위하여 빙고 안팎을 풀잎으로 싸고 빙고를 수리하였다.


세곡의 운송 중심지

서강


황해 전라 충청도의 조세곡과 경기 하류지역에서 물자를 수송하는 배는 모두 서강에 모여 들었다.



▲서강 위치


석대 사진_가마니 속의 벼의 품질 확인할 때 사용한다.석대 사진_가마니 속의 벼의 품질 확인할 때 사용한다.


서강은 전세가 오라오는 조세 수송선의 집결지였기 때문에 공세청(세금을 거두던 곳)과 함께 점검청(점고 하는 곳), 광흥창(관료의 녹봉을 보관 하는 곳)이 위치 했다. 서강에 조운선이 정박하면 호조에서 나와 단자를 점검한 뒤 호조판서와 낭청이 서강에 있는 점검청으로 나아가 조운차사원과 함께 조세곡을 점고 하였다. 확인을 마친 세곡은 용산이나 양화진 그리고 도성 안에 있는 각창고로 하여 운반되었다.

 

광흥창_녹봉의 지급 방법

광흥창에서 보관하던 세곡은 대부분 전라도와 충청도의 것이었다. 조선 전기 녹봉은 경국대전에 따라 매면 1, 4, 7, 10월 네 차례 지급 하였으나, 1695년(숙종21년)부터는 매월 지급하였다. 급료의 지급은 매월 20일 이후 이조와 병조에서 백관들의 봉급소서를 작성하여 호조에 보내면 호조에서 월봉 및 감봉, 해유 여부를 가려 광흥창에 통지하였다. 그러면 문관은 이조, 무관은 병조에서 발급한 녹폐를 가지고 광흥창에 가서 급료를 지급 받았다. 광흥창에서는 그 증표로 녹표를 발급하였다.


녹표 사진: 1396_광흥창에서 녹봉을 지급하였음을 확인하는 문서이다. 정2품 관원에서 3월분의 미(米) 2석(石) 2두(斗), 태(太) 1석(石) 5두(斗)를지급했음을 알 수 있다.


민간 장빙업과 빙어선 영업의 중심지

망원, 합정, 양화진

 

사빙고는 월산대군(성종의친형)이 망원 합정 지역의 희우정 주변에 축대를 쌓고 설치한 것이 최초이다.



▲망원, 합정, 양화진 위치


망원 합정지역 사빙고 설치 이후 이 지역의 사대부는 장빙업으로 부를 축적하였다. 이 지역에 거주하는 일반 백성들은 빙어선을 접대하고 생선의 매매를 중개하는 빙어선 주인영업으로 생계를 이어가거나 얼음 채취와 저장을통해 영업 이윤을 독점하였다.

장빙업이 성행하면서 어장에서 낚은 생선을 냉장한여 경강까지 운송하는 냉장선 즉 빙어선이 등장하였다.

    

민간장빙업의 성행  

조선 후기에 민간의 얼음 수요가 증가하면서 사빙고를 통한 민간장빙업이 많은 이익을 남기게 되자, 1782년 (정조6년)에 빙계가 생겨 났고 그들은 장빙업을 독점하려고 하였다. 이에 민간장빙 업자들의 반대 운동이 일어나 1787년에 빙계가 혁파되면서 민간장빙업자들도 자유롭게 얼음음 판매할 수 있게 되었다.

민간장빙업자들은 얼음을 채운 선박을 이끌고 어장에 나아가 포획된 생선을 냉장해 마포까지 운반하는 빙어선 영업도 독점하였다. 이러한 빙어선 영업은 한양 사람들에게 싱싱한 상태의 생선을 제공할 수 있게 되었고, 도성 안에는 생선전이 생겨날 수 있었다.

 

얼음이란 여름 절기에는 없어서는 안됩니다.

더위를 당하면 생선과 육류를 보관할 수 없기 때문에

동서의 빙고와 자문감의 소장으로 수라간에 바치고

신하들에게 나눠주어 늘 넉넉지 못하였습니다.

바다 위에서 고기를 잡는 배나

서울의 푸줏간에는 골고루 미칠 수 없었기 때문에

성묘조에 특교로 사빙고를 개설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고깃배와 푸줏간에서 어육이 상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비변사 등록] 171책 정조11년 8월 18일

    

빙어선을 놓고 다툰 분쟁

장빙과 빙어선을 통한 이익이 많아짐에 따라 빙어선 영업권을 둘러싼 분쟁도 잡아졌다. 1754년(영조31년)부터 합정에 사는 정수라는 사람이 빙어선이 마포 등지에 정박하게 되자, 빙어선은 망원 합정 지역에만 정박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빙어선은 자유롭게 정박하는 것이 옳다고 최종 판결을 내렸다.

 

어선이 가오 오는 것은 그 이익에 따라 하는 것인데

반드시 한곳에만 정박시키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습니다.

 [비젼사 등록] 175책 정조 13년 12월 21일

 


양화진

인천이나 강화로 가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그리고 마포와 서강에서 흘러오는 물이 맑고 잔잔하여 뱃놀이와 얼음 낚시가 유명했다.

 

양화도는 서강의 하류이다.

처음엔 도승을 배치하였는데 후에 별장으로 고쳤다.

호조의 점검청이 있다.

선조 24년에 물이 얕아져 배가 통행하지 못하였는데

인조 14년에 또 물이 얇아져 배가 통행하지 못하였다.

속한 선박은 어영청 배 10척인데 관방보에도 보인다.

동국여지비고 권2 한성부




조선업과 배목수

밤섬

마포 앞에는 밤섬(율도)과 여의도가 있다. 조선시대 밤섬과 여의도는 하나의 섬이었다. 밤섬에는 조선소가 있어 부유한 조선업자들이 거주하였고 약초나 채소 등 상업적 농업이 번성하였다. 특히 밤섬은 뽕나무로 유명하였을 뿐만 아니라 겨울철에는 채빙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밤섬(율도) 위치


1960년대 까지 밤섬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터전이었으나 1968년 당시 정부의 한강 개발과 여의도 개발의 일환으로 폭파되어 모습을 감추었다. 하지만 폭파된 곳에 자연적인 퇴적 작용으로 토사가 쌓이고 그 위에 나무와 궆이 자라나면서 밤섬은 다시 모습을 갖추었다.


          와우산에서 바라본 밤섬 사진_한치규1967년

 

밤섬의 배목수

경강의 조선소는 뚝섬과 밤섬에 있었다. 밤섬에는 배를 만드는 배목수들이 많아 조선업이 발달하였다. 2천석을 적재할 수 있는 대형 선박도 건조되었다.  

 

율도는 서강 남쪽에 있다.

섬 전체가 곱고 깨끗한 모래가 수십리나 길게 펼쳐 있다.

거주하는 백성들은 부유하고 번성하였다.

대동지지 1권 한성부

 

 

이상 서울역사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열린 경강_광나루에서 양화진까지를 정리한 것이다. 우리나라 수도를 가로지르는 한강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좋은 자리였다. 늘 가까이 있기 때문에 무관심할 수 있었던 한강. 이 한강은 옛날 수도 한양의 남쪽 경계였을 뿐만 아니라 그 물길이 거대해 교통의 요지로서 그리고 상업활동에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을 자세하게 전해주고 있다.

한강.... 자연이 우리에게 준 큰 선물임이 분명하다. 경강 전시회를 통해서 한강의 역사를 알려줄 뿐만 아니라. 기획전시실 입구에서는 한강 다리의 역사에 대해서도 사진전을 하고 있다. 함께 둘러보면 더 큰 유익일 있을 것이다.[ http://blog.daum.net/nasaro1/201 링크를 클릭하면 연결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