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궐/박물관 탐방

[서울역사박물관] 서울과 평양의 3.1운동, 3.1운동 100주년

지니쌤 동진이 2019. 4. 22. 00:19


서울과 평양의 3.1운동, 3.1운동 100주년




주 제; 서울과 평양의 3.1운동
장 소: 서울역사박물관 기획전시실
일 시: 2019년 3월 1일~5월 26일


3.1혁명(3.1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 입니다. 1919년 독립선언서가 선포되었고 100년이 되었습니다.

3.1혁명(운동) 100주년을 맞이해서 서울 역사박물관은 서울과 평양의 3.1운동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1919년 일제의 침탈과 식민지배에 저항하여 조선의 독립과 더 나아가 세계평화를 위해 비폭력 만세운동을 벌였으며 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의 근간이 되었습니다. 서울은 3.1운동이 기획되고 시작된 곳이며, 평양은 서울과 함께 가장 활발하게 3.1운동이 전개된 곳입니다.(중략)백년전 서울과 평양의 역사 현장에 서서 그 함성과 기억을 개기는 자리가 되길 기대합니다.(전시회를 열며 中 에서...)



1910년 8월 29일은 경술국치일입니다. 일본은 불법적으로 대한제국을 병합하였습니다. 수도 한양은 경성으로 전략하였습니다. 경복궁의 근정전에는 일장기가 걸렸습니다.


근정전에 걸린  일장기



일제는 조선을 통치하면서 조선인은 철저히 배재하였습니다. [보완법] [신문지법] [출판법]을 통해 신문과 잡지들을 폐간하였고 [집회단속에 관한 건]을 발표하여 정치적 집회와 야외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것을 금지하였습니다.


일제강점기 초기 1910년대에는 헌병경찰제도의 시기였습니다. 일제의 헌병은 민간 경찰 업무를 보았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공포분위기를 조성하였습니다. 이로인해 일본헌병은 즉결처분권은 줌으로 재판없이 태형령도 내릴 수 있었습니다.심지어 학교 교사들도 칼을 차고 수업을 했하였습니다.


            ▲ 일제가 조선인에게 태형을 집행하는 모습


조선태형령은 일제강점기 가장 악질적인 법령이었습니다. 일제는 조선 국민 수준이 낮기 때문에 태형으로 다스릴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일본인에게는 적용따라 경미한 죄에 대해 태형을 부과하였고, 야만적으로 집행되어 조선인에게 신체적인 고통과 수치심을 주었으며 심할 경우 목숨을 잃기도 하였습니다.



        칼을 차고 있는 경성종로공립심상고등소학교 교직원


"단지 교육에 대하여 말해보면,

소학교 교과서는 일본과 달라서 차별대우의 의미가 있고

또 소학교 교원이 교실에서 칼을 차는 것은 세계에서도 초유한 일이니

이는 일본 군국주의의 극에 달함을 널리 표시하는 것이요,

또 이러할 뿐만 아니라

교원이 학생에게 명령하여 말하되 너희가 내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이 검으로 너희들을 참하리라 하니

이러한 악한 언행에 그 반감이 어떠하겠는가?"

-오사카아사히신문 1919.5.13-


조작된 105인 사건


1911년 데라우치총독암살 미수사건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는 조작된 사건이었습니다. 1910년경 신민회와 기독교인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이 확산되고 있었는데 이를 탄압하기 위해서 조작을 했습니다. 당시105명이 유죄판결을 받았다 해서 105인 사건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 연행되고 있는 105인 관련자들


600 여명이 검어되었고, 1심에서 105명이 유죄판결이 나왔지만 증거불충분으로 99명에게 무죄가 입증되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서 신민회는 해체되었지만 일부는 만주를 비롯 해외로 망명하여 국외에서 항일운동을 계속 하였습니다.


일상화된 차별과 멸시


일제는 군인이나 관료, 일반인뿐 아니라 어린이까지 조선인들을 무시하고 차별하였습니다. 하층의 일본인인 경우에도 조선인을 멸시하였습니다. 조선인이라면 이유 없이 구타하기도 하였고, 병원에 가도 일본인 간호가가 공공연히 모욕하는 태도를 보이는 등 차별과 멸시는 일상화 되었습니다.


1차 세계대전의 종전


1914년 6월 28일 시작된 1차 세계대전은 1918년 11월 11일까지 4년동안 계속되었습니다. 일본은 영일동맹을 근거로 연합군 측에 가담하여 독일이 지배하던 중국 산둥반도와 태평양 남양군도를 점령하였습니다. 그리고 급격한 해외 수출을 증가로 경제적인 호황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일제는 1사체계대전 승전국으로서 세계열강과 어때를 나란히 하개 되었으며, 조선에 대한 배타적인 지배권을 공고히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민족자결주의


민족자결주의모든 영토와 주권은 각 민족에게 귀속되며, 각 민족의 의사에 따라 정치적 운명이 결정되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을 주도한 레닌은 식민지 및 반식민지 상태에 있는 약소민족의 민족해방운동을 지원하겠다고 선언하였습니다.
1918년 1월 미국 윌슨 대통령은 의회 연두교서에서 전쟁 종결을 위한 14개조 평화원칙을 발표하였습니다.
이러한 민족 자결주의는 제 1차 세계대전의 전후 문제 처리를 위해 개최된 파리강화회의의 기본 원칙이 되어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유고슬라비아, 핀란드, 헝가리 등이 독립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는 적용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이 원칙이 패전국의 식민지배를 받는 나라들에게만 적용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일제는 당시 연합군쪽에서 있었기 때문에 승전국이었고, 그 때문에 우리나라의 독립에는 적용이 되지 않은 것입니다.


고종황제의 의문스러운 죽음


1919년 1월 21일고종황제는 시녀가 건넨 식혜를 마시고 잠자링 들었고, 얼마뒤 갑자기 복통을 호소하며 사망하였습니다. 조선총독부는 고종의 사망이 뇌일혈로 인한 것이라도 발표하였지만 일제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소문이 지하신문 등을 통해 널리 퍼져 나나갔습니다.


3.1운동을 기획하다


일제에 의해 강제 병합된 식민지 조선의 현실은 비참하였습니다. 착취와 차별은 일상화 되었고, 군대와 경찰을 통한 공포 분위기가 지속되었습니다. 왜곡된 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독입운동이 계속되었지만 그만큼 탄압은 심해졌습니다.
1918년 제 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민족의 운명은 민족 구성원이 스스로 결정하는 민족자결주의가 조선에 전해졌습니다. 여운형 등은 파리강화회의를 통해서 조선이 독립할 수 있겠다는 희망을 보았습니다.
1919년 2월 8일 이론 도툐에서 유학생들이 먼저 독립선언을 외쳤습니다. 이는 3.1만세운동에 마중물이 되었습니다. 2월 23일 첮도교 기독교 학생 등은 오후 2시 독립선언식을 개최하는 것이 정해지고, 독립선언서는 비밀리에 인쇄되어 전국으로 배표되었습니다. 모든 준비는 이렇게 완료되었습니다.


독립의 희망을 보다


러시아의 레닌과 미국 윌슨이 주창한 민족자결주의는 식민지 조선에 독립의 희망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1차 세계대전 종전 후 윌슨의 전후 정책인 14개 조를 선전하기 위해 찰스 크레인이 중국을 방문 하였습니다. 당시 여운형은 윌슨을 만났는데 민족자결주의 원칙이 논의될 때 파리 강화회의를 통해서 한국이 독립할 수 있다는 기대를 하였습니다.


여운형은 크레인에게 한국 독립에 관한 청원서 2통을 미국 대통령 윌슨과 파리강화회의에 전달할 것을 부탁하였습니다. 그리고 김규식을신한청년단 대표겸 한국 민족대표로 선정하여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하였습니다.
이와 더불어국내와 일본 만주 및 연해주에 사람들을 파견하여 국제 여론을 환기시킬 독립운동을 종용하였습니다. 신한회에서는 독립청원 결의서를 미국 정부와 의회등에 보냈습니다.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도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하였고, 이러한 노력은 3.1운동 봉기에 매우 결정저긴 계기와 구심점을 제공하였습니다.



▲ 신한청년단의 파견 경로

   파랑:국내, 빨강:일본, 보라:만주및 연해주 살구색: 파리강화회의


               ▲ 사진; 파리에 바견된 신한청년단 대표단

                       앞줄 가장 왼쪽과 오른쪽이 각각 여운형과 김규식.

                       뒷줄 왼쪽에서 세번째가 조소앙.


파리강화외의에 보낸 독립 청원서, 이 문서는 김규식이 미국 윌슨 대통령과 피리강화회의 의장 클레망소, 영국 전권대표 로이드 조지 등 각구 대표자들에게 발송한 독립청원서이다.


 3.1혁명(운동)

"우리가 만세를 부른다고 당장 독립이 되는 것은 아니오. 그러나 계레의 가슴에 독립정신을 일깨워 주어야 하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 꼭 만세를 불러야 하겠소!"


도쿄에서 독립을 외치다


일본에 유학교고 있던 조선인 학생들은 이저누터 웅변회, 토론회 등을 통해 항일운동 전개를 하고 있었습니다. 때 마침 미국내 한인들이 파리강호회에 대푤르 가견하고 미국 대통령에게 독립청원 결의서를 보내 ㅅ호식 등은 일본의 영자 신문을 통해 접하게 되었습니다. 학생들은 이 영향을 받아 1919년 1월 6일 웅변대회를 위장한 모임을 갖고 일본 내각과 대사에게 독립을 청원하기로 결의하였습니다. 당시 선언서는 이광수가 작성하였으며, 1월 말 송계백을 국내로, 이광수를 상하이로 파견하여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


1919년 2월 8일 도툐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 모인 학생들은 도툐의 한복판에서 독립선언서를 소리 높여 낭독하였습니다. 낭독을 마치자 마자 경찰들이 들이닥쳐 학생들을 체호하고 해산시켰습니다. 이 사거은 3.1운동을 촉발하는 데 결정적인 열할을 하였고, 이후 일본 유학생 678명중 절반이 넘는 359명은 귀국하여 3.1운동에 참여하였습니다.


 2.8 독립 선언을 주도한 일본 유학생들의 사진


           ▲도쿄 아사히신문의 2.8독립선언 관련 보도/1919년 2월 9일



서울에서의 3.1운동 준비; 민족대연합을형성하다


1919년 1월 20일경 천도교는 독립운동의 세 가지 원칙(대중화, 일원화, 비폭력)을 정하고 독자적인 독립운동을 구상하였습니다.
기독교도 장로교, 감리교 등 각 교파별로 독립운동을 모색하고 있었으며, 전문학교 학생들을 주측으로 한 한생들도 독자적인 독립운동은 계획하고 있었습니다. 거사를 5일 앞둔 2월 24일 천도교와 기독교가 연합하였고 불교의 참여도 결정되었습니다. 연합이 확실히 성사되자 학생들도 이에 합류하기로 하였습니다. 유림과의 연결도 시도하였지만 아쉽게도 성사되지 못하였습니다.
독립선언서는 2월 27일 인쇄되어 전국에 배포되었고 2월 28일 밤 민족 대표들이 모여 다음날의 행사를 최종 논의하였으며, 이때 독립선언식 장소가 탑골 공원에서 태화관으로 변경되어습니다.


평양에서의 3.1운동 준비


평양에서의 3.1운동 준비는 기독교 천도교 별로 각각 진행되었습니다.
기독교의 3.1 운동 준비는 장로 이승훈이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2월 7일 105인 사건 동지인 선우혁을 만나 독립운동을 협의하여습니다. 이어 선천과 평양 서울을 오가며 기독교계 인사의 독립운동 참여를 규합하였습니다. 15일에는 평양의 기홀병원에 입원하여 16일 장로교계 장대현교회 목사 길선주와 감리교계 남산현교회 목사 신흥식에게 민족 대표에 참여한다는 확답을 받았습니다. 서울에서와 같이 3월 1일 독립선언식을 개최하는 것이 결정되었고, 행사의 세부적인 사상이 결정되었습니다. 장로교계는 26일부터 숭덕학교와 숭현여학교에서 태극기와 전단을 만들었으며, 감리굑계는 남산현교회를 중심으로 독립선언식을 준비하였습니다.
천도교는 도사 임예환과 나인협이 24일 평양에서 서울로 올라갔으며, 25일 중앙총부에서 민족 대표로 참여한는 것을 결정하였습니다. 또한 평양 대교구장 회의를 조집하여 대교구내 주요 인사들이 평양으로 모여 독립선언식을 준비하였습니다.


독립선언서의 작성


독립선언서는 최남선이 기초하였으며, 민족 대표 33인 이름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최남선은 최린과 논의를 처리며 2월 10일 경 초안을 완성하였고, 15일경 최린에게 넘겨주었습니다. 최린은 손병희, 권동진, 오세창에게 보여주고 동의를 구했습니다. 최남선은 미국 대통령과 파리강화회의에 보내는 독립청원서 초안과 조선총독부 및 일본 정부와 의회에제출할 독립통지서 초안을 작성하여 2월 25일 최린에게 절달하였습니다, 최린은 독리선언서와 함깨 이 문건을 기독교측에 보내 최종적인 동의를 얻었습니다. 최남선은 자신이 경영하던 인쇄소인 신문관의 직공에게 독립선언서를 조판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활자판을 천도교 보성사로 가지고 와서 인쇄를 하려 했지만 활자판이 보성사의 인쇄기와 맞지 않아, 다시 활자판을 만들어 2월 27일밤 21,000매를 인쇄하였습니다.


독립선언서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다



2월 27일 인쇄를 마친 독립선언서는 그날 밤 천도교 월보과장 이종일의 집으로 옮겨졌습니다. 옮길 당시 경찰에게 발각될 위기가 있었으나가 마침 정전이 되어 위기를 넘겼습니다. 2월 28일부터 천도교과 기독교 불교의 조직망을 통해 독립선언서가 전국으로 배포되었고, 학생들은 서울 지역 배포를 담당하였습니다.
선언서가 발각되면 계획이 어긋나게 되므로 서울에는 3월 1일 오후 2시 이후에 배포하기로 하였지만 일부에서는 지켜지지 않습니다. 북촌지역에서는 3월 1일 오전부터 배포되었으며, 3월 1일 조선군 사령관이 육군대신에게 보낸 전보에 따르면 1일 새벽 서울에서 독립선언서를 발견하여 수사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3.1혁명(3.1운동)을 실행하다.


1919년 3월 1일 이 날은 고종황제의 인산일(장례식기간)이었기 때문에 만은 사람들이 거리에 모였습니다.
서울, 고양, 진남포, 안주, 선천, 의주, 원산, 해주 9개 도시에서 만세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서울에서는 오후 2시 종로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선언을 하였습니다.
탑골공원에서는 학생들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공원 밖으로 나와 거리 행진을 싲가하였고, 거리의 시민들이 합세하면서 참여자수는 수천 명으로 늘어났습니다.
같은 시간 평양에서도 기독교와 천도교는 각각 숭덕학교 운동장, 남산현교회, 설암리교구당에서 독립선언식을 하고 거리에서 만나 연대하여 행진을 계속하였습니다.

지역, 신분, 계층을 넘어 하나된 이 운동은 평화적으로 진행되었고, 도시에서 농촌과 산간벽까지 번졌습니다. 전국적으로 좁게는 5월, 넓게는 1920년 3월까지 쉼 없이 이어졌고, 국외에서도 함깨 만세운동을 진항하였습니다.


일장기 위에 그려진 태극기/ 2009년 진관사 칠성각을 복원할 때 발견되었다. 독립운동 당시 사용되었을 것으로 주정된다.


 전국으로 번진 만세운동


박은상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따르면 3.1혁명(운동)당시 전국에서 1542회의 만세운동이 있었고, 2,023,098명이 참석하였습다. 이는 당시 인구 1700만명 중 1/8이 넘는 숫자였습니다. 만세 운동은 도시와 농촌을 가리지 않았고 누구나 조직하고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처음 민족 대표 33인을 비록한 지식인과 종교인 등이 주도적으로 계획했던 3.1혁명은 학생들이 이어갔습니다. 이후 서울과 형양을 비롯한 9개 인근도시로 전파되었고, 그 과정에서 상인들은 상점 문을 닫는 것으로, 노동자들은 파업하는 것으로 참여하였습니다. 일제의 강압적인 무력진압 앞에 일부는 무력투쟁을 전개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만세운동은 국내에 머무르지 않고 국외까지 번져나가 간도, 연해주, 미국 뿐 아니라 일본에서도 다시 만세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조선독립신문의 발간


1919년 3월 1일 창간된 [조선독립신문]은 독립선언서와 함ㄲ[ 보성사에서 인쇄되어 배포되었던 지하신문입니다. 하지만 일제의 탄압으로 제 1호를 발행한 윤익선과 이종일이 구금되고 보서아회 폐쇄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종린 등은 다른 곳으로 장소를 옮겨 2~4호까지 발행하다 체포 되었어으며, 그 후 장종건이 장소를 옮겨가며 9호까지 발행하였지만 결국 체포되었습니다.
이후로도 많은 사람에 의해서 발행되었고, 체포를 반복하였습니다. 조선독립신문은 8월 20일 제42호가 발행되었고, 8월 29일 국치 특집호도 발행되었습니다.


▲ 조선독립신문 호외_1919년 6월~12월 사이의 신문으로 추정. 고종황제의 약력과 그의 죽음을 슬퍼하는 글과 시구가 적여 있다.


 격문배포


격문은 일제와 만세운동 불참자에게 경고하고, 만세운동에 참여를 독려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경고문, 지시문, 협박장, 결의문 등 다양한 제목으로 작성되어 지하신문과 함께 배포되었습니다. 격문은 학생뿐 아니라 다양한 계층의 사라들에 의해서 제작되었습니다.
매일신보는 이런 비밀 인쇄물이 민심을 동요하게 하는 원인이라고 지목하였고 주민들에게 거짓 선동에 미혹되지 말것을 종요하였습니다. 경찰들은 가택수색 등을 통해 격문 제작자를 잡아들였지만 격문의 특성상 쉽게 확대 재생산되어 퍼저나갔습니다.


 3.1혁명(운동)을 탄압하다


일제는 3.1혁명을 가혹하게 탄합하였습니다. 경찰과 헌병과 함께 소방대원동 동원하였는데, 총과 칼은 물론 소방용 갈고리까지 휘둘러 수많은 부상사가 발생하였습니다. 또한 보병과 기병 등 군대를 배치하였습니다. 4월에는 추가로 4천여명의 중무장한 군인을 일본으로부터 파견하여 전국에 주둔시켰습니다. 독립운동을 하다 체포된 사람들은 경무총감부와 종로경찰서 등으로 잡하갔으며, 모진 고문과 조사를 받았습니다. 그후에는 재판을 받기 위해 서대문형무소로 이송되었습니다. 서대문 형무소는 수용인원을 몇배나 넘겼지만 일제는 계속 사람들을 가두었습니다. 그곳에서 그들은 모진 고문을 견디고 더위, 추위와 싸우며 전염병 등 각종 질병을 이겨내야만 했습니다. 애석하게도 양한묵, 유관순 열사 등 많은 사람들이 사망하게됩니다.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따르면 3.1혁명 당시 수감자는 46,948명이었고, 15,961명이 부상당했으며, 7,509명이 사망했다고 합니다.


▲ 3.1운동 계보도


주요감시대상 인물카드

    박쾌인, 박노영, 김응관
    채순병, 최강윤, 김종현


              3.1혁명(운동) 시도별 참여자수



             ▲ 어머님께 올린 글월3.1혁명에 참여하여 투옥된 당시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 4학년이었던 심훈이 감옥에서 어머니에게 쓴 편지이다.


생지옥같은 감옥살이를 하고 있지만 독립운동에 대한 강한 의지를 담고 있다. (전략) 어머님, 날이 몹시 더워서 풀 한포기 없는 감옥 마당에 뙤약볕이 내리쪼이고, 주황빛의 벽돌담은 화로 속처럼 달고, 방송에는 똥톷이 끓습니다. 밤이면 가뜩이나 다리도 뻗어보지 못하는데 빈대 벼룩이 다투어가며 빗무른 살을 뜯습니다. (중략) 우리가 천 번 기도를 올리기로서니 곧게 닫힌 옥문이 저절로 열려질리는 없겠지요. 우리가 아무리 목을 놓고 울며 부르짖어도 크나큰 소원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리도 없겠지요. 그라나 마음을 합하는 것처럼 큰 힘은 없습니다. 한대 뭉쳐 행동을 같이 하는 것처럼 무서운 것은 없습니다. 우리들은 언제나 그 큰 힘을 믿고 있습니다.(후략)



               총검으로 찔린 조선인


   1평 감옥
감옥중에는 원레죄인 수용력이 건물 1평에 3인이 정한 규칙인데, 규모가 적어 5-6인을 수용하다가 12명이상을 수용하기도 했다. (감옥넓이 1,337mm 2,720mm)


경성 한 의사의 순국; Unknown Patriotic Martyr for the Countty


               경성 한 의사의 순국


1919년 중국 상하이에서 신채호에 의해 창간된 주간신문 [신대한] 제 1~3호에는 <독립욵동 견문 잡기-경성 한 의사의 순국>기사가 연재 되었는데, 3.1혁명(운동) 당시 만세운동의 열기와 일제의 참혹한 대응을 실감나게 표현하고 있다.


  신대한 제2호에 실린 사진으로 의사의 순국한 인물과 동일인으로 추정된다.


 에필로그


3.1혁명(운동)의 정신은 1919년 4월 11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으로 이어집니다. 임시정부는 민주공화국을 선포하고 평등과 집회 및 결사의 자유, 남녀의 참정권을 보장하고 사형과 태형 등의 금지를 선언하며 식민지 조성의 왜곡된 현실을바로 잡았습니다.
또한 3.1운동을 잔인하게 탄합하던 하세가와 총독을 대신해 사이토 총독이 임명되었는데 그가 9월 2일 남대문 정거장에 첫발을 대디뎠을 때 가장 처음 마주한 것은 일장기가 아닌 강우규가 던진 폭탄이었습니다. 1920년 3월 1일 열성과 뜨거운 눈물로 만세운동이 다시 일어나게 됩니다. 배화여학교, 배재학당 등의 학생들은 물론 서대문형무소에 숙람중이던 유관순도 동지들과 만세를 외쳤고, 서울과 평양뿐 아니라 전국에 만제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중국 상하이에서는 한인 동포들의 집에 태극기가 하나둘 게양되기 시작하였고 임시정부 요인들이 모여 3.1절 기념식을 거행하였습니다. 3.1운동에 대한 공동의 기억이 이렇게 기념되기 시작하였고, 이후 끊임없이 이어지는 독립운동의 정신적이 뿌리가 되었습니다.


  상하이에서 열린 3.1혁명(운동) 1주년 기념식


[임시정부가 기록한 3.1혁명(운동)]


1919년 7월 11일중국 상하이의 대한민국 힘시정부는 독립운동에 관한 사료를 수집, 정리, 편찬하기 위해 임시사료편찬회(한자)를 설치하였습니다. 이 편찬회는 9월 23일 [한일관계사료집(저4권)]을 간행하여 일제 침략의 부당성과 독립의 정당성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였습니다.
특히 4권에는 3.1혁명(운동) 관련자료를모두 정리하였는데 3.1혁명이 일어난 원인부터 임시정부의 수립까지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