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궐/박물관 탐방

[대한민국 역사 박물관]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 특별전, -대한독립 그날이 오면- 제 1부 1919년을 가슴에 품다

지니쌤 동진이 2019. 5. 2. 16:29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

100주년 기념 특별전

-대한독립 그날이 오면-


제 1부. 1919년을 가슴에 품다.

주제: 일시: 2019년 2월 22일 ~ 9월 15일
장소: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이번 대한민국 역사박물관에서는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십정부수립 100주년 기념 특별전"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번 특별전은 세가지 주제로 준비를 하였는데, "제 1부. 1919년을 가슴에 품다." "제2부, 임시정부 사람들 조국을 그리다." "제 3부, 고향, 꿈을 꾸다"입니다. 본 블르그의 포스팅은 이 중 "제 1부. 1919년을 가슴에 품다." 입니다.


2부와 3부는 링크를 참고하세요

제 2부. 임시정부 사람들 링크 --> http://blog.daum.net/nasaro1/216

제 3부. 고향, 꿈을 꾸다 링크 --> http://blog.daum.net/nasaro1/217



대한독립 그날이 오면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심훈의 "그날이 오면"이라는 시가 생각날 것입니다. "심훈의 그날이 오면은 광복이 왔을 때의 감격과 환희를 표현하고 있는 시인데, 그 내용이 조금 잔인하기도 합니다.


종로의 인경 머리로 들이 받아 울리오다.

두개골이 깨져서 산산조각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리까


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기어

커다란 북을 만들어 둘쳐메고는

여러분의 행렬에 앞장을 서오리다


하지만 이는 과정법으로서 광복이 오는 그날의 기쁨을 표현하겠다는 시인의 마음이 잘 표현되어 있는 시이기도 합니다.



심훈은 1919년3월 5일 시위에 참가한  학생이었습니다. 현장에서 체포, 투옥 되었고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출옥하였고, 이후 기자, 시인, 소설가, 영화인으로 짧지만 열정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1932년도에 시집을 출간하려 했지만 검열로 인해 출간하지 못했고, 해방이후에 "그날이 오면"으로 간행되었습니다.


역사적 배경


1910년 8월 29일(경술국치) 일본은 우리나라를 강제로 병합 했습니다. 이는 불법이었습니다. 1910년대 일제의 식민통치는 "헌병경찰통치"라고 부릅니다. 군인이 민간경찰의 일을 하였으며, 헌병경찰들에게 태형이라는 즉결처분권을 주어 태형에 처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이는 조선인에게만 적용한 것으로 가혹한 형벌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학교에서는 교사들이 칼을 차고 수업을 진행하면서 위화감을 주었습니다. 이렇게 칼을 찬 것은 "너희들이 내 말을 듣지 않을 경우 이 칼로 단죄 하겠다."라는 의미도 들어 있었습니다.
일제는 우리나라 사람을 인간 이하의 대접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를 통제 하기 위해서 출판법, 신문지법, 보완법, 사립학교법 등을 시행하였습니다. 한마디로 표현하면 자유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약 10년을 지내면서 당하고만 있지 않았습니다. 일제는 우리나라를 억압하였지만 그 안에서 독립에 대한 열망이 있었습니다. 그 열망은 1919년 2월 8일 일본에 유학하고 있는 학생들에 의해서, 그리고 1919년 3월 1일 3.1혁명이 전국적으로 일어났습니다. 1919년 그러니깐 기미년 3.1독립선언서는 임시정부를 출범시켰으며, 더욱더 활발하게 독립운동을 할 수 있는 거점이 되었습니다.


"3.1운동에 사람들은 어떻게 참여하였고, 그로부터 어떠한 영향을 받았으며, 그들의 인생은 그 후 어떻게 진행되었을까요? 멀리 타지의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의 희생과 헌신은 어떤 삶의 조건 속에서 나온 것이었을까요? 해외에서 나라의 독립을 위해 애쓰시던 분들가운데는 광복이후에도 돌아오지 못한 분들이 많습니다. 이들의 삶은 이후에 어떻게 전개되었으며 그들이 살던 지역에서 이들은 어떻게 기억되고 있을까요?
이번 전시를 통해 시간을 100년 전의 시점으로 돌아가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들어오 사람들, 숨은영웅들을만나 보시기 바랍니다.(중략)이들의 헌신과 희생의 의미를 되새기고, 그 의미를 다시 떠올리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전시회를 열며 중에서)"


 1919년 3월 1일 정오 대한독립만세가 외쳐 지다


1919년 3.1혁명(운동)은 우리들에게 있어서 새로운 출발이었습니다. 일본 제국주의이 지배가 불법적이미을 세계에 알렸으며 그 억압에 저항했습니다. 독립선언서는 전국 곳곳에서 낭독되었으며, 독립 만세가 외쳐 졌습니다. 그리고 함께 하지 않는 자들을 향해서 격문을 쓰기도 하면서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거대한 운동이 되었습니다.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서


등사기 만세를 퍼트리다.


3월 1일 정오에 탑골(파고다) 공원

군중 속에서 한 사람이 튀어나와 독립선언문을 낭독했다. --- 선언문을 채 읽기도 전에 꽉 눌려 있던  군중들 사이에서 만세 소리가 우렁차게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대한 독립 만세, 조선 독립 만세!'


그때 젊은 가슴 속에 꽉 들어찼던 원한과 울분이 한꺼번에 터진 것이다. --- 지도하는 사람도 없었고 뚜렸한 계획도 없었지만 그 많은 군중들이 그저 오직 한 마음으로 물결치듯 움직이고 있었다.


정석해, [고종황제는 아직 생존해 계시냐?][털어놓고 하는 말2],뿌리깊은나무, 1980.


진관사에서 발견된 조선독립신문과 경고문


2009년 진관사의 칠성전을 해체 복원 하는 과정에서 불단과 기둥 사이에 은닉되어 있던 3.1운동 유물들이 발견되었습다. [조선독립신문] 제32호, 40호, 41호, 42호와 경고문이 그 중 일부입니다. 이들 인쇄물의 제작자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고, 1919년을 대한민국 원년으로 쓰고 있습니다.

         

조선독립신문42호


조선독립신문은 당시 '지하신문'으로 이른바 대안언론의 대표격이었습니다. 3월 1일 1호가 나온 뒤 발행인이 검거가 되었지만 그 뒤에도 계속된 발행으로 8월 29일까지 간행되었습니다.  


경고문_격문은 일제와 만세운동 불참자들에게 경고하고 만세운동에 참여를 독려하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격문에는 경고문, 지시문, 협박장, 지시문 등이 있는데 위 사진은 경고문입니다.


학생들은 독립신문을 등사기로 수백장씩 만들어서 배부 하였습니다. 신문의 내용은 주로 파리강화회의에 관한 것과 국내 여러지방의 독립운동 상황을 전달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에게 큰 소망을 주는 기쁜소식이었습니다.


벽에 붙은 격문


독립선언의 확산_지도를 통해서 3.1혁명(운동)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한야소교회대표자호소문_(야소교_예수교)


한국인의 평화적 저항에 대한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 실상을 알리며 전 세계 기독교인에게 지원 요청하는 호소문입니다. 1919년 5월 안승원, 손정도 목사 등 기독교계 대표 11명이 서명했고 뒷면에는 영문 번역문이 인쇄되어있습니다. 같은해 9월 여운홍(여운형 동생)은 영문 호소문을 백악관과 미 국무부에 보냈습니다.


신한민보 1919년 10월 2일자 신문 1면

야소교회대표자 호소문이 기사화 되었습니다.


판결문들


일제는 3.1만세혁명(운동)에 즉각 반응을 하였고, 수많은 사람들을 체포하였습니다.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지사]에 따르면 당시 수감자는 46,948명이었고, 부상자는 15,961명, 사망자는 7,509명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당시 희생자 수치는 서울역사박물관 "서울과 평양의 3.1운동, 3.1운동 100주년의 전시실 내용 입니다.)


조선총독부의 재판소 조직은 지방법원, 복심법원, 고등법원 3급 3심제로 구성되어 지방법원은 민사와 형사에 대한 1심 재판을, 복심법원은 지방법원의 재판에 대한 공소와 항고를, 고등법원은 복심법원의 재판에 대한 상고 및 항고에 대한 재판을 담당하였습니다. 국가 기록원이 소장하고 있는 조선총독부 판결문은 2,457권이다.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고등법원, 형사재판서원본(1919년 6월)

조선총독부 고등법원이 선고한 판결문으로 443쪽으로 구성되어 있다. 3.1운동 과정에서 체포되어 재판 받은 96명에 대한 항소심 판결이 수록되어 있다. 결과는 모두 상고 기각되었다.


일제는 무력으로 3.1혁명을 진압했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총독부와 친일파 자제단을 만들어 3.1혁명을 무력화 하려고 시도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완용은 경고장을 뿌리며 민중을 협박하기도 했습니다.


이완용이 보내는 경고문


[경고문 내용]

거리에 나서 고작 몇 마디 외치는 걸로 세상이 바뀔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불순한 무리들의 선동에 휘말려 선량한 시민들까지 반정부 시위에 나서고 있으니 답답할 노릇이다.

전문 시위꾼들을 주도로 한 불법적 시위, 폭력적인 시위가 끊이질 않으니 그에 맞게 대응할 수 밖에요.

시위에 나선 한 전문 선동꾼이 공권력의 합법적이고 강경한 대처에 지금 사경을 헤매고 있는 것을 보세요.

여러분도 그 꼴 나고 싶은 거 아니잖아요?

자중하시길 바랍니다.


조선총독의 유고

제 2대 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가 3.1운동 발발 뒤 발표한 세 번째 유고입니다. 이 글에서 총독은 '민중의 만동을 경계했으나 더욱 폭력화되어 부득이 일본정부에 군대 파견을 요청했으니, 일반인은 경솔히 불량배와 섞여 화를 입지 말라'고 경고 하고 있습니다. 하세가와 총독은 3.1운동을 계기로 1919년 8월 교체되었습니다.


조선총독부와 친일파들은 자제단을 조직했다. 자제단은 3.1운동을 조직적으로 와해 시키기 위해 결성된 친일단체였다. 1919년 4월 6일 대구에서 처음 만들어진 후 전국적으로 확대 되었다. 신문 [매일신보]는 친일 신문으로서 총독부 기관지였습니다. 매일신보는 3.1운동을 기독교와 천도교가 민족자결을 오해해 일으킨 망동 이라고 설명하였습니다.


전동례(제암리 교회 학살 희생자 유가족)


1919년 3.1 만세시위에 나가지 않았지만, 시위에 참여한 남면이 제암리 교회에서 학살당하고 집과 동네가 붙랐다. 갑작스러운 남편의 죽음 어린아이들과 먹고 살아야 하는 삶의 무게, 그리고 교회를 다닌 자신에게 쏟아지는 이웃의 원망까지를 견뎌냐야 했다. 해방후 매년 3.1운동 기념식이 열렸지만, 이들 상처 받은 생존자의 이야기는 쉽게 들을 수 없었다.


[그냥 나 어디 가설랑 영감 죽었다고 목 놓아 울어보지 못해구유, 친정엘 가두 큰아버지 큰어머니 동아가시구 "제 설움에 운다"구 그럴까봐 울질 못 했어유. 토옹 울지 않았어유... 참 우는 것이 그립디다유. 앉아서 울으면, 울먹이며 울면 눈이 빨갛구 가만히 드러누워서 남 모르게 눈물 흘리며 운 것 같으질 않어유...
전동례, [두렁바위에 흐르는 눈물] 뿌리깊은 나무, 1981.


제암리 교회 학살  희생자 유가족


학생들의 3.1혁명(운동)


학생독립운동의 주요 거점이었던 YMCA회관

1919년 2월 25일~26일 학생지도부 모이이 열린 정동교회 

1919년 2월 20일과 28일 학생지도부 모임이 열린 승동교회

학생대표는 종교계 민족대표와 더불어 3.1운동 초기 단계를 이끈 하나의 독자 세력이었습니다.
학생들은 1919년 1월부터 모임을 가져 지도부를 구성해 독립운동을 계획하던 중 종교계의 요청을 받아들려 3월 1일 만세운동을 함께 준비했습니다. 3월 1일 당일 민족 대표가 파고다 공원으로 오지 않자 그들은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거리 시위를 주도했습니다. 그리고 3월 5일 독자적으로 남대문정거장(현 서울역)앞 시위를 전개했다. 이후 고향으로 흩어져 만세 시위를 벌였습니다.


김원벽


연희전문학교졸업앨범


1919년 3월 5일 시위를 주도한 학생지도주의 일원이다. 징역 2년 만기출옥한후에 대중강연에 힘썼고, 식민지 현실의 변화를 위해서는 먼저 '생활의 개조'가 필요하다는 취지에서 민족주의자 및 사회주의자들과 함께 잡지 신생활을 발행했다. 이후 언론 활동과 대중 운동에 참여 했으나 1928년 병으로 사망했다.


한위건


1919년 3월 5일 시위를 주도한 학생지도부의 일원이다. 체포를 피해 상해로 건너가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내무위원, 임시의정원 함경도 의원으로 활동했다. 일본 유학 후 귀국해 조선공산당에 강입해 활동하다가 1928년 검거를 피해 다시 중국으로 망명해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해 노력했다. 이후 중국공산당에 입당해 항일투쟁을 이어가다가 1937년 건강 악화로 사망했다. 3.1운동 참여 이후 사회주의 운동가의 길로 들어선 이들 중 한 명이다.


조선총독부 검열로 일부 기사가 삭제된 채 발행된 시대일보
시대일보는 1924년 창간되었고, 한위건은 1924년 가을 일본에서 귀국한 후 시대일보 이사로 활동하였다.



김대우(친일로 돌아선 자)
1919년 3월 5일 시위를 주도한 학생지도부의 일원이다.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7개월 집행유예 3년을 선고 받고 풀려났다. 이후 일본 유학을 거쳐 1925년 조선총독부 관리가 되었고 해방을 맞았다. 특히 1937년 '황국신민서사'가 제정된 때 관련 업무를 담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행위는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벽법]에 의해 2009년 친일반민족행우로 규정되었다. 3.1운동에 참여 했으나 친일의 길로 들어선 이들 중 한 명이다.


한국병합 OO 화보


류자명
1919년 3월 학생들과 충주 잘날 만세운동을 계획한 교사였다. 시위계획이 사전 발각되어 상해로 피신했고,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충청도의원으로 참여하였다. 이후 무정부주의를 수용해 김원봉이 이끄는 의열단에 들어가 활동하였고, 다양한 무정부주의 조직에 참여하면서 중국과의 연대 및 독립운동세력의 통합에 힘썼다. 1942년에는 임시정부 의정원에서 활동했다. 광복 후 귀국하려고 했으나 결국 농업학자로 중국에 남았다.


1942년 의정원 의원 일동 기념촬영

북한에서 받은 훈장이며, 남과 북에서 모두 훈장을 받은 유일한 분 입니다.

이미륵
1919년3.1운동에 참가한 학생이다. 임시정부를 지원하는 대한민국 청년외교단에 가입해 활동하다가 검거를 피해 상해로 망명했는데, 그 활동으로 징역 2년을 선고 받았다. 1920년 독일 유학을 떠났고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세계피압박민족대회에 김법린 등과 함께 한국 대표로 참석해 독립을 위한 지원을 호소했다.
1946년 자전적 소설 [압록강은 흐른다]등으로 한국과 한국문화를 독일사회에 알리는데 기여를 했다. 1950년 독일에서 사망했다.


윤봉춘
1919년 4월 함북회령에서 친구 나운규 등과 함께 독립선언문과 태극기를 제작해 만세운동에 참여한 학생이다. 체포되어 복역했고, 출옥 직후인 1920년 북간도 국민회 소속으로 활동하다가 다시 체포되어 징역 1년6개월을 선고 받고 복역했다.
이후 영화배우이자 감독으로 활동하면서 영화를 통해 민족의 어려운 현실을 조망하였다. 해방 후 독립운동의 역사를 재현하는데 몰두 했는데 특히 유관순 영화를 1948년, 1959년, 1966년 총 3번 제작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3.1운동과 감옥 경험은 그의 삶과 예술에 가장 중요한 출발점이었다.


윤봉춘이 각본 감독한 세번째 <유관순> 영화 전단지다. 영화 필름은 남아 있지 않으나 시나리오를 통해 4.19혁명이후 이상적인 시민상이 투영된 유관순의 면모를 유추할 수 있다. 영화에서 유관순은 독립의 영웅이자 자유, 박애 등 보편적 인간 가치를 지향하는 자유 시민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정석해

1919년 3월 1일과 5일에 시위에 참여한 학생이다. 3월 2일 친구들과 함께 하숙집에서 독립선언서를 등사했는데, 그때 등사한 독립선언서가 현재 독립기념관에 있다. 검거를 피해 상해로 망명하였고, 1920년 프랑스로 유학을 갔다가 1939년 귀국하였다.
해방 후 대학교수로 철학을 가르쳤고, 1960년 4.19혁명 당시 교수들의 시국선언을 주도하였으며 학원민주화를 위해 노력하였다.

[3월 5일 아침에 김원벽이 보성전문학교 대표인 강기덕과 함께 인력거를 타고 남대문을 통과하는 것을 시위를 시작하는 암호로 삼았다. 드디어 김원벽과 강기덕이 인력거를 타고 남대문에 나타났다. 남대문을 썩 통과하면서 김원벽은 창대에 매단 커다란 태극기를 꺼내 들었다. 이미 약속한 행동이었지만 그가 태극기를 펼쳐 드는 순간 우리는 감격스러웠고, 설레었다. 그날의 만세 운동은 학생들만이 주도한 봉기였기에 더욱더 그랬다.

정석해, [고종황제는 아직 생존해 계시냐?] [털어놓고 하는 말2] 뿌리깊은 나무 1980.


여학생 만셍운동_ "우리 여자들이 그대로 바라만 보고 있을 수 없습니다."



아직 끝나지 않은 배화 학당


김마리아
1919년 일본에서 2.8독립선언에 참여한 유학생이다. 이후 귀국해 만세 운동을준비하다가  체포되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후원하는 활동을 시작했지만 체포되어 징역 3년 형을 선고받았다. 복역 중 병보석으로 풀려나자 중국으로 망명해 1922년 임시의정원 황해도의원으로 선출되었다. 미국 유학을 거쳐 1935년부터는 원산 마르타윌슨 여자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는데 건강 악화로 1944년 사망하였다.



임시의정원 황해도 의원 선출기사_상하이 임시정부의 기관지인 독립신문에 김마리아가 황해도 의원을 자격심사를 통과했다는 내용이 실렸다. 


최은희
1919년 3월 1일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을 이끌고 만세 운동에 참여한 학생이다. 체포되어 수감되었고 출옥 후 고향을고 내려가 만세운동을 일으켰으며, 다시 체포되어 징역 6개월 집행유예로 2년의 판결을 받았다. 이후 1924년 조선일보 최초의 여기자로 입사해 활발하게 활동했고, 1927년 결성된 여성단체 근우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해방후 여성지위 향상을 위한 사회활동을 전재하는 한편 한국근대사 속 여성들을 조명하는 저술활동에 매진하였다.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제 9회졸업생 일



근우회 창립 기사, 근우회는 1927년 5월에 조직된 항일여성운동 단체입니다. 1931년 해산될 때 까지 항일구국운동 및 여성지위 향상을 위해 일을 했던 단체입니다.  

한국의 첫 여기자 최은희 여사 별세 부고 기사


3.1절 기념 위로연에 참석한 징역 할머님들 1960년


여기까지 1부 입니다.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 힘쓰신 모든 분드를 다 포스팅 하고자 하는 마음은 있었으나,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박물관에 전시된 내용보다 적은 내용이 이 블로거에 있으며, 박물관의 내용보다도 더 많은 분들이 이름 없이 거리에 나와 조국의 독립을 외쳤습니다.


<2부는 다음 포스팅으로 연결됩니다. 아직 준비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