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궐/박물관 탐방

[국립고궁박물관] 세조(世祖)

지니쌤 동진이 2019. 1. 7. 10:54

국립고궁박물관_지하 궁중서화실 

주제: 세조

일시: 2018년 10월 22일~2019년 1월 13일



세조

생몰: 1417년(태종17년)~1468년(세조14년)
재위: 1455년~1468년


새해 첫 날(2019년) 텔레비전에서 [관상]이라는 영화를 해 주었다. 그 영화속에 조카 단종에게 왕위를 빼앗는 계유정난이 묘사되어 있었다.

수양대군은 세종의 둘째 아들로 태어았다. 계유정난을 통해 형제와 많은 정적들을 죽였으며, 조카 단종에게서 왕위를 빼앗았다. 세종의 뒤를 이어 왕이된 문종은 일찍 죽었고, 어린 나이(12세)에 왕이 되었다. 현덕왕후 권씨는 단종을 낳고 사흘만에 죽었기 때문에 단종을 대신해서 수렴청정을 할 대비가 없었다. 단종이 왕이된지 1년만에 수양대군이 계유정난(1453년)을 일으켜 왕권을 흔들었다. 수양대군은 왕이된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후 1455년 단종이 왕권을 양위하는 형식으로 수양대군이 왕이되었지만 실제로는 빼앗은것이나 다름없었다.

세조는 왕이 된 후 국방을 강화하였으며, 국정운정의 원칙이 되는 통일적인 법전 체계를 확립하였다(경국대전).


                    세조어진 초본


이 전시회는 <세조어진초본>을 최초고 공개하였다. 세조의 생애, 정치적 문화적 업적과 관련된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다.



출생

세조는 세종과 소현왕후 심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명은 이유이다. 12세때 진평대군으로 봉해졌다. 17세째 진양대룬으로 그 후 29세때 수양대군으로 불려졌다.
세조는 문학과 활쏘기 말타기에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천문학, 수학, 음악, 의숙 기예등 다방면에 재능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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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의 태실_세종의 18명의 왕자와 단종의 태실까지 19기가 한자리에 모여있다. (강북 성주 월항면 인촌리_대한민국사적 제444)


▲[세조의 태항아리와 대지석]_세조의 태를 넣은 도자기와 대지석이다. 대지석에는 태어난 날짜, 봉작명, 이름, 태를 묻은 날이 기록한다.



계유정난과 왕권찬탈

세종의 뒤를 이은 문종이 제위 2년만에 죽었고, 단종이 12세위 즉위했다. 단종이 어린나리에 왕이되자 숙부였던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은 정치력을 강화하면서 세력을 확대했다. 이 둘의 싸움에서 승자는 수양대군이었다. 수양대군은 안평대군을 세력 제거하였고, 단종에게 왕위를 빼았다.


1453년 계유정난을 일으키며 경쟁자였던 안평대군 세력을 몰아냈다. 그리고 1455년 윤6월 세조는 단종을 강요해 왕위를 물려받았다.

1456년집현전 유학자들은 단종 복위시도를 하였지만, 무두 처형당했다(사육신). 이 일로 인해 단종은 영월로 유배되었다.


사육신_ 성삼문(成三問), 하위지(河緯地), 이개(李塏), 유성원(柳誠源), 박팽년(朴彭年), 유응부(兪應孚)


이후 금성대군(세종의 엿섯째 아들)이 단종의  복위의 복위를 꾀하였으나 발각되 죽임을 당했다. 이 일로 단종 역시 유배지에서 죽는다.


단종과 그를 위해 몯숨을 건 신하들의 이야기는 '사육신'과 '생육신'으로 충의 상징이 되었고, 세조는 조카의 왕위와 목숨을 빼앗은 비정한 군주로 자리 매김을 했다.


생육신_ 김시습, 원호, 이맹전, 조려, 성담수,남효온_단종 복위를 시도하였으나 죽음을 당하지는 않았다.


[세조의 통치와 업적]

세조는 왕권을 강화하였다. 토지와 인구비례에 맞게 군현제를 정비했고, 호적과, 군적(군사명부)를 바로 잡았다. 그리고 호폐제(16세 이상 남자에게 발급된 신분증)를 시행해 인민에 대한 파악과 지배력을 강화했다. 국방을 튼튼히 했을 뿐만 아니라, 통일적인 법전체제를 확립했다.


▲[역대병요]_우리나라와 중국의 역대 전쟁과 이에대한 평가를 정리한 병서이다. 세조가 수양대군 시절 작업을 지위하였으며 정지인, 유효통, 이석형 등의 집현전 학자들과 함께 편찬했다.


▲사진[병장설]1469번_세조가 지은 병장설에 신숙주등이 주석과 부록을 덧붙여 간행한 책.


▲경국대전_조선의 기본 법전으로 나라 전반의 통치 규범을 담고 있다. 세조 즉위 후 편찬 작업을 했으며 1466년 대강의 내용을 마련하였다. 그후 보완과 수정 작업을 하여 성종16년(1485년)에 완성되었다.


세조의 불교 후원
세조는 조선의 다른 왕과 달리 적극적으로 불교를 옹호하고 사원을 지원했다. 간경도감이라는 불경 간행을 전담하는 기구도 설치했다. 간경도감에서는 한문본 불경을 한글로 번역하는 일을 했다. 세조는 법화경. 능엄경, 아미타경을 직접 번역하기도 했다. (이들한글 번역 불경은 훈민정음이 반포된 직후의 국어를 반영하는 귀중한 자료이다.)


▲능엄경 언해_중국송나라때 승려 졔환이 능엄경의 핵심 부분을 풀이한 책에 세조가 직접 한글로 번역한 것이다.


월인석보_석가의 일대기를 담을 책으로 세종이 지은 [월인천강지곡]에 세조가 [석보상설]을 덧붙여 풀이한 것.


세조어진 초본




세조 어진의 전승 내력과 세조 어진 초본

세조 사후 첫 기일을 앞두고 예종은 광릉(세조의 왕릉) 옆에 진전을 세워 세조의 어진 한 점을 봉안했다. 이 어진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때도 불타지 않았다. 병자호란을 피해 땅에 묻어 숨기면서 찢어진 부분에 대한 보수를 하였다(1637년).
영조는 그림의 모사본을 제작하였다.(1735년) 모사본과 원본을 함께 보관하였으나 1872년 원본을 세초(그림을 물로 씻어냄)하여 1735년대 그린 모사본만 남았다.

일제강점기때 이왕직은 세조의 어진을 모사하였고(김은호_1935년), 이때 그린 것인 <세조어진초본>이다. 한국전쟁때 부산 국악원 창고오 옮겨 보관되던 조선시대 어진 대다수는 1954년 12월 용두산 화재로 소실되었다. 이초본은 세조의 모습을 알려주는 유일한 가치를 지닌다.


묘호: 세조

왕이 죽으면 묘호가 붙는다. 우리가 알고 있는 조선 왕의 이름은 사후에 붙여진 묘호이다. 태조는 이성계의 묘효이고, 태조은 이방원의 묘호, 세종은 이도의 묘호이다. 조선왕의 묘효는 "조" 혹은 "종"이 붙는데, 보통 나라를 세운자에게만 태조라는 묘호가 붙고 다른 왕들은 "종"이 붙는다. 그런데 조선의 왕을 보면 태조 이외에 세조, 선조, 인조, 영조, 정조, 순조등 총 7명의 왕에게 붙였다. 이들에게 "조"가 붙은 이유는 "나라를 위기에서 구했거나 엄청난 국가적 어려움을 슬기롭게 극복한 경우에 그 업적을 기리기 위해 묘호에 조를 붙인 것이었다.(박영규, 조선왕조실록)"


조선의 7대왕 수양대군에게 세조라는 묘호가 붙은 것은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에 버금가는 이성계 처럼 숭배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세조는 조선 전기 왕중 태조를 제외하고 진전에 어진이 모셔지고 제향이 행해진 유일한 임금이다.

예종은 세조가 묻힌 광릉에 능을지키는 사찰인 봉선사를 두었고, 그 옆에 진전(봉선전)을 세워 시조의 어진을 봉안했다. 후대 왕들은 종종 광릉과 봉선전에 들러 제향을 지냈다.


임진왜란 이후 세조 어진은 태조 원종(인조의 아버지_추존왕) 어진과 함께 한양의 영희전(또는 남별전)에 모셔졌고, 정기적으로 왕이 방문해 술잔을 올렸다.


▲광릉光陵(세조와 정희왕후)_문화재청 캡쳐


위    치 :경기 남양주시 진접읍 광릉수목원로 354
능의형식: 동원이강릉능의 
조    성 : 1468년(예종 즉위), 1483년(성종 14)


조선의 7번째 국왕 세조. 조카 단종에게 왕위를 빼앗은 세조에 대한 평가는 사람들마다 다를 것이다. 어린 조카에대 왕위를 빼앗은 세조에 대한 부정적인 부분 그리고 그가 남긴 업적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