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궐/박물관 탐방

[대한민국 역사 박물관]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 특별전, -대한독립 그날이 오면- 제 2부 임시정부 사람들 조국을 그리다

지니쌤 동진이 2019. 5. 8. 12:53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

100주년 기념 특별전

-대한독립 그날이 오면-


제 2부. 임시정부 사람들 조국을 그리다.

주제: 일시: 2019년 2월 22일 ~ 9월 15일
장소: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대한민국3년(1921년) 1월 1일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신년축하식 기념촬영


이번 대한민국 역사박물관에서는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십정부수립 100주년 기념 특별전"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번 특별전은 세가지 주제로 준비를 하였는데, "제 1부. 1919년을 가슴에 품다." "제2부, 임시정부 사람들 조국을 그리다." "제 3부. 고향, 꿈을 꾸다"입니다. 본 블르그의 포스팅은 이 중 "제 2부. "임시정부 사람들 조국을 그리다" 입니다.


1부와 3부는 링크를 참고하세요

제 1부. 1919년을 가슴에 품다 링크 --> http://blog.daum.net/nasaro1/215

제 3부. 고향, 꿈을 꾸다 --> http://blog.daum.net/nasaro1/217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을 하였고, 국내외에서는 몇몇 정부가 출현했습니다. 그 중 1919년 4월에 건립된 상해임시정부는 한성정부와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와 통합되어 재탄생 되었습니다. 통합 임시정부는 한성정부의 정통을 이었고 상해 임시정부의 명칭과 전통을 유지 했습니다.

100년전, 1919년 4월 10일 밤 10시부터 상하이에서 열린 임시의정원에는 29인이 모였고, 다음날 4월 11일 아침 10시에 폐회를 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4월 11일 대한민국임시정부가 탄생했습니다.

임시정부 100주년에 대한 칼럼으로 이만열 교수님의 글을 참고하세요.

링크를 참고하세요. http://blog.daum.net/nasaro1/208


임시정부 100주년 기념 사업 홍보탑_중국상하이에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 외관을 본 따서 제작되었으며 탑 꼭대기는 100주년 상징물과 슬로건 입니다. 광화문 광장 세종대왕 동상 앞에 4얼 30일까지 운영됩니다.


태극기_대한민국 임시의정원 태극기_등록문화제 제395-1호_1920년대, 189X142


독립신문

독립을 간절한 바람으로 이루어진 임시정부의 수립과 통합과정 그리고 그 중심에 있었던 임시정부 사람들의 삶을 상하이판 [독립신문]자료를 중심으로 살펴보는 전시입니다.
상하이판 독립신문은 1919년 8월 21이리 항일독립투쟁의 거점이었던 상하이에서 창간된 임시정부 기관지 입니다. 처음에는 한자 "독립" 두 글자를 제호로 삼았고 제 22호부터는 "독립신문"으로 바꾸어 발행했습니다. 그리고 제 175호 부터는 국민 "독립신문"으로 바꾸어 간행했습니다. 주 3회 발간 목표를 하였지만 점차 주기를 지키지 못했고 1925년 11월 11일 189호를 끝으로 폐간하였습니다.


해외 독립운동의 기점, 상하이

20세기 초반의 중국 상하이는 서구 근대문명을 수용하고 발전시킨 국제도시였습니다. 상하이는 중국 신해혁명의 거점이자 활동지였던 만큼 현지의 혁명가들뿐 아니라 다수의 약소민족국가 망명가들과 혁명가들이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그 배경에는 외국인이 자유로이 통상하거나 거주하고 치외법권을 누릴 수 있도록 설정된 조계구역기 있었습니다. 한국인들에게도 상하이는 임시정부, 거류민단, 의열단 등의 단체들이 근거했던 독립운동의 전초기지였습니다.


하나 된 뜻, 임시정부의 통합

우리나라가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기 시작한 1910년대 초부터 상하이로 건너가는 망명자 수가 본격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1919년 3.1혁명(운동) 이후로는 국내외에 다수의 정치조직체가 등장 했는데,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 국내의 한성정부, 상하이에 수립된 임시정부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이후 하나의 통합된 임시정부를 세우려는 노력이 이어졌고, 같은 해(1919년) 9월 11일 마침내 상하이 임시정부에 본부를 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출범했습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초기 청사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제 6회 기념 1919년 9월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원 각료들 1919년 10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직원들 1919년 10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파리강화회의의 대표단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미위원부 직원들


헌법개정과 임시 정부 조직의 변화

명칭                 공포일       정부형태                              배경
대한민국임시헌장  1919.4.11   내각제(의정원/국무총리)             3.1혁명(운동)
대한민국임시헌법  1919.9.11   대통령제(대통령/의정원 국무원)    3개임시정부통합
대한민국임시헌법  1925.4.7    대각제(국무령-국무회의)             이승만 대통령 탄핵
대한민국임시약헌  19273.5     집단지도체제(의정원/국무회의)      민족유일당운동
대한민국임시약헌  1940.10.9   절충재각제(주석-국무위원회)         광복군창설(전시내각)
대한민국임시헌장  1944.4.22   절충내각제(주석, 부주석-국무위원회) 조선민족혁명당참여



대한인국민회 입회증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시민증, 1924년 10월 15일


구미위원부가 안재창에게 발행한 대한민국임시정수의 시민증입니다. 1903년 하와이로 노동 이민을 떠난 안재창은 한인소년병학교, 동지회 디트로이트 지회, 대한인국민회 지방회 등을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지원하였습니다.


독립운동에서 광복까지 임시정부 주요 연표

1910년 미국에서 독립운동단체 대한인국민회조직, 기관지 신한민보 발간
1912년 독립운동단체 동제사, 상하이에서 조직
1917년 상하이에서 대동단결 선언 발표
1918년 중국상하이에서 독립운동단체 신한청년단 조직
1919년 3.1 민족대표, 학생등 거족적 만세운동 전개
           4.11 상해임시정부 수립, 대한민국임시헌장 공표
                   사료조사편찬부 설립, 한일관계 관련 자료 국제 연맹에 제출함
                   독립 제호로 독립신문 창간
           9.11 1차 개헌(대한민국임시헌법)
           (통합) 한성, 상하이, 노령의 임시정부가 통합됨
1923년 국내외 독립단체 1620여명이 모여 국민대표회의 개최
1924년 대한민국임시정부 공보 제 1호 발행
1925년 대통령령으로 임시대통령 이승만 탄핵, 박은식 취임
           2차 개헌(대한민국임시헌법)
           독립신문 폐간 189호
1927년 3차 개헌(대한민국임시약헌)
1929년 조선의열다, 해체선언서 발표
1930년 상해한인소년척후대 창립
1931년 대외선언을 발표하고 삼균주의를 건구권칙으로 천명
1932년 이봉창(1월) 윤봉길(4월) 의거, 조선혁명군과 한국독립군이 한중연합군 조직
  ~    대한민국임시정부, 이동(항저우, 전장, 창사, 광저우, 류저우, 처장)
1940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충칭으로 이전
       광복군 총사령부성립대회 개최
       4차개헌(대한민국임시약헌)
1941년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한민국건국강령발표
           대일선전성명서 발표
1944년 5차 개헌(대한민국임시헌장)
1945년 8.15 광복


대한민국임시약헌

1927년 공포된 제 3차개정헌법의 국한문 정본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19년 4월 11일 헌법공포 이래 총 5차례 헌법을 개정하였고, 임시약헌은 정부의 수반을 없애고 임시의정원에서 선출된 국무위원을 중심으로 하는 집단지도체제를 채택하는 것을 주 내용으로 담고 있다. 1927년 4월11일.


상하이에서 살아간다는 것


낯설고 아득한 이방의 땅


하이의 일상은 어느 것 하나 쉬운 것이 없었다. 그 중에서도 습한 기후와 열악한 생활환경에 적응하고 기본적인 의식주를  해결하며, 보건 위생 문제를 예뱅하는 일은 가장 중요한 과제였다. 한편 인재 양성으로 독립운동에 기여하려는 움직임이 다양한 교육기관의 설립으로 이어졌다.


독립신문_ 상해거류민당등록규칙


상해거류민단의 등록 규칙을 소개하는 기사이다. 총 10개조로 구성된 규칙이 상세히 소개되어 있다. 거류민단은 상하이에 거주하는 한인들을 지원하는 자치단체로 1920년 3월 16일 임시정부의 임시거류민단제 공포에 의해 임시정부 외곽단체가 되었다. 1920년 3월 23일장 4면.


"식생활이라고 해야 가까스로 주먹덩이 밥을 면할 정도였고
반찬은 그저 밥 넘어가게끔 최소한의 종류 한 두가지 뿐이었다.
집은 방이 셋에 부엌이 딸려 있고,
집 전체를 월세로 빌어쓰고 있었는데, 방 하나는 다시 세를 놓았다.
상해에 있는 동안은 한복을 입지 않고,
줄곧 짱산 이라는 중국옷을 입고 지냈는데
임정 어른들이건 아녀자들이건 모두 그 짱산을 입었다."

[정정화 장강일기]


"한학을 공부하셔서 한의학 지식에 정통한 이시영 선생님은
우리들 중 아픈 사람이 생겨 찾아가면
약처방을 내려 주신다."

[양조우, 최선화, 제시의 일기]


"...상해의 기후와 풍토는 나에게 이롭지 못한 조건이 많았다...
밤낮 축축하고 냉랭한 널머루 방에
밤마다 이불 속으로 드는 때면 온몬에 소름이 끼치고..."

[계봉우, 꿈속의 꿈, 고려인 민족운동가 게봉우 자서전]


상하이 거주 한국인 수

상하이의 한인 학교


상해 인성교 충실, 인성학교가 새로운 건물로 이사한 뒤, 학교의 기능이 더욱 활성호되어 모범 교육 기관으로 성장하고 있다는 기사이다. 재학생 수를 학년과 성별로 구분하여 보여 주고 있다.


"저녁이면 나는 조선인성학교에 가서 영어와 에스페란토어,

무정부주의 이론 등을 공부하였다.

나에게 상하이는새로운 세계였으며
서양의 물질 문명과 움익이고 있는 서구 제국주의를 처음으로 본 곳이었다."

[조선인 혁명가 김산의 불꽃 깥은 삶아리랑]


인성학교 제 6회 졸업식 1926년 8월


대한적십자외 간호원양성소 제 1기 1919년


3.1유치원 개학 기념 1941.10


인성학교교사와 학생들, 1935, 11월

인성학교 전경, 연대미상


인성학교 제 7회 졸업식 1927년 7월 9일


신념과 생계의 딜레마


3.1혁명(운동) 직후부터 많은 한국인들이 상하이로 이주했고, 각자 생계를 위해 혹은 독립운동 자금을 위해 경제 활동을 해야 했다. 1910년대에 전차회사 직원이나 자영업자 위주였던 한인 직업군은 1920년 이후 다양해져 의사, 무역업자, 철공업자, 인쇄업자 등으로 다양해졌다.


상하이의 한인들의 일반적인 일자리는 영국인 전차회사 검표원(인스펙터)였다.
자영업으로는 다양한 잡화를 취급하는 상황에서 무역회사, 철공업, 인쇄업, 사진관에 이르기까지 업종이 다양한 편이었다.
큰 병원에 근무하는 의사나 개업의, 약재를 파는 약재상도 있었으며,
비록 소수이기는 했지만 공무원, 교원이나 대학교수, 배우와 같은 전문직업인도 등장했다.
이들 중 상당수는 생계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임시정부와 독립운동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하기 위한 방편으로 직접을 가졌다.


"1926년에 남편은 영국인이 경영하는 전차회사에 취직했다.

백범이나 석오 이동념은 상해에 있는 청년들에게 항상 말하기를,
청년들에게 실망을 안겨 줄 수는 없으니

해외든 어디든 가서 배울수 있는 사람들은 배우고,

직장을 가지고 돈을 벌 사람은 벌고 해서 공부하면서 일하라고 했다.
청년들이 생계유지를 위해 일정한 수입을 가지면서

자기 앞길을 설계하는 것도

장기적인 독립운동 계호획의 하나라고 늘 주장했던 것이다."

[정정화, 정강일기]



기념과 위로의 소임


임시정부는 국가적 차원의 기념행사를 공식적으로 개최하였다. 신년축하회, 3.1기념일, 국치일, 개천절행사증이 대표적이었다. 임시정부요인이나 가족들의 돌잔치, 결혼, 장례, 회갑 같은 행사 또한  다 함께 모여 기념하고 축하하고 위로하는 모임이 되었다. 사적인 행사조차 서로를 위로하고 조국독립의 결의를 다지는 계기로 삼았던 것이다.


삼월초하룻날 우리나라 다시 산날
한양성 만세소리 삼천리에 울리던 날
강산아 입을 여러라 독립만세
삼월호하로날 의인의 피 흐르던 날
이피가 흘러들어 금과 옥이 되옵거든
삼천리 자유의 강산을 꾸미고져

[독립신문 1920. 3.1]


독립선언 1주년 기념식_1920년


독립선언 2주년 기념식_1921년


독립 선언서


1920년 3월 1일자 3.1절 기념호에 실린 독립선언서 전문이다. 독립신문사는 경영낭에도 불구하고 매년 3월 1일 3.1절 기념호를 간행하여 이날을 기념하였다. 1920년 3월 1일자 4 ,5 면]


"음력 10월 3일 개천절이다.
비록 피난중이나 이날을 기념하기 위해

술과 고기를 준비해 놓고, 먹고 마시고 잘 놀았다.

개천절인 우리에게 중요한 의미를 갖는 이유는

일제의 침탈이 대두되면서 부터다.

단군 시조를 중심으로 한민족으로 내려온 우리 동포들,

우리 동포의 하나됨과 자부심을 일깨워주는 개천절은 임정 인사들,

그리고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들에겐 남다른 축제일이다."

[양우조, 최선화, 제시의 일기]


차리석 회갑, 1941년 9월

엄항섭과 연미당의 결혼식 1927년


사람에 울고 웃다

상하이에서 충칭에 이르는 27년감 임시정부 활동을 둘러싸고 각축을 벌인 여러 사람들이 있었다. 임시정부와 뜻을 달리했던 사람들, 험한 망명길을 함께한 가족과 조력자들, 배신과 밀고로 임시정부를 위험에 빠뜨린 밀정 등이 그들이다. 이렇듯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임시정부 역사에서 빼놓을수 없는 한 장명이 되었다.


적이된 사람들
상하이에서 출법한 임시정부를 모두가 지지한 것은 아니었다. 임시정부를 반대하거나 인정하지 않았던 세력들은 임시정부에 대한 반대의견을 국내외에 알리기도 했다. 그러나 정장 임시정부가 가장 경계했던 대상은 밀정이었다. 조국을 배신한 밀정 활동은 임시정부와 요인들에게 큰 위협이 되었다.


1. 적의 우두머리(총독이나 정무 총감을 비롯 한국독립에 강경한 반대입장을 가지고, 우리 독립운동을 훼방하는 정치가, 학자, 신문기자, 종교인 등의 일본인과 우리 동포를 학대하던 적의 헌병, 경관 등)
2. 나라를 판 적(매국노, 한국의 독립을 반대하는 자)
3. 일제 앞잡이(형사나 고등정탐자로 독립운동 기밀을 밀고하거나 독립지사 체포에 동조한자)
4. 친일부호(일신의 안전을 위해 적의 군인과 경찰의 보호를 받거나, 적국으로 도주, 독집자금 헌남을 권유하는 자를 밀고한자)
5. 적의 관리가 된 자(적의 수하가 되어 독립운동을 훼방하고 국민의 애국심을 저하시키는 자)
6. 불량배(근거없는 소문과 헛소문으로 독립운동을 방해하고 민심을 현혹시키는 자)
7. 모반자(독립을 위해 목숨바치기를 맹세한 동지가 중도에 뜻을 바꿔 이에 위반되는 행동을 하는 자)


임시정부의 여성들
임시정부에는 여성 직원이 있었는데 첨구자의 <군소리> 기사에 분주한 임시정부의 일상을 관찰하던 중 눈길을 끌었던 2명의 여성 직원에 대한 언급이 등장한다. 상하이에서 독립운동가의 부인들은 삯바르질이나 하숙을 치면서 군자금을 보태는가 하면 도움이 필요한 임시정부 요인들을 한 가족처럼 돌보는 일에도 인색하지 않았다. 때로 국내에 잠입해 군자금을 모집하는 역할도 감당했는데, 그 과정에서 체포되어 어려움을 겪는 일도 있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여성들 1931

대한민국임시정부 직원들 1919.10


말하지 않아도 통했던 사람들


임시정부 사람들은 임시정부를 통해 대한민국이 독립국임을 증명하는데 헌신하였다. 결코 혼자가 아니었기에 버틸 수 있었던 세월이었다. 임시정부의 활동을 물심양면으로 도왔던 조력자들의 역할이 무엇보다 절실한 때였다. 낯익은 인물들과 함께 이름 없이, 대가 없이 그들을 도왔던 조력자들까지 그들 모두가 임시정부의 사람들이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조력자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이동


* 본 전시회 3부는 다음 포스팅으로 이어집니다. 아직 준비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