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궐/창덕궁 속으로

[창덕궁] 돈화문

지니쌤 동진이 2019. 11. 26. 00:35

창덕궁 (昌德宮)


창덕궁은 조선3대왕 태종(1405년)때 건립되었습니다. 법궁(法宮)인 경복궁에 이어 이궁(離宮)으로 창건하였습니다. 태종이 경복궁 이외에 다른 궁을 창건한 이유는 경복궁에서 두 차례의 왕자의 난을 통해서 이복형제, 동복형제등과 함께 칼로 싸움을 하였던 기억이 있던 장소이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임진왜란때 조선의 모든 궁궐들이 불 탔는데, 백성들을 버리고간 왕에 백성들이 분노하여 불 질렀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임진왜란 후 광해군(1601년)은 창덕궁을 재건하였으며 이후 약 270년동안 조선의 법궁 역할을 하였습니다. 창덕궁의 특징은 자연과 조화를 이루도록 건축하였다는 것입니다. 창덕궁 옆의 창경궁과 함께 조선의 동궐이라고 불르기도 하였으며 창덕궁과 창경궁을 그린 동궐도는 당시 궐읠 모습을 아주 잘 묘사해 주고 있습니다.


일제강점기때 다른 궁궐과 마찬가지로 많은 수난을 받았으며 1991년부터 복원작업 했고, 1997년 12월 6일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가 되었습니다.

[동궐도: 국보 제249호. 창덕궁과 창경궁의 전체 모습을 그린 가로 576cm, 세로 273cm의 큰 그림. 열여섯 폭의 비단에 동양화와 서양화의 기법을 모두 활용하여 아름답게 채색한 이 그림은]



돈화문 (보물 제383호)


돈화문(敦化門)


돈화문은 창덕궁의 정문으로 태종12년(1412년)에 세워졌습니다. 돈화란 임금이 덕을 베풀어 배성을 돈독하게 교화한다.는 뜻입니다.


경복궁이 광화문에서 교태전까지 일직선인데 반해 창덕궁은 그렇지 않은데 이유는 자연의 모습을 해치지 않고 조화를 이루며 지어졌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창덕궁 앞에는 종묘가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정문을 궁궐의 남서쪽으로 세운것입니다.


다섯개의 문이 있지만 실제로는 세개의 문만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가운데 문은 왕이 사용하는 문이었으며, 오른쪽은 문관 왼쪽은 무관이 사용하는 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문은 왕의 행차나 의례등이 있을 때 사용하였고, 평소에눈 서쪽의 금화문을 사용하였습니다. 금화문은 궐내각사와 가까운데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돈화문 2층 누각에는 오고(정오), 인정(통행금지시작22:30, 종28번), 파루(통행금지해제4:30, 북33번) 그리고 도성문이 여리는 시각에 맞추어 종과 북을 쳐서 사람들에게 시각을 알려주었습니다.


현존하는 궁궐문중 가장 오래된 문이며, 처음에는 현판이 없었으나 성종때 서거정에 의해서 "돈화문"_백성을 돈독하게 교화하다. 라는 의미의 현판을 걸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