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니의 역사여행/소중한 우리유산

[세계유산 조선왕릉] 헌릉獻陵_태종과 원경왕후

지니쌤 동진이 2019. 12. 23. 15:56

헌릉獻陵

-태종과 원경왕후-



릉연혁


 조성일자: 세종2년(1420년)에 원경왕후가 먼저 세상을 떠났고, 광주 대모산(현재 서울 대모산)에 능을 조성했다. 원경왕후의 능릉 조성할 때 태종의 능자리를 미리 만들었으며, 세종4년(1422년) 태종이 세상을 떠나 릉을 조성했다. 서쪽이 태종의 릉이며, 동쪽이 원경왕후의 능으로 쌍릉 형식으로 조성하였다. 사적 제194호이다.


위치: 서울 서초구 헌인릉길 36-10

 릉형식: 쌍릉
 제향일: 태종_6월8일(양력)

                원경왕후_8월27일(양력)

관람정보조선왕릉 홈페이지

                  http://royaltombs.cha.go.kr/multiBbz/selectMultiBbzView.do?id=64&no=64&bbzId=tombs&mn=RT_01_09_03



태종


태종은(1367년5월16일_공민왕16년~1422년5월10일_세종4년) 조선 3대 왕이며, 재위기간은 1400년~1418년이다.

고려 우왕 9년(1383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밀직사대언이되었다. 조선왕 중에서 유일하게 과거급제한 경력이 있는 왕이기도 하다. 태조 이성계의 첫번째 왕비 신의왕후의 다섯째 아들이며, 조선을 건국할 때 공을 세웠다. 조선이 건국된 후 세자로 태조의 두번째 비 신덕왕후의 아들 이방석이 책봉이 되었다. 신의왕후는 조선이 건국되기 전에 개경에서 먼저 죽었기 때문에 정치력에서 밀린 것으로 보인다. 조선이 건국할 때 큰 공을 세웠던 태종은 태조7년(1398년)에 왕자의 난을 일으켜 신덕왕후의 아들 세자 방석 그의 형제 방번을 죽였다.

이후 태조의 둘째 아들 방과(정종)가 세자가 되었으며, 이후 왕위에 올랐다. 정종은 다시 수도를 개경으로 옮겼고, 이때 다시한 번 왕자의 난이 일어난다(정종2년_1399년). 1차 왕자의 난에서 자신의 공에 비해 작은 상을 받았다고(논공행상) 생각한 박포가 이방간(회안군)과 함께 난을 일으킨 것이다. 이로 박포는 죽임을 당했고 방간회안군은 유배를 가게 된다.

이후 태종이 왕이 된다. 태종은 창덕궁을 지어 다시 한양으로 수도를 옮겼다(태종5년_1405년). 태종은 왕권강화를 위해 사병을 폐지하는 등 육조직계제로 체제를 바꾸는 등 많은 치적을 남겼다.


 태종우(太宗雨)


태종이 승하하기 전 세종에게 "현재 가뭄이 심하니 내가 죽어 영혼이 있다면 이날 비가 오게하겠다"라고 했다고 한다.(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이후 태종의 기일(음력5월10일)때 마다 비가 왔는데 이를 태종우(太宗雨)라고 부른다.


※ 태종에 대해 좀더 자세한 것은 본 블로거의 태종실록을 참고할 수 있다.

지니의 태종왕조 실록(1)(2)(3)

http://blog.daum.net/nasaro1/236

http://blog.daum.net/nasaro1/237

http://blog.daum.net/nasaro1/238


원경왕후


원경왕후 민씨(1365년 음력7월11일 ~ 1420년 음력7월10일)는 공민왕14년(1365년)에 민제와 삼한국대부인 송씨 사이에서 태었다. 고려 우왕8년(1382년)에 태종과 결혼했으며, 조선개국후 정녕옹주로 책봉되었다. 태종이 1차 왕자의 난을 성공할 수 있도록 큰 도움을 주었다. 정도전 등이 왕자들의 사병을 혁파하려 했을 때 무기등을 숨겨 두었다가 태종을 도운 것이다.

원경왕후는 왕비가 되었지만 태종은 외척을 멀리 하였으며, 원경왕후의 네명의 동생을 모두 유배보내 유배지에서 죽인다. 왕후와 태종의 관계는 좋지 않았다. 실록은 원경왕후가 질투심이 많은 여성으로 기록하면서 부정적으로 그리고 있지만 실록은 철저하게 태종 중심으로 쓰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원경왕후는 태종이 왕위를 세종에게 양위한 후에 후덕대왕대비가 되었으며 세종 2년(1402년)에 수강전 별전에서 태종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조선왕릉


조선왕릉은 세계문화 및 자연 유산의 보호에 관한 협약에 따라 인류의 문화유산으로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인정 받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세계유산 조선 왕릉은 조선시대 왕과 왕비의 능(40기)으로 우리의 전통무화를 담은 독특한 건축양식과 아름다운 자연이 어우러진 신성한 동간이며 지금까지도 이 곳에서 제례가 이어져 오는 살아있는 문화유산입니다.

<등재일 2009년 6월 30일>


헌릉 속으로





헌릉은 조선의 3대왕 태종과 원경왕후의 릉으로 쌍이다. 헌릉은 인릉(순조와 순원왕후)과 같은 장소에 조성되어 있다. 헌릉과인릉을 합쳐서 헌인릉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헌인릉으로 가는 길목에 재실이 먼저 보인다.


재실(齋室)


▲ 재실


▲ 재실


재실은 능을 관리하는 참봉이 상주하는 곳이다. 그리고 제례에 앞서 제관들이 먼저 와서 몸과 마음을 정화하면서 준비를 한다.
재실에는 향을 보관하는 안향청, 제기를 보관하는 제기고, 행랑체과 제례업무를 주관하는 전사청이 있다. 전사청에서는 제수음식을 준비하는 곳이다. 헌릉과 인릉에는 현재 남아있지 보통 왕릉의 홍살문을 지나면 왼쫅으로 수라갓이 있다. 수라간에서는 식으면 안되는 밥과 국등을 장만한다.


재실을 지나면 사진찍는데 주의해야 한다. 국가정보원입구이기 때문이다. 초기에 국가정보원은 릉을 많이 훼손했다. 심지어 인릉의 정자각앞에서는 가든파티를 하기도 했다 하니 문화제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한 일이라 할 수 있다. 다행이 현재는 문화재 보존에 중요한 인식을 하고 있어서 다행이기는 하다.


헌인릉 종합 안내도


헌인릉 종합안내도를 지나면 헌인릉 입구이다. 인릉이 먼저 보이며, 헌릉은 인릉을 지나 길을 따라 들어가면 보인다.


 홍살문


▲ 홍살문, 향로, 정자각, 비각


제일먼저 홍살문이보인다. 홍살문은 붉은색으로 된 문이며, 위에는 태극문양이 있고, 태극문양 위에는 삼지창이 있다. 홍살문은 신성한 안쪽이 신성한 곳임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며, 나쁜 악귀를 쫓아주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예로부터 귀신들이 붉을색을 무서워한다고 전해지기 때문이다. 뿐만아니라 귀신들은 휘날리는 옷을 입고 하늘을 날아다난다고 생각했는데 홍살문의 삼지창에 귀신 옷이 걸려서 들어가지 못하게 한다는 상징을 가지고 있다.


 향로


▲ 향로


홍살문을 지나면 가운데 길은 향로이다. 향로 옆으로 어로있는데, 헌릉의 어로는 소실되었다 향로는 축문과 향을을 제관들이 사용하는 길이며, 어로를 사용한다. 홍살문을 지나면 판위(배위)가 있는데, 이 역시 헌릉에서는 소실되었다. 이 길을 따라서 정자각으로 올라가는 것이다.


정자각


정자각


정자각은 고무래정(丁)자 모양으로 생겼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은 정전과 배위청(拜位廳)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산릉의례가 행해짅다. 즉 이곳에서 제수상이 차례지고 제사를 지내는 것이다.


▲ 향로계와 어계


향로와 어로를 따라서 정자각으로 향하면, 정자각 앞에서 왼쪽으로 꺽어지는 길이 나온다. 정자각 정면으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정자각 동쪽으로 올라가는 것이다. 길을 따라 가면 두개의 계단이 나온다. 향로계로 이어지는 계단을 향로계(香路階)라고 부르며, 어로로 이어지는 계단을 어로계(御路階, 동계)라고 부른다. 향로계에는 구름 문양이 새겨져 있기 때문에 운계라고 부르기도 한다.


정자각 월대의 서쪽에도 계단이 있는데 이는 수라간에서 준비한 음식을 올리거나, 축문을 태우러 소전대로 갈 때 사용하는계단이다.


비각


▲ 비각


▲ 비각


정자각 동쪽으로는 비각이 있다. 비각은 릉 주인의 표석을 보호하기 위해서 세운 것이다.


▲구신도비_세종4년(1422년)때 만든 것으로 보물1804호.

신 신도비_숙종21년(1695)때 다시 세운 것.


헌릉의 신도비각은 두개가 있다. 하나는 태종이 죽은 후 세종4년(1422년)때 만든 것으로 보물1804호로 지정되었다. 다른 하나는 임진왜란때 훼손된 태종의 신도비를 숙종21년(1695)때 다시 세운 것이다.


▲ 신도와 신문


신도와 신문


정자각 뒤로 가면 신도가 있다. 신도는 제향때 릉에서 혼이 내려올 때 사용하는 길이다. 제향때 정자각의 뒷쪽 문을 열어 놓는데, 그 문의 이름은 신문이다.


소전대


소전대


정자각 왼족으로는 소전대가 있다. 소전대는 제향때 사용한 축문을 태우는 곳이다. 조선 전기 태조고황제의 건원릉, 신덕고황후의 정릉, 태종의 헌릉에서만 볼 수 있는 석물이다.


 봉분과 주요 석물


헌릉_태종과 원경왕후(왼쪽이 태종이며, 오른쪽이원경왕후이다.)


헌릉은 태종과 원경왕후의 릉으로 쌍으로로 구성되어 있다. 봉분의 규모는 태종의 권력과 카리스마를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굉장이 크게 조성되서 있다. 봉분은 곡성으로 둘러싸여 있다. 곡성은 네모의 담인데 남쪽을 제외하고 둘러쌓여 있다. 곡장은 주역의 천원지방 원리에 따라서 지어진 것이다. 즉, 하늘은 원이고 땅은 네모인데, 곡성을 네모로 만들었고, 봉분을 원으로 만들면서 봉분을 하늘의 영역으로 신성함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병풍석과 난간석


▲ 헌릉의 병풍석과 난간석


 병풍석



병풍석


병풍석은 조선의 능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형식이다. 봉분의 흙이 흘러내리는 것을 방지하는 역할을 한다. 보통 십이지상을 새기며, 모서리에는 영저와 영탁, 그리고 모란 구름 등을 새기는데 모두 봉분을 보호하는 수호역할을 상징한다.


 난간석


난간석은 병풍석 밖으로 울타리를 두른것이다. 이 역시 병풍석과 마찬가지로 우리나라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석상이다. 통일신라의 성덕왕릉(736년)에서 처음 발견된다. 이 역시 봉분을 보호하는 기능을 하고 있다.


곡장, 석호, 석양, 석마


▲ 곡장, 석호, 석양, 석마, 난간석 일부


▲ 석양과 석호





태릉의 봉분에는 석양2쌍과 석호2쌍이 있다. 이들은 모두 릉을 지키는 수호동물의 역할을 한다. 음과 양의 조화로 호랑이의 용맹함과 양의 순함을 함깨 배치한 것이다. 그리고 양은 어미의 젖을 먹을 때 무릎을 꿇고 먹는데 이는 유교의 효와 충을 나타내는 상징을 가지고 있다.


혼유석과 망주석


혼유석과 망주석


봉분 앞에는 혼유석이 있다. 이는 우리나라에서 발견되는 독창적인 것이다. 혼유석은 제수상을 차리는 용도가 아니고 릉의 혼이 노는 곳이다. 시신을 안장하고, 그 통로를 막은 후 그 위에 박석과 북 모양의 둥근 고석을 놓고 혼유석을 설치한다.


망주석은 봉분 앞에 놓이면서 무덤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이다. 이는 릉을 떠난 혼이 멀리서도 릉의 위치를 확인 하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망주석은 중국에서도 발견되는데 조선과 좀 다른 목적으로 설치를 했다. 중국에서는 무덤 앞 등에 놓이면서 무덤의 입구임을 말해주는 역할을 한다. 조선에서 독자적으로 발전시킨 형태라고 할 수 있다.


문무석, 석마, 장명등


문무석, 석마, 장명등


문무석은 모두 두쌍, 석마도 네쌍이다. 즉, 문석 4기, 무석 4기, 석마 8기이다. 석마는 문무석의 숫자에 맞춘 것이다.


장명등은 묘역을 밝히기 위해서 만든 것이다. 그렇지만 불을 피운 흔적은 발견되지 않는다. 단지 상징적으로 만든 것으로 보인다.



 조선왕릉의 공간 구성



진입공간

진입공간은 재실에서부터~금천교(禁川橋)까지이다. (금천교: 건너가는 것을 금하는 다리) 금천교 건너편은 신성한 영역임을 상징하는 것이다. 진입공간에는 연지등이 조성된다.


제향공간

제향공안은 금천교~정자각까지이다.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가 만나는 곳이며, 정자각이 중심 전각이다. 홍살문, 판위, 향로, 어로, 수라간, 수복청, 비각, 정자각이 있다. 정자각에서 제례후 소전대에서 축문을 태우는데 후기에는 예감으로 바뀌었다. 정자각뒤 동쪽에는 산신석이 있는데 이곳에서는 산신령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고종황제(홍릉)와 순종황제(유릉)의 능에는 어로가 향로 좌우에 있으며, 어로와 향로쪽에 석수가 놓여져 있다. 이는 황제국의 양식에 따른 것으로 왕릉의 석수는 능침공간에 있으면서 왕릉을 지키는 역할을 한다면, 황제의 릉의 석수는 제향공간에 두면서 황제국의 권위와 과시용도로 놓인 것이다.


능침공간

능침공간은 정자각에서 봉분까지로 이곳은 다시 상계, 중계, 하계, 세곳으로 나누어진다.

상계는 초계라고도 하며 봉분이 있는 곳이다. 봉분에서부터 망주석이 있는 곳으로,봉분, 곡장, 병풍석, 난간석, 석호, 석양, 혼유석, 망주석이 있다.

중계는 문인석과 장명등이 있다. 문인석을 한단계 높인 것은 문치를 내세운 조선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하계는 무인석과 석마가 있다. 무인석이 한단계 내려와 있으나 영조(영릉)부터는 중계 하계의 구분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