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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유산 조선왕릉] 인릉仁陵(순조와 순원왕후)_순조숙황제와 순원숙황후

지니쌤 동진이 2019. 12. 23. 18:39

인릉仁陵

순조숙황제와 순원숙황후

(순조와 순원왕후)


 릉연혁


인릉은 조선 23대 왕 순조와 순원왕후 김씨의 능이다. 봉분은 하나인 합장이다. 우왕좌비의 형식에 따라 동쪽이 순조이며, 서쪽이 순원왕후 이다. (즉, 정자각에서 올려 봤을 때 왼쪽이 순조이고 오른쪽이 순원왕후이다.)

릉은 원래 파주에 있었다. 그러나 풍수지리상 좋지 않다 하여 철종7년(1856년) 천장(이장) 했다. 그런데 과연 이것이 풍수지리상 좋은 곳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곳은 원래 세종의 릉(영릉)이 있던 곳이었다. 세종 역시 이곳이 풍수지리상 좋지 않다 하여 다른 곳으로 천장하였기 때문이다. 풍수지리상 좋지 않다 하여 옮겼는데, 이곳 역시 풍수지리상 좋은 자리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소 인릉은 세종의 릉(영릉)을 천장하면서 묻어 두었던 석물과, 장경왕후(중종의 비_희릉)의 천장때 묻어 두었던 석물을 다시 꺼내 사용하였다는 기록이 있다.그 이유는 당시 재정상 그랬다고는 하나 왕의 릉을 조성하는데 다른 사람의 릉에서 사용했던것을 재사용한것은 순조의 권력이 그리 강력하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아이러니 하게도 권력이 약했던 순조의 릉은 조선 역사상 가장 권력이 강했고 카리스마가 넘쳤던 태종의 릉(헌릉)과 같은 지역에 릉이 조성되었다. 태종은 왕권 강화를 위해서 엄청난 힘을 쏟아 부었는데 후대에 이렇게까지 왕권이 무너질것을 예상했을까? 이런 것을 보았을 때 영원한 것은 이 세상에 없다는 것을 새삼깨닫게 해 준다.


 위치: 서울 서초구 헌인릉길 36-10

 릉형식: 합장릉
 제향일: 10월 20일(양력)

관람정보조선왕릉

http://royaltombs.cha.go.kr/multiBbz/selectMultiBbzView.do?id=64&no=64&bbzId=tombs&mn=RT_01_09_03


 순조


순조(1790년 음력6월18일 ~ 1834년 음력11월13일, 재위 :1800년 음력7월 4일 ~ 1834년 음력11월13일)는 정조와 유비 박씨의 아들이다. 정조14년(1790년) 창경궁 집복헌에서 태어났다. 정조24년(1800년) 왕세자로 책복되었고, 정조를 이어 조선의 24대 왕으로 즉위하였다. 그러나 11살이었던 순조를 대신해 대왕대비였던 예순대왕대비(정순왕후) 김씨(벽파의 수장)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벽파는 정조를 반대했던 당시 정파였다. 시파는 정조를 따랐던 정파를 말한다. 초기에는 대비의 영향으로 벽가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후 순조가 친정을 하면서 시파의 힘이 세진다. 그러나 나라는 왕권보다 세도가 즉, 왕후의 친적등 특정 가문에게 권력이 집중되면서 왕권은 약화된다. 나라를 돌보기보다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채우면서 서북지역에서 홍경래의 난이 일어나기도 한다(1811).

순조에게는 아들로 효명세자가 있었는데 순조는 효명세자가 그의 할아버지(정조)를 닮았다고 할 정도로 비상한 머리를 가지고 있었던것으로 보인다, 순조는 효명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명하면서 세도가의 권력을 누르려고 하였다. 효명세자의 수렴청정으로 세도가의 권력을 어느정도 제어할 수 있었지만 효명세자는 오래 살지 못하고 일찍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후 다시 안동김씨 등 특정가문에게 권력이 넘어갔다.

순조는 후에 고종황제가 대한제국을 선포한 후 순조숙황제로 추존되었다.


 순원왕후


순원숙황후 김씨(1789년 음력5월15일 ~ 1857년 음력8월4일)는 안동김씨 김조순와 청양부부인심씨의 딸이다.  순조가 왕이된 후 예순대왕대비(정순왕후) 김씨 수렴청정을 했었다. 이후 순조가 친정을시작하면서 안동김씨 세도정치가 시작되었다.

순조가 죽고 그의 손자 헌종이 8살의 나이로 즉위하자 순원왕후김씨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헌종의 왕후로는 김조근의 딸로(효현왕후) 책봉했다. 헌종 이후 철종이 즉위했을 때 다시한 전 수렴청정을 하였다. 철종은 김조순의 7촌조카 김문근의 딸(철인왕후)과 혼인을 하였다. 이렇게 안동김씨의 세도정치는 극에 달하고 있었다.

순원왕후는 조선 역사상 2대에 걸쳐 수렴청정을 한 왕후로 기록이 되며, 철종8년(1857년) 창덕궁 양심합에서 세사을 떠났다.


고종황제가 대한 제국을 선포한 후 순원숙황후로 추존되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조선왕릉


조선왕릉은 세계문화 및 자연 유산의 보호에 관한 협약에 따라 인류의 문화유산으로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인정 받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세계유산 조선 왕릉은 조선시대 왕과 왕비의 능(40기)으로 우리의 전통무화를 담은 독특한 건축양식과 아름다운 자연이 어우러진 신성한 동간이며 지금까지도 이 곳에서 제례가 이어져 오는 살아있는 문화유산입니다.

<등재일 2009년 6월 30일>


인릉 속으로




인릉은 조선의 23대왕 순조(순조숙황제)과 순원왕후(순원숙황후) 릉으로 쌍이다. 헌릉은 인릉(순조와 순원왕후)과 같은 장소에 조성되어 있다. 헌릉과인릉을 합쳐서 헌인릉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헌인릉으로 가는 길목에 재실이 먼저 보인다.


재실(齋室)


▲ 재실


▲ 재실


재실은 능을 관리하는 참봉이 상주하는 곳이다. 그리고 제례에 앞서 제관들이 먼저 와서 몸과 마음을 정화하면서 준비를 한다.
재실에는 향을 보관하는 안향청, 제기를 보관하는 제기고, 행랑체과 제례업무를 주관하는 전사청이 있다. 전사청에서는 제수음식을 준비하는 곳이다. 헌릉과 인릉에는 현재 남아있지 보통 왕릉의 홍살문을 지나면 왼쫅으로 수라갓이 있다. 수라간에서는 식으면 안되는 밥과 국등을 장만한다.


재실을 지나면 사진찍는데 주의해야 한다. 국가정보원입구이기 때문이다. 초기에 국가정보원은 릉을 많이 훼손했다. 심지어 인릉의 정자각앞에서는 가든파티를 하기도 했다 하니 문화제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한 일이라 할 수 있다. 다행이 현재는 문화재 보존에 중요한 인식을 하고 있어서 다행이기는 하다.


헌인릉 종합 안내도


헌인릉 종합안내도를 지나면 헌인릉 입구이다. 인릉이 먼저 보인다.


▲ 홍살문


홍살문은 붉은색으로 된 문이며, 위에는 태극문양이 있고, 태극문양 위에는 삼지창이 있다. 홍살문은 신성한 안쪽이 신성한 곳임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며, 나쁜 악귀를 쫓아주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예로부터 귀신들이 붉을색을 무서워한다고 전해지기 때문이다. 뿐만아니라 귀신들은 휘날리는 옷을 입고 하늘을 날아다난다고 생각했는데 홍살문의 삼지창에 귀신 옷이 걸려서 들어가지 못하게 한다는 상징을 가지고 있다.


▲ 판위(판위)


판위(배위)로 왕이 제례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곳으로 이곳에서 절을 4배 한다.


향로와 어로


홍살문을 지나면 가운데 길은 향로이다. 향로 옆으로 어로있는데, 헌릉의 어로는 소실되었다 향로는 축문과 향을을 제관들이 사용하는 길이며, 어로를 사용한다.



▲ 향로계와 어계


향로와 어로를 따라서 정자각으로 향하면, 정자각 앞에서 왼쪽으로 꺽어지는 길이 나온다. 정자각 정면으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정자각 동쪽으로 올라가는 것이다. 길을 따라 가면 두개의 계단이 나온다. 향로계로 이어지는 계단을 향로계(香路階)라고 부르며, 어로로 이어지는 계단을 어로계(御路階, 동계)라고 부른다. 향로계에는 구름 문양이 새겨져 있기 때문에 운계라고 부르기도 한다.


▲ 정자각 서쪽 계단


정자각 월대의 서쪽에도 계단이 있는데 이는 수라간에서 준비한 음식을 올리거나, 축문을 태우러 소전대로 갈 때 사용하는계단이다.


▲정자각

 

정자각내부_3768, 열려져 있는 신문

   제향일: 매년10월 20일 양력


정자각은 고무래정(丁)자 모양으로 생겼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은 정전과 배위청(拜位廳)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산릉의례가 행해짅다. 즉 이곳에서 제수상이 차례지고 제사를 지내는 것이다.


정자각 내부에서 보면 반대편이 문이 열려있다. 이 문은 신문이다. 즉, 신들의 문이라는 것이다. 제향시 릉에서 혼이 내려올 때 사용되는 문으로 만든 것이다.


▲ 소전대


▲ 예감_조선전기에는 소전대를 후기에는 예감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비각


정자각 동쪽으로는 비각이 있다. 비각은 릉 주인의 표석을 보호하기 위해서 세운 것이다.


구 신도비_조선시대에 세워짐

신 신도비_대한제국때 세워짐.


인릉의 신도비는 2기가 있다. 첫번재 신도비는 조선때 세운 것이며, 두번째 신도비는 고종황제가 대한제국을 선포한 후에 세워진 신도비이다. 조선시대에 세워진 신도비에는 (조선국 순조대왕 인릉 순원왕후 부좌‘朝鮮國 純祖大王 仁陵 純元王后 ?左’)이라고 적혀 있으며, 대한제국때 세워진 신도비에는 황제국 표석으로 (대한 순조숙황제 인릉 순원숙황후 부좌‘大韓 純祖肅皇帝 仁陵 純元肅皇后 ?左‘)이라고 쓰여져 있다. 



▲ 능침, 곡장, 혼유석, 망주석, 문무인석, 석마, 장명등


▲ 문무인석, 석마, 장명등

▲ 능침, 곡장, 망주석, 혼유석, 문무인석, 석마, 장명등


인릉은 조선23대왕 순조와 순원왕후의 릉으로 합장으로 조성되었다. 릉은 다른릉과 마찬가지로 곡장으로 둘러싸여져 있다. 곡장은 남쪽을 제외하고 삼면으로 조성되어있다. 이는 주역의 천원지방의 원리에 의해서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즉 하늘은 둘글도 땅은 네모이다 라는 원리에 의해 곡장으로 네모를 표시한 것이며, 봉분으로 원을 표시한 것이다.


인릉은 병풍석은 없이 난간석만 조성되어 있다. 난간석은 봉분을 두른것으로 우리나라에서만 발견할수 있는 특징이다. 통일신라의 성덕왕릉(736년)에서 처음 발견된다. 이 역시 봉분을 보호하는 기능을 하고 있다.


 석호와 석양


석호와 석양이 봉분 삼면을 둘러싸고 있다. 이들은 릉을 지키는 수호동물의 역할을 한다. 음과 양의 조화로 호랑이의 용맹함과 양의 순함을 함깨 배치한 것이다. 그리고 양은 어미의 젖을 먹을 때 무릎을 꿇고 먹는데 이는 유교의 효와 충을 나타내는 상징을 가지고 있다.


 혼유석

봉분 앞에는 혼유석이 있다. 이는 우리나라에서 발견되는 독창적인 것이다. 혼유석은 제수상을 차리는 용도가 아니고 릉의 혼이 노는 곳이다. 시신을 안장하고, 그 통로를 막은 후 그 위에 박석과 북 모양의 둥근 고석을 놓고 혼유석을 설치한다.


망주석


망주석은 봉분 앞에 놓이면서 무덤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이다. 이는 릉을 떠난 혼이 멀리서도 릉의 위치를 확인 하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망주석은 중국에서도 발견되는데 조선과 좀 다른 목적으로 설치를 했다. 중국에서는 무덤 앞 등에 놓이면서 무덤의 입구임을 말해주는 역할을 한다. 조선에서 독자적으로 발전시킨 형태라고 할 수 있다.


문무석인

능침에는 문석인이, 그 옆로 문석인이 서 있다. 이는 조선시대의 문무백관을 상징하는 것으로 왕옆에서 왕의 보좌하고 있는 것이다.


장명등

장명등은 묘역을 밝히기 위해서 만든 것이다. 그렇지만 불을 피운 흔적은 발견되지 않는다. 단지 상징적으로 만든 것으로 보인다.


 조선왕릉의 공간 구성



진입공간

진입공간은 재실에서부터~금천교(禁川橋)까지이다. (금천교: 건너가는 것을 금하는 다리) 금천교 건너편은 신성한 영역임을 상징하는 것이다. 진입공간에는 연지등이 조성된다.


제향공간

제향공안은 금천교~정자각까지이다.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가 만나는 곳이며, 정자각이 중심 전각이다. 홍살문, 판위, 향로, 어로, 수라간, 수복청, 비각, 정자각이 있다. 정자각에서 제례후 소전대에서 축문을 태우는데 후기에는 예감으로 바뀌었다. 정자각뒤 동쪽에는 산신석이 있는데 이곳에서는 산신령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고종황제(홍릉)와 순종황제(유릉)의 능에는 어로가 향로 좌우에 있으며, 어로와 향로쪽에 석수가 놓여져 있다. 이는 황제국의 양식에 따른 것으로 왕릉의 석수는 능침공간에 있으면서 왕릉을 지키는 역할을 한다면, 황제의 릉의 석수는 제향공간에 두면서 황제국의 권위와 과시용도로 놓인 것이다.


능침공간

능침공간은 정자각에서 봉분까지로 이곳은 다시 상계, 중계, 하계, 세곳으로 나누어진다.

상계는 초계라고도 하며 봉분이 있는 곳이다. 봉분에서부터 망주석이 있는 곳으로,봉분, 곡장, 병풍석, 난간석, 석호, 석양, 혼유석, 망주석이 있다.

중계는 문인석과 장명등이 있다. 문인석을 한단계 높인 것은 문치를 내세운 조선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하계는 무인석과 석마가 있다. 무인석이 한단계 내려와 있으나 영조(영릉)부터는 중계 하계의 구분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