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수업/초등학교 6학년 1학기 사회

[초등학교6학년 1학기 사회] 1. 조선사회의 움직임_4)조선시대 여성의 삶_첫번째

지니쌤 동진이 2017. 4. 6. 10:51

[초등학교 6학년 1학기 사회]

 

1. 조선사회의 새로운 움직임

    1) 전란의 극복

    2)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인 조선

    3) 서민 문화의 발달

    4) 조선 시대 여성의 삶

    5) 조선을 뒤덮은 농민의 함성

 

학습내용: 조선시대 여성의 삶을 알아봅시다.

 

고려 시대의 여성은 차별 없이 재산을 상속 받고 제사를 지냈으며, 재혼도 할 수 있었다. 이러한 여성의 지위는 조선 전기까지 이어지다가 조선 중기 이후 유고 질서가 더욱 강화되면서 점차 낮아졌다.

조선 시대에는 유교의 영향으로 남녀가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였고 신분을 엄격하게 구분하여 양반 여성과 상민 여성의 삶이 달랐다.

조선 시대의 여성의 삶은 어떠하였을까? (34쪽)


<그림 신윤복의 장옷입은 여인> 국립중앙박물관 장옷은 조선시대 여성이 외출할 때 입던 두루마기와 비슷한 모앙의 옷이다. 두 여성을 보면 당시 여성의 삶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옷의 여성의 옷차림을 봐 보세요. 한 여성은 장옷(머리쓰개)를 하고 있으며, 다른 여성은 머리쓰개를 하지 않았고 아기를 업고 있는 모습니다. 장옷을 쓰고 있는 여성은 양반집 여인이며, 아기를 업고 있는 여성은 상민일 것입니다.

조선시대의 여성은 밖을 함부러 다닐 수 없었습니다. 특히 신분이 높을수록 업격했습니다. 밖에는 나간다 하더라도 그림과 같이 머리쓰개를 하고 얼굴을 가려야 했습니다. 마치 이슬람교 여성들이 히잡을 쓰고 있는 거처럼 말이에요. 조선시대의 여성들은 어떻게 살았을까요? 한번 살펴봅시다.

  

조선시대 여성의 삶을 알아봅시다.

조선 전기에는 여성이 결혼을 하고 오랫동안 친정살이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조선 중기부터는 점차 시집살이로 바뀌어 여성은 결혼을 하면 시집으로 들어가 살게 되었다.(35쪽)


조선시대 결혼제도에 대해서 잠시 살펴봐요. 조선시대에는 꼭 결혼을 해야만 했습니다. 가난해서 결혼을 못했으면 나라에게 지원해 주기도 했습니다. 수령은 자기 고을에 가난해서 결혼을 하지 못한 사람이 있으면 국가에 재정을 청구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 이를 하지 않으면 처벌을 받았어요. 정조(22대왕)는 2년에 한 번 조사를 해서 결혼을 시켰습니다.


결혼을 할 때 요즘에도 흔히 쓰는 말이 있습니다. 시집간다. 장가간다. 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시집에 들어간다. 장인장모 집에 들어간다. 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조선시대 결혼은 남자와 여자의 결혼은 집안과 집안이 하나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흔치 “친영(親迎)”이라고 말을 합니다. 친히 맞이 한다라는 뜻으로 신랑이 신부 집에 가서 신부를 데려 온 후 신랑집에서 혼례를 치리는 것을 말 합니다. 남자 중심의 결혼풍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전통적인 결혼 풍습은 이렇지 않았습니다. “남귀여가(男歸女家)”였습니다. 이 풍습은 고구려의 데릴사위제와 같이 일정기간 신부 집에서 거주하는 것입니다. 고구려의 혼인제도에는 서옥제라는 것이 있습니다. 서옥이라는 작은 집은 집고 신혼부부가 지내게 햇습니다. 여기서 “서방”이라는 말이 여기서 나오게 되었습니다.

이런 결혼 풍습은 조선 초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나 조선 중기를 거쳐 후기로 오면서 새로운 형태의 결혼 풍습이 생긴 것입니다.

바뀐 결혼 풍습에 가장 문제가 되는 혼수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전통 혼례에서는 천천히 혼수를 마련해도 되었는데, 친영제 결혼에서는 급하게 혼수를 준비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양반계층의 사람들은 이를 잘 지키지 않고 “반친영”을 했습니다. 신부집에서 혼례를 치르고 3-4일 혹은 1년정도 신부집에서 사는 것을 말 하는 것입니다.


질문? 여성의 입장에서 친정살이를 하는 것과 시집살이를 하는 것은 어떤 차이가 있었을까요?

 <그림 김홍도의 평생도> 중 혼례. 국립중앙박물관 


양반계층의 남성과 여성은 조선 후기로 갈수록 하는 일, 집안에서 지내는 장소 등이 더 명확하게 구분되었다. 이에 따라 어렸을 때부터 남성과 여성이 받는 교육도 달랐다.

남성은 주로 관리가 되기 위하여 유학 교육을 받았으나 여성은 시집을 가서 자식을 키우고 일상 생활을 할 수 있을 정도의 교육만 받았다. 여성은 음식 장만, 손님 맞이 등의 집안 일을 하였고 남편이 죽은 후에도 재혼하기 어려웠다.(36쪽)


조선 후기로 갈수록 여성들은 남성들과 더욱더 구별이 되었습니다. 34쪽 그림에서 보았듯이 여성들은 꼭 장옷(머리쓰개)를 하고 다녀야 했습니다. 함부로 밖에 다닐 수 없었어요. 과거시험을 볼 수도 없었고, 집안일만 배웠습니다.

성종의 어머니 인수대비가 쓴 내훈(內訓)은 여성들을 위한 책이었습니다. 그 내용은 보면 “덕을 베풀어야 한다. 열심히 일을 해야 하고 자랑은 하면 안된다. 깨끗하고 단정한 용모. 옳은 것만 말 해야 한다.”등의 말이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주장을 하면 안되었습니다. 집안의 남자의 말을 듣고 따라야 했습니다.

내훈(內訓)에 삼종지도라는 것이 나오는데 “친정에서는 아버지를 따르는 것이고, 시집가서는 남편을 따르는 곳이고, 남편이 죽으면 아들의 뜻을 따르는 것”을 말 합니다. 교과서에도 그림으로 설명을 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성들은 재혼을 할 수 없었습니다. 재혼이 법적으로 금지를 한 것은 아니었지만 재혼을 한 경우 그 자녀들은 과거시험을 볼 수 없었습니다. 재혼을 하지 않고 과부로서 오랫동안 살아온 여성들에게 “열녀문”을 세워 주었고, 그 집안은 그것을 가문의 영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열녀문


상민 여성은 집안일과 동시에 농사일을 하면서 무명과 삼배를 만들기도 하였다. 천민 여성은 관청, 양반집 등엣에서 도맡아 하였다. (37쪽)


아래 그림들은 조선후기 서민 여성들의 삶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김홍도의 길쌈 국립중앙박물관

이 그림은 당시 서민 여성들의 생활사를 잘 볼 수 있습니다. “길쌈”은 실을 가지고 옷감을 짜는 일을 말 합니다. 상단의 여성은 베매기를 하고 있고, 아래 여성은 베를 짜고 있습니다. 베매기란 베를 짜려고 날아 놓은 실을 매는 일을 말 합니다. 아래 길쌈하는 여성 뒤에 시어머니로 보이는 분이 아기를 업고, 손자와 함께 서 있습니다. 뭔가 못마땅해 보이는지 인상을 찌푸린 듯 보입니다. 그 옆에 아기는 귀엽게 웃고 있네요. 시어머니는 잘좀 하라고 시집살이를 시키는 것 같기도 하고 아이는 눈치 없이 “엄마 할머니가 잘 좀 하래. 더 빨리 하라는데”라고 말을 하고 있는거처럼 보입니다.

 김홍도의 빨래터 국립중앙박물관

이 그림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누가 그렸는지는 몰라도 한번쯤 어디선가 본 적이 있을 거에요. 빨래터에서 빨래를 하고 있는 여성들, 머리를 손질하고 있고, 옆에는 아기가 보채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 남성이 바위 뒤에 숨어서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훔쳐 보고 있습니다.

이 그림은 여성들의 생활을 보여 주고 있는데, 잠시 눈을 돌려 남성을 살펴 봅시다. 남성은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데, 부채는 더울 때 시원하게 해주는 용도일 뿐만 아니라 남자와 여자가 내외하기 위함 물건이기도 했습니다. 여성이 밖에 나갈 때 장옷으로 얼굴을 가렸다면 남자는 부채를 들고 다니면서 여성과 지나칠 때 부채로 얼굴을 가리는데 사용했습니다.

    <그림> 윤두서의 나물캐기 고산 윤선도의 유물 전시관

이 그림은 나물을 캐는 여성들을 그린 것입니다. 한 여성은 망태기를 들고 허리를 숙이고 나물을 캐고 있습니다. 또 한 여성은 허리가 아픈지 잠시 허리를 쭉 펴고 있는 거 같습니다. 저 멀리 날아가는 새를 바라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고단한 일상을 보내고 있는 조선후기의 여성들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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