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수업/초등학교 6학년 1학기 사회

[초등학교6학년 1학기 사회] 1. 조선사회의 움직임_4)조선시대 여성의 삶_두번째

지니쌤 동진이 2017. 4. 6. 13:53

[초등학교 6학년 1학기 사회]

 

1. 조선사회의 새로운 움직임

    1) 전란의 극복

    2)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인 조선

    3) 서민 문화의 발달

    4) 조선 시대 여성의 삶

    5) 조선을 뒤덮은 농민의 함성

 

학습내용: 조선시대 여성의 삶을 알아봅시다.

 

남존여비 사상으로 여성들이 차별을 받으며 인정을 받지 못하였지만 훌륭한 업적을 남긴 여성도 있습니다. 여성을 낮고 천하게 보던 시절 남성들보다 훨씬 훌륭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남존여비 사상으로 여성들을 억압하지 않았다면 더 많은 인물들이 배출되었을텐데 안타깝습니다. 어떤 여성들이 있는지 한번 살펴 봅시다.

남존여비란(男尊女卑)란? 사회적 지위나 권리에 있어 남자를 여자보다 우대하고 존중하는 일.)


조선시대에 대부분 여성은 사회 활동에 참여하지 못하였지만 훌륭한 업적을 남긴 여성도 있다. 대표적으로 신사임당, 허난설헌, 김만덕 등이 있다.(38쪽) 


신사임당

신사임당은 어려서부터 바느질과 그림에 남다른 재능이 있었고 꾸준히 교육을 받아 학식이 높았다. 결혼 후에는 자녀들을 훌륭하게 키웠는데 그 중에서 이이는 조선시대의 뛰어난 학자로 존경 받았다.(38쪽)

 [여기서 잠깐! 신사임당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사임당은 이름이 아니라 당호(堂號)입니다. 본명은 인선, 신인선입니다.]

신사임당의 초충도, (국립중앙 박물관) 풀과 곤충을 소재로 한 그림이다.

참고[신사임당의 산수화] 신사임당은 당시 초충도 보다 산수화가 더 유명합니다. 훗날 송시열 등이 신사임당이 여성이라는 이유로 산수화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초충도만을 인정했습니다. 여성으로서 방에만 앉아서 취미로 그림을 그렸다는 등 성리학적인 사회속의 현모양처의 이미지가 이 때문에 만들어졌습니다. 하지만 신사임당은 조선의 여성상과는 벗어난 자기주장이 있는 여성이었고 진취적인 여성이었습니다.]


조선시대에 여성들이 그림을 그리는 것을 불경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신사임당은 조선시대에 뛰어난 화가로서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녀가 어떻게 뛰어난 화가로 인정을 받을 수 있었을까요?

신사임당(申師任堂,1504년~1551년)은 신명화의 다섯 딸 중 둘째딸로 태어났습니다. 신사임당은 어릴 때부터 예술적 재능이 있었습니다. 신사임당이 누군가에게 그림을 배운 것은 아닐 것입니다. 당시 여성이 스승을 찾아서 그림을 배울수 있는 시대는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녀가 천재성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열린 사고를 가진 부모와 외조부의 영향이 컸습니다. 외조부 이사온은 어린 인선이 어머니가 놓는 자수를 곧잘 따라 하는 모습을 보고 일곱 살 때부터 정식으로 그림을 그리도록 했고, 아버지 신명화는 딸들에게도 어려서부터 성리학과 그림을 가르쳤습니다.

 

신사임당은 화가로서 사람들에게 인정 받았습니다. 심지어 신사임당의 모작 그림도 돌아 아닐 정도였습니다. 신사임당이 그린 그림이 아님에도 신사임당이 그렸다고 하며 돌아다닌 것입니다. 심지어 숙종(19대왕)도 신사임당의 모작 그림으로 만든 병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병풍에는 율곡모의 모작그림이라고 쓰여져 있다고 하네요. 신사임당은 이렇게 화가로서 인정을 받았습니다.

 

당시 신사임당에 대한 평가를 한 번 봅시다.

이항복은 "진사 신명화가 딸 하나를 특히 사랑하였는데, 총명이 뛰어나고, 고금의 서적에 통달하며 글을 잘 짓고 그림을 잘 그렸다."

김장생은 "신씨는 기묘명현 명화의 따님으로 자품이 매우 특출하여 예에 익숙하고, 시에 밝아서 옛 여범에 대하여 모르는 것이 없었다."

신사임당의 아들 이이의 스승이었던 어숙원은 "신사임당의 그림은 안견 다음이다." 안견은 조선 초기 최고의 화가였습니다.

신사임당의 아들 이이는 어머님이 산수도를 그리셨는데 신묘하였고 또 포도를 그리셨으니 세상에서 견줄이가 없었다.

남자들 보다 낮게 평가되었던 여성에 대해서 조선시대 뛰어난 학자들이 신사임당에 대해서 평가를 내릴 정도로 뛰어난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허난설헌

허난설헌은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의 누나로, 어려서부터 글재주가 뛰어났습니다. 그러나 허난설헌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재능이 높에 평가되지 못하였고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후 허균은 누나의 시를 모아 책을 만들었으며 최고의 시인으로 칭찬을 받았습니다.(38쪽)



난설헌집 (오죽헌 시립 박물관), 허난설헌의 시를 모아 만든 문집이다.

 

허난설헌(許蘭雪軒, 1563~1589)의 본명은 초희(楚姬)입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허엽이었습니다. 오빠는 허성, 허봉이었고 동생은 우리들에게잘 알려진 허균(홍길동전 저자)입니다. 허난설헌의 집안은 당시 많은 시인들과 교류를 했다고 했고 이 때문에 허난설헌은 동생 허균과 함께 이달에게 시를 배웠습니다. 이달은 당시 뛰어난 시인이었습니다.

허난설헌이 열 살이 조금 넘었을 때 그녀의 실력은 소문이 났습니다. 열 여덟살에 <광한전백옥루상량문(廣寒殿白玉樓上樑文)〉이라는 장편 시를 지어 사람들에게 더우 인정을 받았다고 합니다.  

허난설헌은 한 남성에게 시집을 갔는데 그 때부터 괴로운 삶을 살기 시작했습니다. 남쳔 김성립은 김성립은 방탕한 생활을 했습니다. 그리고 두 자녀 역시 일찍 죽어 그녀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딸과 아들이 죽자 자신이 살고 있는 광릉에 무덤을 만들었고 자신이 죽으면 그 무덤 뒷자리에 마련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자녀들의 죽음을 애도하며 글을 쓴 글도 있습니다.


“지난 해엔 귀여운 딸을 잃었더니
이번 해엔 사랑하는 아들마저 잃었네
가슴 메어지도다, 광릉의 흙이여
작은 무덤을 나란히 마주 세웠네
······
응당 언니 아우의 혼들이 알아
밤마다 서로 손잡고 놀아라”

 

남존여비 세상 속에서 그녀는 힘들어 하며 괴로워 했습니다. 허난설헌은 삼한(三恨) 곧 ‘세 가지 한탄을 노래했습니다. 첫째는 조선에서 태어난 것, 둘째는 여성으로 태어난 것, 셋째는 남편과 금슬이 좋지 못한 것 이었습니다. 조선시대에서 살고 있는 여성으로 살아가는 것이 어떠한 것이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허난설헌은 27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녀가 세상을 떠나자 동생 허균은 중국 사신으로 갈 때 누나의 시를 중국에 알렸습니다. 그녀의 시는 중국에서 널리 알려졌습니다.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성리학의 사회속에서 재주를 마음껏 뽐내지 못했다는 것은 정말 안타깝습니다. 아마 남녀가 평등학 사회였다면 더욱더 활짝 꽃을 피울 수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김만덕

김만덕은 조선시대 상민 여성으로 사업가이자 사회 활동가였다.(39쪽)

[링크 참고] 본 블로그의 게시판에 따로 정리 하였습니다. 

http://blog.daum.net/nasaro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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