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수업/초등학교 6학년 1학기 사회

[초등학교6학년 1학기 사회] 1. 조선사회의 움직임_5)조선을 뒤엎은 농민의 함성

지니쌤 동진이 2017. 4. 10. 22:36

[초등학교 6학년 1학기 사회]

 

1. 조선사회의 새로운 움직임

    1) 전란의 극복

    2)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인 조선

    3) 서민 문화의 발달

    4) 조선 시대 여성의 삶

    5) 조선을 뒤덮은 농민의 함성


농민 봉기의 배경과 과정을 알아봅시다.


정조가 죽고 순조가 1800년에 11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왕의 장인을 비롯한 왕실의 외척들이 나라의 권력을 잡게 되었다. 이렇게 왕실의 외척 가문을 중심으로 몇몇 가문이 나라를 다스리는 것을 세도 정치라고 한다.

세도 정치는 순조, 헌종, 철종 때 까지 60여년 동안 계속되었다. 세도 정치로 부정부패를 일삼는 관리들이 늘어나 농민의 생활은 점점 더 어려워졌다.

세도 정치 시기에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40쪽)

<그림>혹호정도. 옥호정은 김조순(순조의 장인)의 집이다. 이 그림을 보면 당시 세도 정치로 권력을 잡은 사람의 생황을 짐작할 수 있다.

 

세도정치

정조(22대왕)가 승하하고 순조가 왕이 되었습니다. 순조의 나이는 11살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아직 어린 순조를 대신해 정순왕후(영조의 비)가 수렴청정을 하였습니다. 수렴청정이 끝나고 1804년부터 순조가 친정(왕이 직접 정치를 하는 것)을 시작했습니다. 순조가 친정을 시작했을 때 장인 김조순은 왕의 후견인이라는 명분으로 권력을 잡았습니다. 김조순은 자신의 친척(외척)들을 중요한 자리에 앉혀 정치를 하였습니다. 이로서 안동김씨의 세도정치가 시작되었습니다. 특정가문이 권력을 독잠하는 세도정치는 백성들의 삶을 어렵게 하였습니다. 이로서 1811년 홍경래의 난이 일어났으며, 1862년 농민봉기가 일어 났습니다.


수렴정청: 어린왕이 즉위하였을 때 왕대비나 대왕대비가 대신 나랏일을 보던 일.

참고: 정조의 죽음(1800년)

            시파_정조를 찬성하는 쪽, 벽파_정조를 반대하는 쪽

                                                  _정순왕후는 벽파

                                                  _천주교 반대 명분으로 정약용등 정조의 신하를 제거.

            순조의 친정(1804년)

                김조순은 시파,

                권력을 잡고 벽파를 제거함. 자신의 일가친척을 중요한 자리에 앉힘

                안동김씨 세도정치 시작.


세도정치 시기에 많은 관리들은 마음대로 세금을 거두러들어 백성을 힘들게 하였다.

조선에는 환곡이라는 제도가 있었다. 이 제도는 가난한 백성들을 돕기 위하여 봄에 나라에서 곡실을 빌려 주었다가 가늘에 이자를 붙여서 갚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억지로 곡식을 빌려주고 비싼 이자를 받는 관리들 때문에 백성들의 삶은 더욱 어려워졌다.(41쪽)

환곡의 문제를 나타낸 시_정약용의 하일대주 중 일부

환곡은 가난한 백성들에게 봄에 쌀을 빌려 주고 가을에 추수가 끝이 난 후에 갚게 하는 제도였습니다. 처음에는 이자가 없는 제도 였으나, 후에 약간의 이자가 붙었습니다. 그러나 작은 이자였기 때문에 백성들은 부담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세도정치가 시작 된 후 관리들의 부정이 심해졌으며 시간이 갈수록 백성들은 어려워졌습니다. 약간의 이자를 받았던 환곡은 이자가 올라갔습니다. 백성들이 빌려간 것 보다 더 많이 빌려간 것처럼 거짓말로 서류를 작성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빌려줄때는 모래 등을 쌀에 섞어서 빌려 주고 갚을 때는 온전한 쌀로 갚게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쌀을 빌리지 않아도 되는 백성들에게 강제로 빌려주기도 했습니다.

가난한 백성들을 돕기 위해서 만들어진 환곡은 오히려 백성들을 더욱더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농민봉기

홍경래의 난

관리들의 부정부패가 심해지자 백성의 불만이 커졌다. 특히 평안도 지역 사람들은 오랫동안 많은 차별과 멸시를 당하였기 때문에 다른 지역 사람들보다 불만이 더 컸다.

평안도에서 태어난 홍경래는 어려서부터 양반과 관리들에게 시달리는 농민의 어려운 생활을 목격하였고, 이러한 세상을 바꾸기 위하여 10여년 동안 치밀하게 봉기를 준비하였다.

1811년 홍경래는 세도 정치와 지역 차별을 비판하면서 평안도 사람들과 함께 난을 일으켰다. 홍경래 군은 열흘 만에 청천강 이북 지역을 장악하였으나 관군의 대규모 토벌 작전으로 정주성에서 진압되었다.

홍경래의 난은 실패로 끝났지만 그 뒤에 일어난 농민 봉기에 큰 영향을 주었다.(42쪽)


봉기: 백성이 벌떼처럼 떼를 지어 세차게 일어남.

조선 후기 백성들의 경제적인 수준이 올라갔습니다. 국가에서는 세금을 더 많이 거두려고 했으며, 땅을 가지고 있는 지주들은 자신의 땅에서 일을 하는 소작농들에게 더 많은 세를 받았으려고 했습니다. 이런 현실 속에서 농민들은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농민들은 지배하는 사람들의 말에 순종적이었지만 서당이 늘어나는 등 교육 수준이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장시의 발달로 장날 사람들이 모이면서 이웃마을의 소식을 듣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사회 변화 속에서 농민들은 새로운 의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세도정치는 날이 갈수록 심해졌으며 가장 고통을 받는 사람들은 농민이었습니다. 농민들은 도둑이 되기도 했으며 적극적으로 저항을 하기도 했습니다. 가장 규모가 큰 것은 평안도에서 있었던 홍경래의 난(1811년)과 진주에서 있었던 진주 농민봉기(1862년)였습니다. 특히 농민봉디는 전국적으로 퍼졌습니다.

 

평안도에서 살았던 홍경래는 몰락한 양반이었습니다. 조선 후기에 평안도는 다른 지역보다 차별을 받았기 때문에 백성들의 불만은 다른 곳 보다 컸습니다. 차별받으며 양반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농민들을 보고 홍경래는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 준비를 하였습니다. 홍경래의 지휘하에 광산 노동자들, 가난한 농부들, 중소상인들이 힘을 합쳤습니다. 열흘만에 청천강 이북지역을 점령 하였으나 5개월 만에 관군들에게 점령당하며 홍경래의 난는 끝났습니다.

<순무영진도> 서울대학교 규장학 한국한 연구원. 관군인 순무영군이 홍경래 군과 대치하고 있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진주농민봉기

홍경래의 난 이후에도 환곡을 비롯한 세금 징수 문제와 관리들의 부정부패가 개선되지 않아 전국 각지에서 농민 봉기가 일어났다. 이 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진주 농민 봉기였는데, 진주의 농민들은 관청으로 몰려가 탐관오리들을 굴복시켰다.

1862년 진주 농민봉기를 시작으로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여러 곳으로 이어졌고 곧이어 북쪽의 함흥에서 남쪽의 제주까지 이르렀다.(임술 농민봉기, 1862년)(43쪽)

<조선후기 농민봉기 지도>43쪽


홍경래의 난은 실패로 끝이 났습니다. 홍경래의 난 이후에도 관리들은 변함이 없었고 백성들은 더욱더 어려워 졌습니다. 이로서 진주에서 농민봉기가 일어났습니다. 이 농민봉기는 전국전으로 퍼졌습니다. 농민들은 관청을 공겨하여 탐관오리들을 굴복시켰으며, 진주성을 점령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를 계기로 북쪽으로 함흥으로부터 남쪽의 제주에 이르기까지 전국적으로 퍼지게 되었습니다.

봉기의 규모가 커지자 조정에서는 중앙 관리를 각 지방에 파견하여 농민의 요구 조건을 받아들이고 부정을 저지른 자들을 처벌하였다. 또 세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개선안을 마련하였지만 큰 성과는 거두지 못하였다.(44쪽)


조정은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철종(25대왕)은 안핵사(민란을 수습하기 위해 파견한 임시벼슬)로 박규수를 파견하였습니다. 박규수는 진주로 내려가서 “내가 농민이었어도 이렇게 했을 것 같습니다.”라는 상소를 올렸습니다. 관리들에게 별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철종은 암행어사를 보내서 부정한 관리들을 찾아 벌을 주려 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잘 실행되지 않았습니다.

작은 이야기 큰 역사_조선 후기에 새로 생겨난 종교에는 무엇이 있을까?


최제우는 서학이 우리 것을 해치고 사회를 위태롭게 한다고 생각하였다. 또 성리학만으로는 백성이 원하는 개혁과 변화를 이룰 수 없기 때문에 새로운 종교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최제우는 서학에 맞선다는 의미에서 동학을 창시하였다. 동학은 서학에 대항하기 위하여 만든 것이지만 전통적인 민간신앙, 유교, 불교, 및 서학의 좋은 점을 받아들였다.

동학은 인내천과 후천 개벽 사상을 내세웠다. 인내천은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뜻으로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사상이다. 추천개벽은 지금 세상이 끝나고 백성이 바라는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이라는 사상으로 당시 살아가기가 어려웠던 백성에게 개로운 희망을 심어 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상은 신분 차별이 엄격했던 당시 사회에서는 받아들여지기 어려웠다. 조정은 세상을 어지렵히고 백성을 속이는 종교라 하여 동학을 금지하였고 최제우를 처형하였다.

백성에게 펴진 동학은 이후 동학 농민 운동으로 이어졌다.

용담유사(동학농민혁명기념관) 최제우가 동학의 교리를 알리기 위하여 한글로 지은 가사집이다.(교과서 45쪽)

동경대전: 동학의 이론을 한자로 정리해 놓은 책.

참고: 정감록_이씨 왕조가 끝나고 정도령이 계룡산을 도읍으로 하여 새로운 국가를 세운다.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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