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수업/초등학교 6학년 1학기 사회

[초등학교6학년 1학기 사회] 2. 근대국가 수립을 위한 노력과 민족운동_1)조선의 개항 첫번째

지니쌤 동진이 2017. 4. 14. 11:37

[초등학교 6학년 1학기 사회 요점 정리 및 해설]


2. 근대 국가 수립을 위한 노력과 민족 운동

   1) 조선의 개항

   2) 자주독립 국가의 선포

   3) 나라를 지키기 위한 노력

   4) 나라를 되찾기 위한 노력


학습내용: 조선의 개항 과정을 알아 봅시다.


19세기의 조선: 안과 밖으로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54쪽)

나라 안(국내)

 세도 정치의 잘못으로 살기 어려워진 백성의 봉기가 끊이지 않음.

나라 밖(국외)

 서양과 일본의 세력이 조선을 위협하기 시작.

조선은 세도 정치의 잘못을 바로 잡고 서양과 일본의 세력을막아 내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조선은 서양과 일본의 세력을 어떻게 막아 내려고 했을까요?

-조선이 개항할 수 밖에 없었던 까닭은 무엇일까요?

         (개항: 항구를 열어 외국과 문물을 주고 받는일)

이양선: 조선의 배와 달리 특이한 모양을 한 서양의 배라는 의미에게 붙여진 이름이다.


서양 세력이 조선과 통상하기 위하여 벌인 일과 조선의 대응 모습을 알아봅시다.
   (통상: 나라와 나라 사이에 서로 물건을 사고파는 것.)
고종(26대왕)은 서양의 여러 나라가 조선에 통상을 요구하고 나라가 혼란스러울 때 왕이 되었습니다.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이 어린 고종을 대신해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어떤 정치를 했나(55쪽)
-흥선대원군은 서양세력의 위협을 이겨냈습니다.
-세도 정치로 인한 문제점을 바로 잡기 위하여 왕권을 강화 하였습니다.

-부정 부패를 막고 민생을 안정시키기 위함 개혁을 추진.

1. 부패한 관리를 내 쫓고 능력에 따라 인재를 고루 등용.

2. 부족한 재정을 확충하기 위하여 양반에게도 세금의 일종인 군포를 걷음.

3. 백성들을 괴롭혔던 서원 정리.

4. 왕실의 권위를 되찾기 위해 경복궁 중건(임진왜란때 불 탔었다.)

결과 : 흥선대원군의 개혁정책은 백성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

        경복궁 중건은 백성들에게 원망을 듣기도 하였다.

군포: 세금중 하나로 군대에 가지 않는 대가로 내던 삼배나 무명으로 내는 것.
서원: 선비들이 학문을 닦고 선현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


 해설: 1863년 철종(25대왕)이 죽고 고종이 어린 나이로 즉위하였습니다. 당시 고종의 나이는 12살 밖애 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대신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세도 정치로 인해서 어려워진 나라를 재정비 하면서 문제점을 해결하고자 했습니다.
그는 세도정치의 문제점을 해결하려고 하였습니다. 세도정치 시적 정권을 장악했던 안동김씨를 밀어내고 능력에 따라 다양한 사람들을 고루 등용하였습니다.
그리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임진왜란 때 불탄 경복궁을 중건하였습니다. 이 때 원납전(원해서 내는 세금)을 걷었지만, 백성들은 원망하며 내는 세금 이라며 원망하였습니다.

뿐만아니라 흥선대원군은 백성들에게도 좋은 정책을 펼쳤습니다. 양반들은 군대에 면제를 받았기 때문에 군포는 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은 양반들에게도 군포를 내라고 했습니다. 군포란 군대에 가지 않는 대신 삼베나 무명으로 세금을 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서원을 폐지하였습니다. 서원은 면세 특권이 있었고, 이들은 백성들을 힘들게 했습니다. 서원은 전국적으로 600여개가 있었는데 47개만 남겨두고 모두 없애버렸습니다.


경복궁(서울특별시 종로구)

경복궁은 조선 제일의 법궁(왕이 사는 궁)이었습니다. 태조4년(1395년) 창건되었습니다. 임진왜란때 불에 탔으며, 흥선대원군이 재건하였습니다.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며 많은 부분이 훼손된 아픈 역사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왕권을 강화하고 나라를 안정시키기 위하여 다른 나라와 수교하는 것을 반대하였습니다. 통상요구를 거부 하자 서양의 여러 나라는 군대를 앞에서 조선을 침략하였습니다.


병인양요(1866년)와 신미양요(1871년)


병인양요

신미양요

원인

조선이 프랑스인 선교사와 천주교인 처형한사건(병인박해)을 구실로 강화도로 침략함.

병인양요가 일어나기 전 미국 상선이 대동강에서 평양부근에서 통상을 요구 했으나 거부했습니다. 미국 선원들은 통상을 거부하는 조선관리를 가두고 포를 쏘며 행패를 부렸습니다. 이에 평양사람들은 미국 상선을 불태워 침몰시킴. 이 사건을 구실로 미국은 군함을 보내 강화도를 침략.

전개

조선은 양현수정족산성에서 프랑스 군과 싸움.

어재연이 이끄는 조선군이 광성보에서 끝가지 싸움. 조선군이 강력하게 저항하였고 조선 조정 역시 굴복하지 않음.

결과

조선이 이겼으며, 프랑스군은 외규장각의 귀중한 물건을 빼앗을 뒤 물러감.

미군은 스스로 물러갔다.

(* 외규장각: 정조가 왕실 관련 서적을 보관할 목적으로 강화도에 설치한 규장각으로 정조는 한성(오늘날 서울)에 있는 규장각을 내규장각, 강화도에 있는 규장각을 외규장각이라고 하였다.)

두 차례나 서양의 침략을 물리친 흥선대원군은 전국 각지에 서양 세력이 침입하면 싸우겠다는 척화비를 새웠습니다. 이는 서양과 교류를 하지 않겠다는 뜻으 굳건히 한 것입니다.(55쪽)

병인양요, 신미양요 지도

해설:

병인앙요: 조선에 통상을 요구하며 가장 먼저 쳐들온 나라는 프랑스였습니다. 프랑스는 1866년 9월 한화도를 점령하고 한강 수로를 막았습니다. 그들은 프랑스 선교사들과 천주교인들을 죽인 것에 항의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 했습니다. 그러나 진짜 이유는 통상을 요구하기 위한 것 이었습니다. 양헌수는 정족산성에서 프랑스군을 격퇴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조선의 완강한 저항에 프랑스군은 철수하고 돌아갔습니다. 프랑스 군이 돌아가는 길에 외규장각에 있는 조선왕조 의궤를 약탈해 갔습니다.

병인양요 후 흥선대원군은 서양물품의 수입을 엄격하게 금지했습니다. 밀수하다가 걸리면 사형에 처하기도 했습니다.

신미양요: 1866년 제너널셔먼호가 대동강에 왔었습니다. 그들은 통상을 요구하였지만 조선은 반대하였습니다. 평양감사 박규수는 그들에게 식량을 줄테니 조용히 돌아가라고 말 했지만 그들은 밤에 민가를 습격해 약탈해 갑니다. 평양사람들은 제너널셔먼호를 공격해 선원 23명이 모두 죽었습니다.

미국은 제너널셔먼호 사건을 통상을 요구하였으며, 조선을 무력으로 압박했습니다. 그러나 어재연이 광성보에서 끝까지 저항했습니다. 끝내 광성보는 미군에 점령되었지만 끝가지 나라를 지키겠다며 끝가지 싸웠습니다. 조선의 저항에 미국은 철수 하고 돌아갔습니다. 


작은이야기 역사:

조선왕조 의궤는 왜 프랑스에 있었을까?(교과서 59쪽 참고)

외규장각은 규장각에서 보관하던 왕실 물품, 조선왕조 의궤 등을 보다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하여 1782년 강화도체 설치되었다.
병인양요때 강화도를 침략한 프랑스군은 정족산성 전투에서 패한 후 물러가면서 외규장각애 있던 왕신 물품과 책을 약탈하고 외규장각을 비롯한 강화 궁궐을 불태웠다.
이때 빼앗겼던 조선왕조의궤는 프랑스 국립 도서관 창고에 보관되어 있었다. 1975년 프랑스에서 도서관 사서로 일하던 박병선이 조선왕조의궤를 발견하였고 이 사실을 우리나라에 알렸다. 그 뒤로 우리나라는 이 책을 돌려 받기 위하여 프랑스와 협상하였다. 2011년 조선왕조의궤는 마침내 우리나라로 돌아오게 되었다.

조선왕조의궤: 왕실과 나라의 중요행사를 그림과 함께 기록해 놓은 책이다.

           병인양요때 강화도를 침략한 프랑스 군

강화 삼랑성(인천광역시 강화): 정족산성이라고도 하며 병인양요때 양헌수가 이끄는 조선군이 프랑스 군에게 승리를 거둔 곳이다.

강화 광성보(인천광역시 강화): 신미양요때 어재연이 이끄는 조선군이 미군에 맞서 싸운 곳이다.

(척화비: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 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 하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하는 일은 나라를 파는 일이다. 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해설: 흥선대원군은 프랑스와 미국과 싸우고 자신감이 넘쳤습니다. 통상수교 거부의 뜻으 거욱 강하게 밝히여 척화비를 세웠습니다. 척화비에는 “서양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 라고 새겨져 있다.”라고 썼습니다. 외국과 통상을 맺지 않겠다는 의지를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강화도 조약(1876년)

원인

운요호 사건(1975년).
-일본은 조선에 통상을 강요하기 위해 군함으로 운요호를 보냈다.
-일본은 초지진 부분을 불법으로 측량.
-조선군은 포를 쏘며 일본에게 돌아가도록 경고
-이 사건을 구실로 일본은 조선에 개항 요구

전개

일본이 조선을 무력으로 위협함.

결과

두 나라의 대표가 강화도에 모여 조약을 맺음(강화도 조약).

조선은 개항을 하개 되었습니다.

강화도조약

주요내용

제1조. 조선은 자주국이며, 일본과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
제4조. 조선은 부산 이외에 두곳의 항국를 개항하고 일본인이 와서 통상하는 것을 허가한다.
제7조. 일본인이 조선의 해안을 자유롭게 측량하는 것을 허가한다.
제10조. 조선의 항구에서 죄를 지은 일본인을 일본 관리가 심판한다.

강화도 조약은 조선이 외국과 맺은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었으나 조선에 불리한 불평등 조약이었습니다.

해설: 1875년 8월 국적불문의 배가 강화도에 나타났습니다. 조선은 포격을 가했습니다. 그 배는 “운요호”라는 일본배였습니다. 그들은 조선에 반격을 하였고 통상을 맺자며 압박했습니다.  1876년 조선 대표와 일본 대표들은 강화도에서 조약체결을 맺었습니다.

강화도 조약이 왜 불평등 조약일까요?

해설: 강화도 조약은 큰 문제점이 있었습니다. 바로 조선에게 많이 불리한 불평등 조약이었습니다. 첫 번째 조항은 “조선은 자주국이며 일본과 동등한 권리는 갖는다”라고 했는데 이는 조선이 청나라로부터 자유로운 나라임을 말 하는 것입니다. 이런 조항을 넣은 이유는 조선의 일에 청나가가 간섭을 하지 못하도록 차단하려는 의도였습니다.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는데 걸림돌이 되는 청나라를 견제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일본이 조선의 해안을 측량할 수 있는 권한을 갖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일본 사람이 조선에서 죄를 지었을 경우 일본 관리가 재판을 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일본사람이 잘못했는데 일본사람에게 넘긴다면 공정한 심판을 받을 수 있을까요?
우리나라의 최초의 근대조약인 강화도 조약은 불평등 조약입니다.

일본 군함 운요호

      강화도 조약을 맺는 모습

 두 인물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 해 봅시다.(60-61쪽)

조선 후기에 이양선을 앞세운 서양 세력이 조선에 통상을 요구할 때 서로 다른 주장을한 두 인물이 있었다. 일본 및 서양 세력과 통상해야 한다는 박규수와 이를 반대한 사람이 최익현이다.

박규수의 입장-서양과 통상하는 것에 찬성합니다. 만약 서양의 여러 나라가 공격해 오면 사워 물리치고 교류를 요청하면 조약을 맺어 근대 문물을 받아들여 부강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최익현의 입장-저들의 물건은 그 양이 무한합니다. 우리의 것은 대부분 백성의 생존과 연관이 있으며, 우리 땅에서 나는 것이고 그 양이 한정되어 있습니다. 저들의 사치스러운 물건과 교역하게 되면 백성의 마음이 망가지고 풍속은 문란해질 것입니다. 그리고 수년 내에 우리는 망할 것입니다. 최익현의 상소는 받아지지 않았으며  흑산도로 유배되었다. 이후 그는 항일 의병장으로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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