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수업/초등학교 6학년 1학기 사회

[초등학교6학년 1학기 사회] 2. 근대국가 수립을 위한 노력과 민족운동_2)자주독립 국가의 선포 두번째

지니쌤 동진이 2017. 4. 18. 01:32

[초등학교 6학년 1학기 사회 요점 정리 및 해설]


2. 근대 국가 수립을 위한 노력과 민족 운동

   1) 조선의 개항

    2) 자주독립 국가의 선포

    3) 나라를 지키기 위한 노력

    4) 나라를 되찾기 위한 노력


학습목표: 조선의 근대화를 위한 노력과 변화된 생활 모습을 알아봅시다.

근대 문물의 수용으로 변화된 생활 모습을 살펴 봅시다.
근대 문물이 들어와 일상생활에 많은 변화가 생겨났습니다. 어떤 변화가 생겼을까요?


전등과 가로등
-전등과 가로등의 설치로 밤 시간을 이용하는 사람이 늘어났습니다.

경복궁 전등에 불이 켜지는 모습(상상화)

해설: 경복궁 건청궁은 우리나라 최초로 전등이 켜진 곳입니다. 1887년 경복궁에 750개의 전등을 켜는 점등식이 있었습니다. 미국에 에디슨전기회사가 설립(1878년)된 지 10년이 채 되지 않아 우리나라까지 건너온 것입니다. 이는 일본이나 중국보다 2년이 빠른 것이기도 합니다.
경복궁에 있는 향원정에 있는 물로 동력을 일으켜 어두운 밤을 밝혔습니다. 당시 궁안의 사람뿐만 아니라 궁밖의 사람들도 구경을 하려고 소란스러웠다고 합니다. 일부 궁녀들은 소란한 발전기 소리와 밝은 불빛 때문에 불면증에 걸리기도 했다고 하네요. 더구나 발전기의 뜨거운 물이 향원정의 물로 흘러가면서 물고기들이 떼죽음을 당하는 것을 보고 나라에 좋지 않을 징조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전등과 가로등의 설치로 밤 시간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늘어났습니다. 그리고 전등이 밤을 밝혀줌으로 인해 한성(서울)에는 밤에만 영업하는 시장도 생겨났습니다.


전신과 전화
-전신과 전화가 설치되어 소식을 빠르게 주고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70쪽)
-전화(75쪽)
전화가 처음 도입되었을 때 사람들은 전화에 매우 낯설어 하였습니다.
고장난 전화기에 감전되거나 전화 소리에 놀라 피하기도 하였습니다.
심지어 전화기에 귀신이 붙었다고 생각하기도 하였습니다.
무엇보다 전화기를 들어 다른 사람과 대화하는 것이 예의에 어긋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전신: 문자나 숫자를 전기 신호로 바꾸어 보내는 것.


해설: 전신은 문자나 숫자를 전기 신호로 바뀌어 소식을 빠르게 주고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1884년 부산과 일본사이에 설치되며, 1885년에는 인천과 청나라 사이에 전신이 놓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전화가 설치된 곳은 덕수궁이었습니다[1898년 1월 28일(광무2년)]. 고종황제의 명을 각 정부 부서로 전달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고종황제의 전화를 받는 사람은 전화를 받기 전에 큰절은 4번 한 후에 전화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통화를 할 때는 무릎을 꿇어야 했습니다. 마치 고종황제가 앞에 있다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 후 1902년 일반 사람들도 전화를 사용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전화를 연결해주는 교환원이 있었습니다. 대화중 말다툼을 한다거나 심하게 욕설이 나올 경우 교환원이 통화를 중단하기도 했다고 하네요.
좀 우습지요? 그러나 오늘날 보이지 않는다고 버릇없이 통화를 하거나, 인터넷 상에서 누군지 모른다고 악플을 다는 일이 많은 오늘을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고 배워야할 부분이 분명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전차
-근대 문물이 들어오면서 거리 모습을 크게 바꾸어 놓을 것은 전차였습니다. 전차를 운행하기 위해 도로를 정비하고 전봇대를 세웠습니다.(70쪽)
-전차
전차는 개통 당시 인기가 높았습니다.
전국 각지에서 남녀노소 할 것 업이 많은 사람들이 전차를 구경하거나 타 보기 위하여 몰려들었습니다.(75쪽)


전차

해설: 1898년 한성전기회사가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일 년 후 1899년 5월 20일 서대문~청량리까지 전차가 운행되었습니다. 이는 아시아에서 두 번째 였습니다.(첫번째 교토) 승차권에는 상등과 하등이 있었습니다. 양반들이 천민과 함께 타기를 꺼려했다고 합니다. 갑오개혁 때 신분제가 폐지되었지만 양반이었던 사람들은 천민이었던 사람들과 함께 타기 싫어해 돈을 더 내고 양반전용칸에 탔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전차에 관심이 있었고 전차를 구경하기 위해 시골에서 올라오는 사람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정류장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어서 아무데서나 타고 내릴 수 있었다고 하네요.
그런데 전차 개통 10일만에 어린아이가 치어 죽은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화가난 사람들은 전차를 불태웠다고 합니다. 고종황제는 죽은 아이를 안타까워하며 성명서를 발표했다고 합니다.

근대 문물의 수용으로 변화된 거리 모습

옷(71쪽)
-거리에는 다양한 색깔과 모양의 서양 옷을 입은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
-서양식 군복을 입고 신식 총으로 훈련하는 군인들의 모습도 볼 수 있었습니다.

해설: 개항 후 신문물이 유입되면서 의식주를 비롯한 생활상에도 큰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전톡 복식의 개량은 근대화의 상징이었지만 반말도 많이 있었습니다. 아관파천직후 단발령은 폐지되었으며 인인과 경찰들은 서양식 제복을 입었으며, 점차 확산되었습니다.
독립신문을 비롯해 당시 신문에는 양복을 비롯하여 양산, 중절모, 스틱 등 서양식 소품 광고가 실리기도 했습니다. 상류층의 여성들이나 유학후 귀국한 여성들 가운데 양장을 착용한 사람들도 나타났습니다.

서양옷을 입은 사람들

서양식 군복을 입고 신식 총으로 훈련하는 군인들


음식과 식사문화(71쪽)
서양식 음식과 식사 문화도 들어왔습니다.
궁중에서는 커피와 홍차를 마셨습니다.
서양식 요리와 과자도 전래되었습니다.(71쪽)

서양식 요리를 먹는 사람들

교과서에 나오는 "서양음식을 먹는 사람들" 사진 속의 배경은 어디일까요? 이 사진을 보는 순간 덕수궁에 있는 석조전의 "대식당"이 떠올랐습니다.

석조전은 대한제국때 지어진 신식건물입니다. 덕수궁에 가보면 마치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듯한 건물이 있는데 그곳에 석조전입니다. 그곳 2층에 올라가면 "대식당"이라고 공식적인 행사에서 만찬을 베풀었던 곳입니다.(석조전은 미리 예약을 해야합니다. 덕수궁 가기 전 꼭 체크하세요. ^^)

해설: 개항 후 신문물이 유입되면서 음식에도 변화가 생겼습니다. 고종은 궁궐에 서양 음식만을 던담하는 요리사를 채용 할 정도로 서양 음식을 즐겼습니다. 당시 궁궐의 연회에는 최고급 유럽식 음식이 차려졌고, 샴페인 등도 있었습니다., 고위 관료들은 서양인들과 교류하면서 서양음식, 커피 등도 즐기기 시작했습니다. 민간에서는 청요리집(중국음식점)이 생겼으며 어묵, 초밥 등 일본 음식도 생겼습니다.

도시의 건축물(72쪽)
도시에서는 서양식 건축물이 세워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건축물은 나무와 돌뿐만 아니라 벽돌, 유리 등으로 지어져서 오늘날과 거의 비슷한 모습이었습니다.

해설: 우리나라 전통적인 가옥은 목조건물 입니다. 근대 문물이 들어오면서 벽돌, 유리 등으로 지어진 건물들이 생겼습닏. 서양식 건축물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대표적으로 바로 앞에서 배웠던 독립문(1897년, 66쪽)입니다. 그리고  명동성당(1898년), 덕수궁에 있는 석조전(1910년)등이 있습니다.

덕수궁 석조전(서울특별시 중구)

명동성당 

질문: 변화된 거리의 풍경에서 볼 수 있는 근대적인 것은 무엇일까요?


학교(72쪽)
교육의 중요성이 더욱 강조되면서 소학교, 중학교, 기술학교, 외국어 학교 등 다양한 관립 학교가 세워졌습니다.
전국 각지에서 애국지사와 단체, 선교사들이 사립학교를 세워 근대식 교육을 하였습니다.(72쪽)
*관립학교: 국가 기관에서 세워 운영하는 학교

                  배재학당   

    근대식 학교의 수업 모습  

해설: 우리나라 최초의 관립학교는 “육영공원(1886년)”입니다. 영어를 본격적으로 가르쳤던 학교이며, 주로 고위 관료들의 자녀들이 다녔습니다. 그리고 선교사들이 세운 사립학교로는 배재학당(배재대학교의 전신)과 이화학당(이화여자대학교의 전신)등이 있습니다. 특히 이화학당은 여성들을 교육하는 학교였습니다.
특히 갑오개혁(1894)년 이후 많은 학교들이 세워졌습니다. 외국어 학교, 최초의 중학교인 한성중학교, 교사를 양성하는 사범학교도 생겼습니다. 대한제국 때 고종황제가 산업기술을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을 했는데, 인재를 키우기 위해서 상업학교, 실업학교들도 세워졌습니다.


기타(73쪽)
신문사와 서양식 무기 공장, 서양식 병원 등이 세워졌습니다.(73쪽)

   광혜원: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병원이다.  

해설: 신문_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인쇄소는 박문국(1883년)입니다. 인쇄소의 발전으로 인해 우리나라 최초의신문인 “한성순보”가 발행되었습니다. 그러나 순한문이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에게 읽혀지지 못했습니다. 독립신문(1896년)은 순한글과 영어로 발행되었으며, 황성신문(1898년)은 일본에게 외교권을 빼앗긴 을사늑약(1905년)때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 실린 것으로 유명합니다.
병원_갑신정변(1884년)때 명성황후의 양조카 민영익이 부상을 당했습니다. 선교사 알렌은 의사였는데 민영식을 고쳐 주었습니다. 명성황후는 자신의 양조카를 고쳐준 알렌을 신임하였고, 알렌은 최초의 근대식 병원인 "광혜원"을 개원했습니다.
광혜원은 후에 세브란스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단발령(73쪽)
당시 사람들은 머리카락도 부모에게 물려받은 것이라 생각하여 자르지 않고 길렀습니다.
남자들은 성인이 되면 머리카락을 끌어 올려 상투를 틀었는데 을미사변 이후 상투를 자르라는 단발령이 실시되었습니다.
질문? 당시 사람들은 단발령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였을지 말해 봅시다.


기차
기차는 많은 사람과 물자를 먼 곳까지 빠르게 실어 날랐습니다.
철도가 놓이면서 마을의 모습이 바뀌고 새로운 도시도 생겨났습니다.
하지만 철도는 일본이 침탈의 목적으로 만들었습니다.
우리 민족의 희생으로 만들어진 철도를 통하여 많은 일본군과 무기가 실려 왔고, 우리의 쌀과 자원이 일본으로 빠져 나갔습니다.(74쪽)

해설: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는 경인선(서울~인천)입니다. 조선정부는 미국의 기술을 얻어 공사를 진행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방해로 미국인 아닌 일본의 주도하게 공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경부선(서울~부산), 경의선(서울~신의주)를 잇는 철도가 개설되었습니다. 철도가 놓으면서 새로운 도시도 생겨났고, 물자를 먼곳까지 빠르게 실어 날랐습니다. 그러나 일본은 철도를 통해서 우리나라의 자원을 약탈해 갔습니다. 뿐만 아니라 일본은 전쟁에 필요한 군수물자를 나르는데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질문: 근대 문물이 들어와서 편리해진 점은 무엇일까요?
질문: 근대 물문이 들어오면서 달라딘 생활 모습을 함께 살펴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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