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수업/초등학교 6학년 1학기 사회

[초등학교6학년 1학기 사회] 2. 근대국가 수립을 위한 노력과 민족운동_3)나라를 지키기 위한 노력_첫번째

지니쌤 동진이 2017. 4. 20. 22:06

[초등학교 6학년 1학기 사회 요점 정리 및 해설]


2. 근대 국가 수립을 위한 노력과 민족 운동
    1) 조선의 개항
    2) 자주독립 국가의 선포
    3) 나라를 지키기 위한 노력
    4) 나라를 되찾기 위한 노력


학습목표: 일제에 대항하여 나라를 지키려 했던 우리 민족의 노력을 알아봅시다.


대한제국은 서양 문물을 받아들여 자주적인 근대 국가로 발전하기 위해 노력하였지만 큰 성과를 내지 못하였다. 이에 우리 민족은 스스로 지키고 발전하기 위하여 다양한 방법으로 저항운동을 펼쳤다.
1) 우리민족은 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어떤 노력을 기울였을까?
2) 일본은 어떻게 우리나라를 빼앗으려고 하였을까?(76쪽)

태백산 전투(독립기념관) 평민출신 의병장인 신돌석은 태백산맥 일대에서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76쪽)


을사늑약과 우리 민족의 저항에 대하여 알아봅시다.(77쪽)

러일전쟁 1904년 2월 8일
-고종 황제는 서양 여러 나라와의 외교활동을 통하여 대한제국의 자주권을 지키려고 노력하였습니다.

-대한제국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이 강해졌습니다. 그러자 일본은 전쟁을 준비하였습니다.

-전쟁 직전 대한제국은 일본과 러시아 사이에서 중립을 선언하였습니다.
*자주권 국가가 국내 문제나 대외문제를 자기 뜻대로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는 권리.


전개:
-대한제국이 중립 국가를 선언하였지만 일본은 이를 무시하고 대한제국을 차지하기 위해 전쟁을 벌였습니다.(러일전쟁)
-일본은 전쟁이 시작되자 우리 영토와 많은 시설을 군사적으로 이용하였습니다.
-일본은 전쟁에 필요한 물자를 운반하는데 한국인을 동원하였습니다.(77쪽)
-일본은 러일전쟁 중에 독도를 자신들의 영토에 강제로 편입시켰습니다. 이것은 우리 영토에 대한 침략행위이며 국제법상 불법행위였습니다.(78쪽)
결과:
-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우리나라에 대한 독점적 지배권을 확보하였습니다.
-일제는 본격적으로 우리나라를 침략하기 시작하였습니다.(78쪽)

러일전쟁지도

해설:

-고종황제가 러시아공사관(아관파천)으로 피해 있던 일을 기억하시나요? 청일 전쟁이후 우리나라는 러시아의 도움을 받으려 하였습니다.

고종황제는 외국과 교류를 하면서 자주권을 지키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우리나라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이 커지자 일본은 러시아를 공격하면서 전쟁을 시작하였습니다. 우리나라는 중립국가임을 선언하였지만 일본은 이를 무시하고 대한제국을 차지하기 위해 전쟁을 벌였습니다.(77쪽)

-일본은 1904년 인천과 뤼순에서 러시아를 공격하였습니다. 전쟁이 시작되자 일본은 우리 영토와 많은 시설들 그리고 우리나라 사람들까지 동원하여 군사적으로 이용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독도를 불법적으로 일본의 영토에 편입시키기까지 하였습니다.
일본은 뤼순에 이어 봉천에서까지 러시아를 공격해 몰아냈습니다. 러시아는 동해바다를 통해서 일본을 공격하였지만 결국 일본의 승리로 끝이 났습니다.
전쟁이후 러시아는 일본이 우리나라를 지도, 보호, 감독할 수 있는데 인정 해 주었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이제 우리나라에 대한 독점적 지배권을 확보하게 되었고 본격적으로 우리나라를 침략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미국 워싱턴에 있는 대한제국 공사관(77쪽)  

러일 전쟁 당시 물자 운반에 동원된 한국인(77쪽)


일본의 독도 강탈(78쪽)
대한제국칙령 제41호
-대한제국은 1900년에 칙령 제41호를 반포하여 독도가 대한제국의 영토임을 명확하게 규정하였습니다.
-일본은 1905년에 시마네현 고시 제 40호를 통하여 독도가 주인 없는 섬이라고 우기면서 독도를 자기들의 영토에 불법으로 편입시켰습니다.
*칙령: 황제가 직접 말로 내린 명령

대한제국칙령 41호: 대한제국은 울릉도를 군으로 승격하고 울릉도 죽도 석도를 관할하게 하였다.

시마네 현 고시 제 40호: 일본은 독도를 다케시마라고 부르고 일본의 시마네현에 불법으로 편입시켰다.

해설: 독도가 우리나라 땅인 이유?

대한민국의 아름다운 영토 독도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독도는 우리나라 땅입니다. 교과서에 나온대로 고종황제는 일본보다 5년 앞서서 독도가 우리땅임을 명확하게 규정했습니다.(대한제국칙령41호, 1900년)


이외에 역사 속에서 우리나라의 땅이라는 증거를 살펴봅시다.
첫째, 신라 지증왕13년 512년 이사부 장군은 우산국(울릉도와 독도) 정벌을 통해서 신라로 복속시켰습니다.
둘째, 세종실록지리지를 보면 “우산(于山)과 무릉(武陵) 두 섬이 현의 정동쪽 바다 가운데 있다. 두 섬은 서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아, 날씨가 맑으면 바라볼 수 있다. 신라 때에 우산국 또는 울릉도라 하였다."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셋째, 숙종왕때  안용복은 일본에 가서 독도가 우리땅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왔습니다.(1696년)


일본이 독도가 대한민국 땅임을 인정하는 증거도 있습니다.
첫째, 조선을 정탐하고 돌아간 외무성 관리 사다하쿠보는 ‘독도는 울릉도의 부속도서’라고 보고하였습니다(1870년).
둘째, 울릉도와 독도의 귀속에 관한 시마네현의 질의에 대해 일본 내무성은 “이 문제는 1696년 이미 끝난 문제로 울릉도와 독도는 일본과 관계없다”라는 답변을 하였습니다(1877년). 이는 울릉도와 독도가 우리 영토임을 일본에서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옛날지도에도 독도가 우리땅이라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팔도총도(1531년) 독도가 우리나라 땅으로 그려지고 있다.

                 동국대전도(1755-1757년)

일본사람이 그린 지도에도 독도는 우리 땅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일본, 다나카 쇼쇼(田中紹祥),  신찬조선국전도(新撰 朝鮮國全圖)

오노 에이노스케(小野英之助), 1892년, 일본국전도를 보면 독도는 일본과 무관한 땅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을사늑약 1905년 11월 17일 (78쪽)
-고종황제의 거부에도 불구하고 일제는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는 조약을 강제로 체결했습니다(을사늑약, 1905년).
-일제는 대한제국을 침략하기 위하여 한성(오늘날 서울)에 통감부를 설치하였습니다.
-일제는 대한제국의 내정을 장악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일제: 일본제국주의 또는 일본 제국을 줄인 말로 자기 나라의 이익을 위하여 여러 나라를 침략한 일본을 일컫는 말.
*늑약: 나라 사이에 강제로 맺은 조약

중명전(서울특별시 중구) 일제의 강압에 의해 을사늑약을 맺은 곳으로 원래 이름은 수옥헌이었다.(79쪽)


해설: 러일전쟁 직전(1904년) 대한제국은 중립국임을 선언하였으나 일본은 러일전쟁 반발과 동시에 서울을 점령하였습니다.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일본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는 조약을 맺었습니다. 하지만 이는 고종황제가 허락한 적이 없었습니다. 이는 강제로 맺어진 것이기 때문에 조약이 아닌 “늑약”이라고 부릅니다. 일제는 대한제국의 내정을 장악하였고, 한성(서울)에 통감부를 설치하였습니다. 이때부터 일제는 대한제국의 국권을 본격적으로 침탈하기 시작했습니다.
*통감부: 1905년부터 1910년까지 일제가 서울에 둔 관청. 대한 제국을 감독하고, 침략을 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을사늑약에 대한 우리 민족의 저항 (79쪽)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전국에서 반대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사람들은 을사늑약의 무효를 주장하였습니다.
-을사늑약이 부당함을 알리는 글을 신문에 실었습니다.
-을사늑약에 반대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도 있었습니다.(민영환)
-을사늑약에 반대하며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나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습니다.


해설: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이에 반대하는 운동이 있었습니다. 그 시작은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이었습니다. 이 논설은 황성신문에 실렸으며 일본을 비판하였습니다.

-다음은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 논설 중 일부 입니다.

"저 개돼지만도 못한 소위 우리 정보의 대신이란 자들을 자기 일시의 영달과 이익이나 바라면서 위협에 겁먹어 머뭇대거나 벌벌떨며 나라를 팔아먹는 도적이 되기를 감수했던 것이다. 아 4천년의 강토와 5백년의 사직을 남에게 들어 바치고 2천만 생령들로 하여금 남의 노예가 되게 하였으니 저 개돼지보다 못한 외부대신 박제순과 각 대신들이야 깊이 꾸짖을 것도 없다."

-을사늑약에 반대하는 많은 상소들을 올렸으며, 시전 거리에 상인들은 문을 닫고 거리에서 시위를 하였습니다.

민영환, 을사늑약에 대한대하는 유서를 남기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79쪽). 

-시종무관장(임금을 호위하는 무관) 민영환은 을사늑약에 반대하며 고종 황제와 동포에게 보내는 유서를 남긴 채 자결하였습니다.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나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습니다.(다음게시글에서좀 더 자세히 다루겠습니다.-지니쌤-)


헤이그특사파견 1907년 을사늑약이 무효임을 국제사회에 알리려고 함.

-고종황제는 만국 평화회의가 열리는 네덜란드 헤이그에 특사를 파견하였습니다.(이준, 이상설, 이위종)

-그러나 일제의 방해로 실패하였습니다.

헤이그 특사 : 왼쪽부터 이준, 이상설, 이위종   

 

해설: 을사늑약이 체결된 후 한성(서울)에는 통감부가 설치되었습니다. 초대 통감을 부임하여 외교뿐만 아니라 내정 전반을 간섭하기 시작했습니다.
고종황제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 평화외의에 이준, 이상설, 이위종을 특사로 파견하여 을사늑약이 황제의 허락없이 체결된 불법이라는 것을 알리게 했습니다(1907년).

-헤이그 특사로 파견된 사람들은 어떤 주장을 하였을까요? 다음은 이상설의 주장입니다.

"일본이 무력으로 우리나라를 압박하여 각국에 대한 국제교섭의 권리를 강탈하였다. 한국은 자주국인데 어째서 일본이 한국의 국제 교섭에 간여하여 우리나라 황제의 명을 받든 사절단이 이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는가? 귀국 총통 및 대표는 위기에 빠진 약소국을 돕고 조력을 베풀어 우리 사절단을 만국평화회의에 참석시키고 모든 호소를 허용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헤이그 특사 파견 결과:
-일제는 이를 구실로 고종황제를 강제로 퇴위시켰습니다.
-그리고 대한제국의 군대까지 해산시켰습니다. 


해설: 고종황제가 헤이그특사를 파견했다는 것을 알게된 일본은 고종황제를 강제로 폐위시켰습니다. 고종이 강제로 퇴위당한 후 곧바로 정미7조약(1907년)이 체결되었습니다. 이로인해 대한제국정부는 법령제정및 행정처분과 고위관리의 임명등 모든 통치 행위에 통감의 승인을 얻어야했습니다. 또한 일본인을 대한 제국의 관리로 임명한다는 내용도 담고 있었습니다. 뿐만아니라 대한제국의 군대를 해산시킨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군대를 해산하는 과정에서 시위대의 대대장 박승환이 자결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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